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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45권, 선조 26년 윤11월 14일 갑오 2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임금이 남별궁에 나아가 유성룡을 인견하고 중국 사신에 관한 일 등을 의논하다

상이 남별궁(南別宮)에 나아가 막차(幕次)에서 영의정 유성룡을 인견하였는데, 도승지 심희수(沈喜壽), 주서 남이신(南以信), 대교 김상준(金尙寯), 검열 박동선(朴東善)이 입시하였다. 유성룡이 나아가 아뢰기를,

"중국 사신이 좌우를 물리치고 써서 보이기를 ‘내가 성실하고 정직하게 물을 것이니 묻는 일에 숨기지 말아야 한다.’ 하기에, 답하기를, ‘노야(老爺)가 묻는데 소생이 감히 성실하게 고하지 않을 수 없거니와, 만약 성실하게 하지 않는다면 이는 곧 하늘을 속이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사신이 ‘천병(天兵)이 왜를 얼마나 죽였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소생이 안주(安州)에 있을 때에 들으니 천병이 적 1만여를 베었다 한다.’ 하였습니다. 사신이 ‘벽제(碧蹄) 싸움의 승패는 어떠하였는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소생은 파주(坡州)의 진중(陣中)에 있었으므로 잘 알지는 못하나, 사 총병(査摠兵)이 불리하여 물러났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사 총병의 이름은 대수(大受)이다. 】 사신이 ‘이 제독(李提督)이 말에서 떨어졌다고 하는데, 정말인가?’ 하기에, 신이 그렇다고 답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조신(朝臣)과 천장(天將)의 시비도 물었으나 신이 답하지 않았습니다. 또 ‘천조(天朝)의 병마(兵馬)가 백성들을 괴롭히고 해쳤다 하는데, 그러한가?’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군대가 있는 곳에는 토지가 황폐한다 하는데 어찌 그런 일이 없겠는가. 그러나 유정(劉綎)·척금(戚金)이 여기에 있으므로 이제는 그런 폐단이 없다.’ 하였습니다. 대개 그는 조정의 사정을 잘 알고자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사정을 이제 힘껏 말하려 하는데, 나와 상대하여서도 써서 보이게 할 것인가? 창졸간에 답하기 어려운 일을 써서 보이게 한다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나중에 찬찬히 써서 보이는 것이 무방할 것입니다. 말이란 경솔하고 쉽게 할 수 없는 것이니, 헤아려서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신이 온 것은 무슨 일 때문인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전에 듣건대, 왜가 절강(浙江)에서 3년 동안 떠나지 않고 마치 땅을 갈라 차지할 듯이 하였는데, 천하의 군사를 쓰고서도 수십 명의 왜적도 죽이지 못하다가, 그 뒤에 척계광(戚繼光)신유년618) 이후에야 비로소 이겼다고 합니다. 중국은 이 적을 어렵게 여기니, 심유경(沈惟敬)이 나온 것은 오로지 이 적들을 꾀어 내기 위한 것인데, 이것은 하책(下策)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적은 본디 정삭(正朔)을 받드는 나라가 아닌데, 조공(朝貢)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이 적은 반드시 양식이 떨어지기를 기다려서 사방으로 나가 약탈할 것인데, 우선 화해를 청하여 우리 군사를 지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평안 감사(平安監司)만이 말하였다."

하였다. 【이 때 이원익(李元翼)이 평안 감사였다. 】 상이 막차에서 나와 사신과 함께 전상(殿上)에 이르러 북향하여 서로 읍(揖)하고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대인(大人)이 남으로 내려가려 하신다 하는데, 추위를 무릅쓰고 내려가는 것이 미안할 뿐더러 경상 일로의 탕패(蕩敗)한 참상이 서로(西路)보다 심하니, 잠시만 머무르십시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내가 온 것은 단지 선유(宣諭)만을 위함이 아니라, 광해군(光海君)과 세 조(曹)의 판서(判書)가 내려 가는 일들을 의논하여 처리하고자 해서입니다. 유 총병(劉總兵)과 면대하여 의논하려 했는데 유는 영문(營門)을 떠나기 어려워하고 내가 대구(大丘)까지 가서 볼 수도 없습니다. 척 총병(戚總兵)도 갈 것 없다고 하는데 내가 가지 않더라도 적정(賊情)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어제 국도(國都)를 보니 매우 좋습니다. 다만 서쪽에 치우쳐 있으니 동남으로 조금만 옮기면 좋습니다. 내가 자못 풍수(風水)를 아니, 사람을 보내시면 가르쳐 주겠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대인께서 앞으로 지도해 주십시오. 따로 써서 보여 주시면 더욱 기쁘겠습니다."

하였다. 사신에게 바칠 적세(賊勢)에 관한 게첩(揭帖)은 다음과 같다.

"조선국 배신(陪臣) 원임 의정부 영의정 정철(鄭澈), 영중추부사 심수경(沈守慶), 의정부 영의정 유성룡(柳成龍) 등은 진정서(陳情書)를 삼가 바칩니다.

