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변사 대신들이 둔전 설치와 경영에 대한 방책을 아뢰다
비변사 낭청이 대신의 의견으로 아뢰기를,
"삼가 심충겸(沈忠謙)이 아뢴 둔전 한 가지 일에 대한 내용을 보건대, 사세를 헤아린 것이 매우 주밀하게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신이 전일 아뢴 계사(啓辭)에서도 둔전책(屯田策)은 세 가지에 불과하다고 했었습니다. 군사들에게 둔전을 경작하게 하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이요, 유민(流民)을 모아 둔전을 경작하게 하는 것이 또 한 가지 방법인 것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관에서 농량(農糧)·종자(種子)·경우(耕牛)를 지급한 다음이라야 가능한 일인데, 그렇게 하지 않는 경우에는 백성에게 주어 병작하게 하는 일이 하나 있을 뿐입니다. 지금 군사를 모으고 백성을 모아 공한지(空閑地)에다 둔전을 경작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농량이 없고 보면 성공할 수 없는 사세인 것이 분명합니다.
그 가운데서 좀 실행할 만한 것은 각도(各道)의 목장에 비옥한 땅이 많고 또 거느리고 있는 목자들이 있으니, 곳곳에 땅을 가려서 경작하게 하는 것은 또한 실행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걱정스러운 것은 지금 감목관으로 있는 자들 가운데 무뢰한들이 많아서 목자들을 침탈하여 자신을 살찌우는 자들이 있는 것이니 반드시 사태(沙汰)시키고 그 임무를 감당할 만한 사람을 가려서 맡겨야 합니다. 그리고 개간하여 경작하게 한 뒤 호조 낭관(戶曹郞官)이나 비변사 낭관(備邊司郞官)을 파견하여 적간하여 그 근만(勤慢)을 매기게 한다면 유익함이 있게 될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목자들이 경작할 농토가 있게 되면 힘이 넉넉하지 못할까 우려되니 반드시 종자와 농우를 본도 감사로 하여금 옮겨다가 제급하게 한 뒤라야 성공할 수 있겠는데 이것이 한 가지 방책인 것입니다.
병·수사(兵水使)의 진보(鎭堡)에 있는 제장(諸將)에게도 입번(入番)하는 군사가 있는데, 이제 일이 많아서 자못 여가가 없기는 하겠으나 사세에 따라 편리한 대로 근방의 농지에다 다소간 경작할 수는 있습니다. 황해도와 평안도의 경우는 진보의 군졸이 하삼도(下三道)의 경우에 견주어 조금은 헐후한 편이어서 경작을 할 수가 있으니 여기에도 본도의 감사나 병사가 근처의 각 고을에서 종자를 가져다가 제급해주고 수시로 적간(摘奸)하여 근만(勤慢)을 살피게 하는 것이 한 가지 방책인 것이요, 이밖에는 달리 시행할 만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둔전관이 감목관을 겸하게 한다면 별로 본읍(本邑)에 폐단을 끼치는 해로움이 없을 것이나 오직 적임자를 얻는 데 달렸습니다.
그리고 묵은 전지를 개간하는 데는 나름대로 이치가 있는 것으로 3년 안에는 보리를 심을 수가 없고 벼를 심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낮고 습한 곳에는 직출(稷秫)685) 을 심는 것이 마땅하고 높고 건조한 곳에는 조를 심는 것이 마땅한데 진실로 거기에 마땅한 것을 심지 않으면 수고롭기만 할 뿐 공이 없어지고 말기 때문에 그 토질의 마땅함을 살피는 것이 농가(農家)의 제일의 급선무인지라,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경성의 10리 이내의 둔전관은 이미 차출하였습니다. 위에서 논한 여러 조건에 대한 사목(事目)을 해조는 급히 작성하여 각도에 행이(行移)해야 합니다. 또 급히 둔전을 감당할 만한 사람을 차출하여 전의 공사(公事)에 따라 감목관을 사태(沙汰)한 곳으로 보내어 그 공효를 살펴보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또 황해도의 노전(蘆田)은 이미 정전(正田)이 되어 세수(歲收)가 매우 많으니 이익이 제일 큽니다. 이미 조인득(趙仁得)을 차지(次知)로 보냈습니다만 다시 하유하시어 시급히 종자를 조처하여 제급, 한 곳도 묵히는 일이 없게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또 우견(愚見)이 있습니다. 