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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47권, 선조 27년 1월 11일 경인 7번째기사 1594년 명 만력(萬曆) 22년

대신 등을 행궁에서 인견하고 송유진 역모, 김덕령 등의 문제에 대해 논의하다

영의정 유성룡, 우찬성 최황(崔滉), 이조 판서 김응남(金應南), 병조 참판 심충겸(沈忠謙)이 청대(請對)하니, 상이 행궁(行宮)의 편전에서 인견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홍가신(洪可臣)아산(牙山)에 피난가 있으면서 신에게 보낸 편지에 ‘어떤 도적들이 천안에서 와서 진을 치고 둔취하여 있다가 개현사(開玄寺)로 갔다.’고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병화(兵禍)를 겪은 뒤에는 으레 무뢰배들이 모여 도둑이 되었는데 때로는 그 세력이 번성해지기까지 하였으니 일찍 도모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영상의 말이 옳다. 늦추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최황이 아뢰기를,

"아산에는 공세창(貢稅倉)이 있으니 모름지기 모략(謀略)이 있는 자를 가려서 맡겨야 됩니다. 신의 자식 최유원(崔有源)이 아산 군수로 있는데 3일 대낮에 기병과 보병 40여 명의 적도(賊徒)가 그 고을에 사는 임희지(任羲之)의 집을 포위하고는 ‘군량과 군기를 얻고자 한다.’ 하므로, 희지가 ‘우리 집에 어찌 군기가 있겠는가.’ 하니, 도적이 ‘우리가 수색하여 볼 터이니 부인들은 피하게 하라.’ 하였답니다. 희지도 피하여 달아나니, 도적이 ‘그대는 유사(儒士)이고 범한 죄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피하는가?’ 하더랍니다.

신의 자식이 관노(官奴)를 차견하여 두 번이나 보장(報狀)을 보냈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오지 않는 것을 보면 중간에 저지당한 환란이 있었는가 합니다. 또 들리는 바에 의하면 적도가 민간의 소를 탈취하여 그 가운데 작은 것은 잡아먹고 큰 소는 도로 돌려주면서 ‘이것으로 농사를 지으라.’ 하였으며, 그들의 대장(大將)은 가야산(伽倻山)에 있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찬성(贊成)이 들은 것도 내가 들은 것과 같다."

하자, 성룡이 아뢰기를,

"홍가신이 서간(書簡)에 ‘도적들이 작은 종이에다 유고서(諭告書)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두루 보였는데, 그 내용은 「백성들이 고통을 견디기 어려운 처지이므로 우리가 그대들을 위해서 나왔다. 」고 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악비(岳飛)가 용맹을 떨치는 것이 때때로 신(神)과 같았는데도 종택(宗澤)012) 이 ‘그대는 적 몇 명을 대적할 수 있는가?’ 하니, 악비가 ‘용맹은 믿을 것이 못 된다. 도략(韜略)을 알아야 적병을 대적할 수 있는 것이다.’ 하므로, 종택이 ‘그대는 항오(行伍) 가운데 있을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었다. 지금 덕령이 스스로 5∼6리(里) 밖에다 진을 치고 단기(單騎)로 돌입하여 짓밟을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 사람에게 큰일을 맡겨서는 안 되겠다."

하고, 또 이르기를,

"경성의 간세인(奸細人)이 도적과 서로 내통할 경우도 없지 않으니 살피지 않을 수 없다."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전번 해서(海西)의 도적 임꺽정(林巨叱正)의 말에 ‘우리 당여 가운데 1인이 정원의 사령(使令)이 되어야 한다.’ 하였는데, 이는 조정의 일을 탐지하기 위해서였던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록 미세한 공사(公事)라 할지라도 내가 반드시 직접 가지고 보겠으니 내관(內官)은 한 사람도 전독(傳讀)시키지 말고, 정원에서도 직접 처리하도록 하라. 그리고 무군사(撫軍司)와 충청 감사·병사 및 양호(兩湖)의 순변사(巡邊使)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하서하라.

