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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48권, 선조 27년 2월 19일 무진 2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유성룡이 방어의 요새인 조령은 사정을 잘아는 신충원에게 방어를 맡기라고 하다

영의정 유성룡이 아뢰기를,

"오늘날 형세는 조령(鳥嶺)을 굳게 지키는 계책이 가장 긴급합니다. 충주(忠州)는 경도(京都)의 상류에 있는 지역으로 나라의 문호가 되니 충주를 지키지 못하면 한강을 연한 수백 리가 모두 적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충주를 보전하려면 조령을 굳게 지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조령의 험준함을 막지 못하면 충주 또한 지킬 수 없다는 것은 지난날 신립(申砬)의 패전으로 이미 분명히 징험되었습니다.

지금 수문장(守門將) 신충원(辛忠元)이란 자는 바로 충주 사람인데 조령의 형세 곡절(曲折)을 소상히 알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조령의 영상(嶺上)에서는 길이 여러 갈래로 분산되어 있어 지킬 수가 없다. 영상에서 동쪽으로 10여 리쯤 내려오면 양쪽 절벽이 매우 험준하고 가운데에는 계수(溪水)가 고여 있는데 왕래하는 행인들이 횡목(橫木)을 놓아 다리를 만든 곳이 모두 24군데인데 이곳을 응암(鷹巖)이라 부른다. 만약 이곳에 병기를 설치하여 파절(把截)하다가 적병이 올때 다리를 철거하고 또 시냇물을 가로막아 두 계곡 사이로 큰 물이 차게 한다면 사람은 발을 붙이지도 못할 것이다. 이어 궁노(弓弩)·능철(菱鐵)·화포(火砲) 등의 병기로 지키면 불과 1백여 경졸(勁卒)로도 조령의 길을 튼튼히 막을 수 있다. 문경(聞慶) 동쪽에는 또 옛날 길이 있어 조령 서쪽으로 돌아 나오는데 산세가 극히 험준하여 백 년이나 사람의 왕래가 끊어짐으로써 등나무와 댕댕이 덩굴이 하늘을 가려 햇빛도 희미하다. 또 하나의 길은 문경의 서쪽에서 연풍(延豊)의 동쪽으로 나오는데 이 길 또한 심히 험준하니 수십 인이 숲속에 숨어서 지킨다면 이 두 곳으로는 적이 감히 넘어 들어오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충원이 또 말하기를 ‘거느린 승군(僧軍)과 산척(山尺)043) 으로 남아 있는 자가 아직도 1백여 인은 된다. 연풍 읍내와 서면(西面) 수회촌(水回村)은 땅이 지극히 비옥한데 지금 모두 사람이 살지 않는 땅이 되었으니, 파수군(把守軍)으로 하여금 둔전(屯田)케 하여 농사를 지어 군량을 마련했으면 한다. 또 화약이나 총포(銃砲) 등의 병기를 얻어 주야로 조련하면 수개월 후에는 정군(精軍)을 이룰 수 있다.’ 하였습니다.

그의 말한 바를 보건대 시험삼아 맡겨볼 만합니다. 만약 충원을 때에 맞추어 내려보내 그가 원하는 대로 요해지(要害地)를 가로막는 계책을 쓰게 하고 또 윤승훈(尹承勳)에게 글을 내려 그가 말한 바를 좇아 종자(種子)와 우척(牛隻)을 주어 농사짓는 자산으로 삼게 함으로써 조령의 적로(賊路)가 끊기게만 되면 적이 비록 황간(黃澗)·영동(永同)·금산(金山)의 사이에서 나오더라도 우리 군병이 전력으로 파수(把守)할 수 있을 것이며, 충주의 상류를 잃지 않는다면 경강(京江)을 지키기가 또한 용이할 것입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이 계사(啓辭)를 보니, 경이 나라를 위해 마음을 다하는 뜻을 알겠다. 마땅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8책 48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225면
  • 【분류】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領議政柳成龍啓曰: "今日形勢所在, 遮截鳥嶺之計, 最爲緊急。 忠州居京都上流之地, 爲國家門戶。 忠州不守, 則沿江數百里, 皆爲受敵之地, 欲保忠州, 則當自把截鳥嶺始。 鳥嶺若失險, 則忠州亦不可守矣。 前日申砬之敗, 已爲明驗。 今者有守門將辛忠元者, 乃忠州人, 言鳥嶺形勢曲折甚悉。 其言曰: ‘鳥嶺嶺上, 則雜路分散, 不可防守。 自嶺上東下十餘里, 兩崖斗絶, 中蟠溪水, 行人往來者, 橫木爲橋, 凡二十四處, 名曰鷹巖。 若於此處, 設機把截, 當賊兵臨至, 撤去橋梁, 又橫斷溪流, 使兩峽之間, 盡爲洪流, 人不能着足, 因以弓弩、菱鐵、火砲等器守之, 不過百餘勁卒, 而嶺路之把截自固。 聞慶以東, 又有舊路, 繞出於鳥嶺之西, 而山勢極險, 百年湮廢, 藤蘿林木, 蔽天迷日。 又有一路, 在聞慶之西, 出於延豐之東, 此路亦甚險, 使數十人, 伏於林木中守之, 則二處, 賊不敢逾入。’ 忠元又言: ‘其所率僧軍、山尺之遺在者, 尙可得百餘人, 而延豐邑內及西面 水回村, 地極肥饒, 而今皆爲無人之地, 欲以把守之軍, 屯田耕種, 以爲軍糧。 又得火藥、銃砲等器, 晝夜操鍊, 則數月之後, 可成精軍’ 云。 觀其所言, 足可試任。 如忠元及時下送, 使之依其所願, 爲把截要害之計, 又下書于尹承勳, 使之從其所言, 覓給種子、牛隻, 以爲耕墾之資。 假使鳥嶺之賊路已斷, 則賊雖出於黃澗永同金山之間, 我軍可以專力把守, 而忠州上流不失, 則京江把截亦易。 敢啓。" 答曰: "觀此 啓辭, 尤見卿爲國盡心之意。 當依所啓。"


  • 【태백산사고본】 28책 48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225면
  • 【분류】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