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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48권, 선조 27년 2월 12일 신유 5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대신을 인견하여 광녕 순무의 자문·왜의 항표의 진위와 공·사천을 병사에 충당하는 것 등을 논의하다

초경(初更)에 상이 행궁 편전에 나아가 대신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광녕(廣寧)의 이 자문은 어떠한가?"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것은 사 천사(司天使)를 모해한 것일 뿐 아니라 우리 나라를 모해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응창(應昌)이 한 짓이니, 내가 일찍이 자문의 규식을 익숙히 보았다. 도사(都司)는 원자(原咨)에 의거하여 몇 마디 말로 결말 지을 따름인데 금번에는 결어(結語)가 심히 많으니, 내 생각으로는 한 포정(韓布政)은 모르는데 도사가 스스로 한 짓이거나 송(宋)이 도사를 위협하여 한 짓이거나 혹 도사의 인장을 훔쳐 거짓으로 만든 것인 듯하다."

하니, 박동량(朴東亮)이 아뢰기를,

"도사가 어찌 위협을 받아 하였겠습니까. 분명 송 경략의 사주에 휩쓸렸을 것입니다. 사 천사는 참으로 경망스럽고 가벼운 사람입니다. 길에서 내내 의 무리를 꾸짖으며 떠났다 하니 그의 해하고자 하는 바가 어찌 다함이 있겠습니까."

하고, 유성룡이 아뢰기를,

"신들이 근래에 생각하기를, ‘고 시랑(顧侍郞)이 새로 왔으니 마땅히 적정(賊情)을 물을 것 같은데 지금까지 묻지 않고 장삼외(張三畏) 또한 믿을 만한 사람인데 막연히 한 마디도 없으니 이는 필시 석 상서(石尙書)송응창(宋應昌)이 한 몸이 되어 그 형세가 어려워서일 것이다.’ 하였는데, 이번에 이 배첩(拜帖)을 얻어보니 참으로 염려한 바대로여서 신들은 온몸이 떨립니다. 우리 나라가 중국 조정의 권신(權臣)과 시비를 다투다 불행하게도 일이 이와 같이 되었으니 왜적 이외에 또 다시 다른 일이 생길까 두렵습니다. 지난번의 엄준한 황제의 칙서도 필시 이 무리들이 만들었을 것이니 이 무리들이 무슨 일인들 하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노한 목소리로 이르기를,

"이 일은 그렇지 않다. 내가 어찌 송(宋)·심(沈)이 두려워서 적정(賊情)을 말하지 못하겠는가. ·을 논열(論列)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다만 답답하고 긴박한 정황을 스스로 개진할 따름이다. 비록 이로써 황상에게 큰죄를 입는다 하더라도 조금도 한스러울 것이 없다. 저들이 진주성(晉州城)이 함락된 것까지도 속였다니, 이러한 일은 천고의 간악한 인간이라도 하지 않던 일이다. 천하의 일은 진작 정해졌으나 요즘의 일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지금 비록 미리 헤아릴 수는 없지만 끝내 금(金)·원(元)나라 때의 일이 생길까 두렵다. 자문을 가져 온 사람은 필시 송(宋)의 심복으로서 예단(禮單)에 대한 일을 알려고 할 것이라 하는데 우리 나라 사람은 경솔하여 누설할까 두렵다."

하고, 성룡에게 이르기를,

"이 자문의 회답은 장차 어떻게 말을 만들어야겠는가? 나는 어렵지 않게 생각한다. 예단의 일은, 우리 나라에서는 반드시 부채·모자 등으로 예물을 삼아야 한다. 무너져 결딴난 마당에 어디에서 명주 등의 물건을 구하겠는가? 연음(宴飮)에 대해서도 상마연(上馬宴)·하마연(下馬宴) 같은 것은 그 예가 있으니 영상이 이 뜻을 기초(記草)하여 승문원(承文院)으로 하여금 명쾌히 답하도록 하라."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상교(上敎)가 지당하십니다. 마땅히 일에 의거하여 곧게 말해야지 말을 허비해서는 안 됩니다. 남북으로 앉은 일은, 우리 나라는 오직 중국을 높일 줄만 알아 창졸간에 이와 같이 하였다고 하면 됩니다."

하고, 박동량이 아뢰기를,

"칙서를 등졌다는 말에 대해서는 분명히 밝히지 않을 수 없으니 칙서를 철거(撤去)한 후에 남북으로 대좌했다고 분명히 말해야 할 듯싶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심유경의 일은 괴이하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그 표문(表文)은 과거(科擧)에 합격한 우리 나라 사람이 지은 것 같습니다."

하고, 박동량이 아뢰기를,

"입이 있으면 운다[有口則鳴]는 말은 중국의 문자 같고 양보(讓步)를 원한다[願讓]는 말은 바로 유경이 평소에 항상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잘 지은 솜씨는 아니다. 중국 사람이면 비록 잘 짓지는 못하더라도 한두 군데 호기처(好氣處)는 있는 법인데 이것은 문장이 지리하니, 필시 포로가 된 우리 나라의 유생이 지었을 것이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경상도의 유생으로서 형제가 포로로 잡힌 자가 있다고 합니다."