강화(江華) 한 고을은 가까이 국문(國門) 바로 밖에 위치하고 있는데 지세가 험절(險絶)하여 전조(前朝)686) 5백 년간 여기를 근본이 되는 곳으로 만들어 행도(行都)를 건립하였었습니다. 그때 강화의 경내에는 많은 인민이 모여 살았고 전야도 잘 개간되어 있었습니다. 그밖에 대정(大靜)·자연(紫燕) 등의 섬도 모두 개간하여 경작하였으므로 수없이 많은 곡식이 생산되었습니다. 내지(內地)의 백성이 전쟁의 피해를 입을 적에도 이곳만은 안전하였는데, 이는 수세(水勢)가 급하여 매우 사납고 양쪽의 언덕이 높이 가로막고 있어 선박을 댈 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경내의 인민이 경작하는 땅은 3분의 1 뿐이고 목장용으로 비어 있는 땅이 3분의 2나 되니 진실로 애석한 일입니다. 신이 금년 봄에 백성들이 경작할 수 있게 허가해주기를 계청하였고 또 그때는 피란온 사람들이 섬에 꽉 차서 모두 전지를 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일이 성취될 기미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감목관 가운데 그 일을 불편하게 여기는 자가 있었던 탓으로 인하여 중지됨에 따라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살아갈 길이 없어 드디어 모두 흩어져 가버렸습니다. 경성에서 가까운 곳에는 곡식을 생산할 방법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다시는 도움을 받을 방책이 없었음은 물론 경성의 기민(飢民)들도 구활할 길이 없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해 언자(言者)들은 지금까지도 개탄하고 있습니다.
지난번 경기 수사(京畿水使) 이빈(李薲)의 장계에 ‘수영(水營)을 대정도(大靜島)로 옮기고 떠돌아 흩어진 백성들을 불러모아 경작을 하도록 허가하고 그곳 백성들은 수군을 만들어 노역(櫓役)에 종사하게 하면 경기의 수군이 전일보다 배로 불어나게 되고 전선(戰船)도 많이 만들어 바다에 정박시켜 놓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근본을 잘 호위할 수 있겠다.’고 청하였는데, 이 방책이 잘못된 계획은 아닙니다. 단지 일이 연혁(沿革)에 관계되어 경솔히 시행할 수 없기 때문에 이미 방계(防啓)687) 하였습니다. 그러나 경기의 민생(民生)이 머지 않아 다 없어질 지경에 이르렀으니 대정도나 자연도로 들어가기를 원하는 유민(流民)이 있으면 강화의 선원(仙源)·진강(鎭江)과 아울러 백성들이 경작하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그리고 각 목장의 말은 근방에 있는 여러 섬에 방목(放牧)하게 했다가 사변이 평정된 다음 별도로 구처하게 하는 것이 또한 오늘날의 급선무인 것입니다.
이제 새로 제수된 감사 유근(柳根)이 이미 내려갔으니 급속히 유근과 수사 이빈에게 하유하여 다시 민정(民情)의 편부와 토지의 비옥 여부와 형세의 긴헐(緊歇)에 대해 살펴서 빠른 시일 안에 회계(回啓)하게 하여 시행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대개 위태하고 급박한 시대를 당하여는 모든 조처를 강구함에 있어 그 시기를 놓치지 않는 것이 귀한 것인데 근일 지완되는 일이 많아서 하루에 해야 할 일을 한 달로 지연시키고 한 달에 해야 될 일을 일년으로 지연시키고 있으니, 이렇게 미루어 나간다면 무슨 일인들 이룰 수가 있겠습니까. 이미 계책이 정해졌으면 단연코 시행하여 중지하지 않아야만이 반드시 그 공효를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호조로 하여금 속히 거행하게 하소서. 중을 모집하여 병작(竝作)하게 하는 일도 아울러 알려서 시행하게 하는 것이 온당하겠기에 감히 아룁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다방면으로 급급히 조처하여 시기를 잃지 않게 하라. 지금 이 둔전에 관해 의논이 매우 많아 농사철이 박두하여 오는데도 아직 거행하지 못하고 있다. 동군(東君)688) 은 의논이 결정되기를 기다리지 않을 것이 틀림없으니 내가 이 때문에 두려워하고 있다. 급히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7책 46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187면
- 【분류】농업-전제(田制)
- [註 685]직출(稷秫) : 피와 차조.