충청도 도적의 일을 언자(言者)들이 많이 우려하고 있기 때문에 이미 하서한 바 있다. 이제 강첨의 장계를 보건대, 그 도적들이 점점 번성하여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병란이 발생한 이후 해야 할 역사(役事)가 너무 많아 조발(調發)과 전수(轉輸)는 물론 곡식을 거두고 세금을 매겨 독촉해 온 지가 이제 이미 3년이나 되어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살아갈 길이 막연한 탓으로 감히 뛰쳐나와 노략질하게 된 것이니 이는 사세의 필연이다. 그리고 본도(本道)에는 의병이라 이름하는 자들이 곳곳에 둔취하여 있었는데 왜적이 물러간 뒤 조정에서 제때에 선처해서 통속(統屬)이 있게 하지 못한 관계로 그들 스스로 둔취해 있으면서 지니고 있던 무기로 여염(閭閻)을 노략질하게 되었고 이것이 점점 성하여져 제어하기 어려운 사나운 도적이 된 것이다. 그 이유를 궁구하여 보면 이 두 가지 단서에 기인된 것이다. 이제 많은 군마(軍馬)를 출동시켜 풀베듯 참획하려 한다면 도적들이 서로 고동(鼓動)하여 스스로 보존할 계책을 세울 것이니, 그렇게 되면 난을 중지시키려다 도리어 난을 가중시키는 꼴이 된다. 그러니 한편으로는 그들을 효유하여 점차 평민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 가운데 극심한 자만을 체포하여 벰으로써 스스로 두려워하여 흩어지게 해야 된다. 그리고 반드시 백성의 고통에 대해 강구하여 급하지 않은 요역(徭役)과 응당 감해야 할 과납(科納)은 이를 견감시킴으로써 덕의(德意)를 베푸는 것이 바로 재앙을 사전에 방지하는 방법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 곳을 잃은 백성들이 서로 추부(趨付)하게 될 것이니 이들을 제거하기가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8책 47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204면
  • 【분류】
    사법-치안(治安)

  • [註 012]
    종택(宗澤) : 이 내용에서는 종택(宗澤)이라고 하였으나 원전(原典)에는 하북 초토사(河北招討使) 장소(張所)와의 대화로 기록되어 있다. 《송사(宋史)》 권365 악비 열전(岳飛列傳).

○領議政柳成龍、右贊成崔滉、吏曹判書金應南、兵曹參判沈忠謙請對, 上御行宮便殿引見。 成龍曰: "洪可臣避亂于牙山, 寄書于臣曰: ‘有賊自天安來, 團聚結陣, 往開玄寺。’ 自古兵火之餘, 無賴之徒, 相聚爲盜, 或至滋蔓, 不可不早圖。" 上曰: "領相之言是矣。 不可緩也。" 崔滉曰: "牙山有貢稅倉, 須擇有謀略者, 任之可也。 臣之子有源, 爲牙山倅, 初三日白晝賊徒, 圍縣地任羲之家, 騎步四十餘。 曰: ‘欲得車糧軍器。’ 羲之曰 ‘安有軍器?’ 賊曰: ‘我當搜括, 婦人且避之。’ 羲之走避, 賊曰: 君是儒士, 別無所犯, 何故避之?’ 云。 臣之子差官奴, 二度報狀云, 至今不來, 恐有中間阻遏之患。 且聞賊類, 取民間牛隻, 擇其小食之, 還給大牛曰: ‘可爲農作。’ 其大將在伽倻山云。" 上曰: "贊成所聞, 與予所聞同矣。" 成龍曰: "洪可臣書簡中有曰: ‘賊以小紙爲諭告書, 遍示百姓曰: 「民生不堪其苦, 我爲爾等出」 云。’ 上曰: "金德齡予所不知, 而付以全羅一道之軍。 萬一失利, 人心大潰, 此甚可慮。" 張雲翼曰: "所傳之言, 似誕矣。" 上曰: "岳飛作勇時, 如有神, 宗澤問: ‘汝能敵幾人?’ 飛曰: ‘勇不可恃, 能知韜略, 可却敵兵。’ 曰: ‘非行伍中人。’ 今德齡自言, 結陣於五六里之外, 能以單騎, 突入蹴踏云, 此不可付之大事。" 上曰: "京中奸細之人, 不無與賊相通之理, 不可不察。" 忠謙曰: "曩者海西賊林巨叱正言曰: ‘吾輩一人, 當爲政院使令’ 云, 此乃欲探知朝家事也。" 上曰: "雖細(徵)〔微〕 公事, 予必親執見之, 無得使一內官傳讀。 政院亦宜親執爲之。(" ○)下書于撫軍司及忠淸監司ㆍ兵使、兩湖巡邊使曰:

忠淸道盜賊之事, 言者多以爲憂, 故已爲下書。 今見姜籤狀啓, 其類之漸成滋蔓可知。 大抵兵興之後, 百役叢集, 調發轉輸, 括粟催科, 今已三年, 民不堪命, 而生理頓絶, 敢出剽掠, 此其事勢之必然者。 且本道以義兵爲名者, 處處相聚, 而朝廷不於賊退之後, 登時善處, 使有統屬, 以此自爲屯結, 挾持軍器, 掠奪閭閻, 漸成獷捍難制之盜。 究厥所由, 職此二端。 若欲多發軍馬, 草薙禽獮, 則其類互相鼓動, 或爲自保之計, 求以止亂, 必益其亂。 唯當一邊曉諭, 使之漸歸平民, 誅捕其尤甚者, 使自驚懼散落。 又必講究民瘼, 凡不緊徭役應減, 科納量宜蠲除, 宣布德意, 此乃去薪止沸之術。 不然則民之失所者, 相率趨之, 而剪剔益難矣。"


  • 【태백산사고본】 28책 47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204면
  • 【분류】
    사법-치안(治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