하고, 동량이 아뢰기를,

"신은 왕명호(汪鳴胡)의 무리가 지은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송응창(宋應昌)을 본 적이 있는가?"

하니, 동량이 아뢰기를,

"보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제독(李提督)은 대장(大將)인데도 복건(幅巾)을 하고 서로 보았는데 응창은 병위(兵威)를 성대히 갖춘 연후에 나를 들어오게 하였고 시신(侍臣)도 같이 들어가기를 허락하지 않았으니, 그 흉험(兇險)함을 알 만하다. 또 일찍이 우리 나라 사람에게 이르기를 ‘제독을 모해(謀害)해야 한다.’ 하였으며, 제독이 똑같이 중국 장수인데도 심지어는 ‘담을 넘어가 살해하겠다.’ 하였다니, 그 흉패(兇悖)하고 무상(無狀)함이 심하다. 왜적이 서울에서 물러간 뒤에 응창유황상(劉黃裳)을 보내 남하하게 하거늘 내가 순안(順安)으로 찾아가서 만나보니, 가 ‘국왕께서 밀지(密旨)를 주신다면 내가 왜적을 크게 쳐부수겠다.’ 해놓고는 겨우 서울에 이르렀다가 곧 돌아왔으니, 이는 도깨비짓이나 다름이 없다. 이로써 본다면 중국 조정에는 사람이 없다. 유 원외(劉員外)는 천하에 크게 망령된 자이고, 원 주사(袁主事)는 외국에 나가 대군(大軍)을 감독하면서도 염주(念珠)를 드리우기까지 하였다. 천하의 대거조(大擧措)인데도 나온 자들이 모두 이와 같다."

하니, 동량이 아뢰기를,

"원 주사는 천하의 명사라고 하는데 일찍이 주(朱)·육(陸)의 학문으로 명제(命題)를 삼아 우리 나라 사람에게 글을 시험하자, 우리 나라 사람들이 다른 말은 없이 다만 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정주학(程朱學)만이 있음을 알 따름이다.’ 하였답니다. 그 뒤에 그의 장수 조공(趙公)에게 글을 보내어 스스로 과시하기를 ‘나의 도학(道學)을 외국에서 크게 떨쳤다.’고 하였다니, 그 사람의 경망스러움을 알 수 있습니다. 척금(戚金)과 같은 자는 말 잘하고 쾌할하나 실질(實質)이 적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척금이 경략과 함께 한통속이면서도 저번엔 ‘사람들이 그의 고기를 먹고자 한다.’ 했다 하니, 말을 믿을 수 없음이 이와 같다."

하니, 유성룡이 아뢰기를,

"심유경은 왜의 뇌물을 받은 것이 필시 많기 때문에 두 번이나 이처럼 왜를 위해 도모했을 것이니 우리 나라의 난처함이 어찌 심하지 않겠습니까. 만약 허 각로(許閣老)가 있었더라면 우리 나라에게는 필시 힘이 되었을 터인데 국운이 비색하여 개미 새끼 하나도 원조하는 자가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지난날 주기(周基)는 참으로 강개한 선비였는데 척금이 끝내 그의 글에 답하지 않았다 하니, 끝내는 화를 입을 듯합니다. 주기(周基)의 무리가 강개하다고는 하지만 모두가 국외인(局外人)이고 송(宋)유(劉)가 안에서 결탁하니 우리 나라는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마땅히 스스로 힘을 키워 죽을 곳에서 살 길을 찾아야 하는데 식량이 부족하여 조치하기가 어려우니, 이 점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황해·충청 등의 도에는 조총(鳥銃)과 화약(火藥)을 조치하여 대비하게 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병사를 기르지 말자는 말이 어찌 입에서 나올 수 있겠는가."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다른 일은 돌아보지 말고 마땅히 병사를 기르고 식량을 비축하는 것만을 일삼아 10여 년 만 하면 왜적을 방비할 수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전에는 공·사천(公私賤)은 병사가 될 수 없었지만 오늘날은 적병이 날뛰니 공·사천도 병사가 되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모든 일이 인정(人情)에 끌리니 사천은 병사가 되기 어려울 듯하다."

하니, 성룡이 아뢰기를,

"상께서 만약 하신다면 어찌 이 지경에야 이르겠습니까. 낙 참장(駱參將)도 우리 나라 공·사천 제도의 잘못을 말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가 일을 일답게 못한 지가 오래 되었다."

하였다. 삼경에 파하고 나갔다.