- [註 686]
전조(前朝) : 고려.- [註 687]
방계(防啓) : 다른 관사나 관원이 아뢴 의견에 대해 해당 관서에서 그 의견의 실행을 저지시키기 위해 아뢰는 것을 말함.- [註 688]
동군(東君) : 봄을 맡은 신(神).○備邊司郞廳, 以大臣意啓曰: "伏見沈忠謙啓辭, 所論屯田一事, 參商事勢, 極爲該備。 臣前日啓辭, 亦以爲屯田之策, 不過有三。 以軍士屯田一也, 聚流民屯田二也, 此二者, 皆須官給農糧、種子、耕牛然後可爲。 不然則, 惟給民竝作一事而已。 今者, 雖欲聚軍聚民, 屯田於空閑之處, 而旣無農糧, 則勢不可有成也明矣。 就其中稍爲可行者, 各道牧場, 地多肥饒, 且有所率牧子, 若處處擇地起耕, 亦似可爲, 所患, 今之爲監牧官者, 多是無賴之人, 割剝牧子, 以爲己利。 必須澄汰, 抄擇其可堪其任者爲之, 而起耕之後, 或遣戶曹郞官, 或備邊司郞官摘奸, 而科其勤慢, 則庶似有益。 然牧子旣有耘耕之田, 力恐不贍, 必種子、耕牛, 令本道監司, 推移題給, 然後可成, 此一策也。 兵ㆍ水使、鎭堡諸將, 亦有入番之軍, 今方多事, 殊無餘暇, 而因勢乘便, 多少間亦可耕種於近地。 至於黃海、平安道則, 鎭堡軍卒, 比下三道稍歇, 可以耕種, 此亦本道監、兵使, 覓給種子于近處各官, 時時摘奸, 檢察勤慢, 乃二策。 此外無他可行之事。 且以屯田官兼監牧, 則別無擾害本邑之弊, 惟在於得人而已。 且開墾荒田, 亦有其理, 三年之內, 不可種麥, 又難於種稻, 下濕則宜稷秫, 高燥則宜粟。 苟失其宜, 勞而無益, 故相其原隰之宜, 最爲農家之先務, 不可以不察也。 京城十里之內, 屯田官已爲差出矣。 此等條件, 該曹急爲事目, 行移于各道, 又急差屯田可堪之人, 依前公事, 監牧官汰去處發送, 以觀成效爲當。 且黃海道蘆田, 已成正田, 歲收甚多, 此最爲利益。 雖已令趙仁得次知, 而更爲下諭, 急時措給種子, 俾無一處陳荒爲當。 且臣又有愚見, 江華一邑, 近在國門之外, 地勢險絶, 自前朝五百年間, 以此爲根本之地, 建立行都。 其時, 江華一境, 人民多聚, 田野開闢。 其他大靜、紫燕等島, 無不耕種, 出穀無數, 雖內地之民, 搶攘於干戈, 而此島獨全, 蓋其水勢悍急, 兩岸沮洳, 難於泊船故也。 境內人民, 耕食之地, 只三分之一, 牧場閑曠之地居二, 誠爲可惜。 臣今春, 啓請許民耕作。 其時避亂之人, 滿於島中, 無不願受, 事幾就緖, 而監牧官有不便其事者, 因此中止, 而他處之人, 無資生之路, 遂皆散去。 近京之地, 生穀之路絶無, 故更無相資之策, 京城飢饉之民, 救活無路。 言者至今慨歎。 頃者京畿水使李蘋狀啓, 請移設水營于大靜島。 招集流散, 許民耕作, 以其處之民, 爲水軍櫓役之事, 則京畿水軍, 倍(簁)〔蓰〕 於前日, 多作戰船, 列泊海中, 足以扈衛根本。 此策未爲失計, 只事係沿革, 不可輕易施行, 故已爲防啓, 而但畿甸民生, 不日將盡, 如大靜、紫燕島, 若有流民願入者, 則與江華 仙源、鎭江二場, 竝令許民耕作, 〔移放〕 各牧場內之馬于傍近諸島, 以(侍)〔待〕 事定, 別爲區處, 亦今日之急務。 今新監司柳根, 已爲下去, 急速下諭于柳根及水使李蘋, 更察民情便否、土地肥瘠、形勢緊歇, 不多日內回啓施行爲當。 大抵危難之世, 凡措置等事, 貴在毋失其時。 近日事多稽緩, 一日之事, 延至一月; 一月之事, 延至一年。 以此悠悠, 何事能濟? 旣爲定計, 則斷而行之, 爲之不已, 必見其效。 請令戶曹, 急速擧行, 如募僧竝作事, 亦竝知委施行爲當。 敢啓。" 答曰: "依啓。 多方急急措置, 毋致失時。 今此屯田, 議論頗多, 而春事將迫, 尙未擧行。 恐東君, 必不待議論之定。 予爲是懼, 急急施行。"
- 【태백산사고본】 27책 46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187면
- 【분류】농업-전제(田制)
- [註 6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