  • 【태백산사고본】 28책 48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221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군사-통신(通信) /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사상-유학(儒學)

○初更, 上御行宮便殿, 引見大臣。 上曰: "廣寧此咨, 何如?" 柳成龍曰: "此非謀害天使, 兼欲害我國也。" 上曰: "此應昌之所爲。 予嘗熟見咨文規式矣。 都司當據原咨, 結末數語而已, 今則結語甚多。 予意無乃韓布政不知, 而都司自爲之? 或脅都司而爲之, 或盜都司之印而假作也。" 朴東亮曰: "都司何待脅而爲之? 固當風靡於經略之指嗾矣。 司天使, 實狂浮人也。 在一路罵詈輩而去云。 其所以欲害者, 庸有旣乎?" 柳成龍曰: "臣等近以爲: ‘顧侍郞新到, 似當問賊情, 而至今不問, 張三畏亦可信人, 邈然無一言, 此必石尙書宋應昌爲一體, 故其勢難矣。’ 今者得此拜帖, 誠如所慮, 臣等寒粟遍體矣。 我國與朝權臣, 爭是非, 事之不幸如此, 賊之外, 恐更有他事也。 嚮者嚴峻之皇勑, 必此輩致之, 此輩何所不至乎?" 上厲聲曰: "此則不然。 予何畏, 而不言賊情乎? 非爲論列也, 但自陳其悶迫之情而已。 以此雖蒙大罪於皇上, 少無所恨。 彼乃至諱晋州陷城云, 此等事, 千古奸人之所無者。 天下事前定矣。 時事當作何如? 今雖不可預料, 恐終有如之事者。 彼齎來咨人, 必之爪牙也。 必欲知禮單事云, 我國人輕浮, 恐其漏洩。" 謂成龍曰: "此咨回答, 將何以措語乎? 予則以爲不難。 禮單事, 我國必以扇帽等物爲禮。 蕩敗之餘, 何從得綿紬貨物? 至於宴飮, 則如上馬、下馬, 自有其禮。 領相宜將此意記草, 令承文院, 明快答之。" 柳成龍曰: "上敎至當。 當據事直說, 不當費辭。 南北坐, 則我國只知尊中國, 故倉卒之間, 自致如此云可也。" 朴東亮曰: "背勑之說, 不可不發明, 勑書撤去後, 南北對坐之說, 似當明言" 上曰: "沈惟敬事可怪。" 柳成龍曰: "其表文, 如我國科擧人所製。" 朴東亮曰: "如有口則鳴等語, 似中原文字, 願讓之說, 乃惟敬所常談者。" 上曰: "非善作手段。 中國之人, 雖不善, 必有一二好氣處, 此則文字婆娑, 必我國被擄儒生所爲。" 柳成龍曰: "慶尙儒生, 有兄弟被擄者云。" 東亮曰: "臣謂如汪鳴胡輩作之也。" 上曰: "承旨嘗見宋應昌乎?"東亮曰: "未嘗見矣。" 上曰: "李提督, 大將也, 而幅巾相見, 應昌則盛陳兵威, 然後入我。 然而不許侍臣同入, 其兇險可知。 又嘗謂我國人曰: ‘宜謀害提督’ 云。 提督同是天朝將官, 而至曰: ‘可越墻殺害’ 云, 其兇悖無狀甚矣。 倭賊出京之後, 應昌劉黃裳南下, 予往見順安, 則曰: ‘國王如給密旨, 吾當大擊倭賊’ 云, 而只到王京便還, 此無異鬼魅之事。 以此觀之, 天朝必無人焉。 劉員外, 天下之大妄人, 袁主事, 出外國臨大軍, 至垂念珠。 此天下之大擧措, 而其出來者類如此。" 東亮曰: "袁主事, 天下之名士云, 嘗命題以之學, 試文于我國人。 我國人無他言, 但答曰: ‘我國但知有之學’ 云。 厥後寄書于其(帥)〔師〕 公, 自誇曰: ‘吾道學大肆于外國’ 云, 可見其人之浮妄。 如戚金者, 甚便捷而少質矣。" 上曰: 戚金與經略同心, 而頃者乃云人皆欲食其肉云, 其言之不實如此。" 柳成龍曰: "沈惟敬賂必多, 故(兩)以爲謀者如此, 我國之難處, 豈不甚哉? 如許閣老在焉, 則於我國, 必有賴焉。 國運孔厄, 無蚍蜉蟻子之援, 奈何? 昨者周基, 誠慷慨士也。 戚金終不答之書云, 恐終被禍也。 如輩雖慷慨, 皆局外人也, 盤結於內, 我國無可爲者。 當自强其力, 死中求生, 而食乏難措, 此甚悶迫。" 且曰: "如黃海忠淸等道, 可令措備鳥銃、火藥。" 上曰: "然。 當此之時, 不欲養兵之說, 何可出口?" 成龍曰: "不顧他事, 但當以養兵、備糧爲事者十餘年, 此賊可防。 我國前者, 公、私賤不得爲兵, 今則賊兵衝突, 故公、私賤, 亦爲兵矣。" 上曰: "我國凡事, 皆牽於人情, 私賤恐難爲兵也。" 成龍曰: "自上若爲之, 則何得如是? 駱參將亦言, 我國公、私賤之失矣。" 上曰: "我國之不事事, 久矣。" 三更罷黜。


  • 【태백산사고본】 28책 48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221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군사-통신(通信) /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사상-유학(儒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