생각하건대, 소방(小邦)이 불행하여 이러한 화변(禍變)을 만나자 성천자(聖天子)께서 혁연(赫然)히 진노(震怒)하시어 흉추(兇醜)를 토벌해 베시고 위곤(危困)을 구제하시어 소방의 백성이 도탄에서 벗어나고 종묘(宗廟)·사직(社稷)이 다시 보전되도록 꾀하시었으니, 이러한 일은 전에 듣지 못하던 바이며 공(功)은 옛 역사에 없던 융성한 것이어서 두터운 덕의(德意)가 하늘에 닿고 땅에 차니, 소방의 군신(君臣)이 분골쇄신(粉骨碎身)하여도 갚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또 노야 태좌(老爺台座)가 천자의 명을 받들어 창잔(創殘)619) 을 위무(慰撫)하고 소루함을 계칙(戒飭)하여 소방을 위하여 선후책(善後策)을 꾀하시면서 부드러운 안색과 웃음이 모두가 시종 안전하게 하려는 뜻에서 나오니, 소방 사람들이 후덕한 모습을 바라보고 지극한 가르침을 들으매 산뜻이 다시 살아난 듯합니다. 구구하고 답답한 뜻을 때에 맞추어 분주하게 자문에 답하여 밝으신 천자께 아뢰어지기를 바라니, 노야(老爺)는 가엾이 여겨 살피시기 바랍니다.

삼가 살피건대, 소방에서는 지난 신묘년620) 여름에 일본의 적추(賊酋)가 요승(妖僧) 현소(玄蘇)를 보내어 와서 변문(邊門)을 두들기고 투서(投書)하였는데, 그 말이 아주 도리에 어그러졌으며 소방을 협박하여 저들을 따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소방의 군신은 이를 절통하게 미워하고 근심하면서 반드시 적변(賊變)이 있을 것을 알고 곧 사신을 보내어 경사(京師)로 달려가 아뢰게 하였습니다. 또 순찰사(巡察使) 김수(金睟)를 경상도로, 이광(李洸)을 전라도로, 윤선각(尹先覺)을 충청도로, 순변사(巡邊使) 신립(申砬)·이일(李鎰)을 경기·황해도로 보내어 군정(軍丁)을 점열(點閱)하고 군기(軍器)를 수조(修造)하며 성지(城地)를 선축(繕築)하게 하였습니다.

경상도는 전에도 적침을 받은 땅이므로 부산·동래·밀양·김해·다대포(多大浦)·창원·함안 등지의 성을 증축하고 참호도 깊이 팠습니다. 내지(內地)의 성이 없는 곳으로서, 이를테면 대구부(大丘府)·청도군(淸道郡)·성주목(星州牧)·삼가현(三嘉縣)·영천군(永川郡)·경산현(慶山縣)·하양현(河陽縣)·안동부(安東府)·상주목(尙州牧)같은 곳은 다 백성을 징발하여 성을 쌓았습니다. 또 인정이 안일에 젖어 태만해지는 것을 염려하여 국왕이 근신(近臣) 승지(承旨) 등의 관원을 잇달아 보내어 살펴보고 독촉하게 하고, 어기거나 게을러서 시기를 놓친 자에게는 경중에 따라 처벌하였습니다.

임진년 3월에 부산 첨사(富山僉使) 정발(鄭撥)이 비보(飛報)했는데, 대마 도추(對馬島酋) 평의지(平義智)의 배가 포구에 와 정박하여 첨사에게 투서한 속에 길을 빌린다는 따위의 말이 있었다 합니다. 소방에서는 이를 듣고 더욱 놀라고 분하여 그 글을 물리쳐 돌려 보내고 변방에 신칙하여 이들을 변경에서 다 쫓아내게 하고 머물러 기다리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더니, 평의지부산포의 섬 절영도(絶影島)로 돌아가 배를 대었다가 며칠 만에 앙심을 품고 떠났다가 그후 4월 13일에 적이 이미 변경을 침범하였습니다.

부산이 함락되자 첨사 정발은 힘껏 싸우다가 죽었습니다. 이튿날에 동래도 함락 되었는데,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 교수(敎授) 노개방(盧蓋邦), 양산 군수(梁山郡守) 조영규(趙英珪) 이하 죽은 장관(將官)·군민(軍民)이 수만여 인입니다. 밀양 부사(密陽府使) 박진(朴晉)이 군사를 거느리고 양산·밀양 사이에서 잇따라 싸웠으나 모두 패하고 밀양도 함락되었습니다. 그때 적봉(賊鋒)이 매우 날카로와 길을 곱잡아 나아가니, 인심은 놀라서 동요되고 열진(列鎭)은 미처 서로 구원하지도 못하였습니다.

순변사 이일이 상주성 밖에서 맞아 싸우려 하였으나, 미처 포진하기도 전에 적이 갑자기 이르러 조총(鳥銃)으로 사면에서 공격하니, 군사는 무너지고 이일은 겨우 몸만 피하였고 종사관(從事官) 홍문 교리(弘文校理) 윤섬(尹暹), 수찬(修撰) 박호(朴箎), 상주 판관 권길(權吉) 등은 다 죽었습니다. 상주 백성들이 곳곳에서 서로 모여 힘껏 싸우고 한 사람도 투항한 자가 없어 죽은 자가 더욱 많고, 온 경내가 황폐화되었습니다.

이일이 흩어진 군졸을 거두어 조령(鳥嶺)으로 물러가 지키려 하였는데, 신립(申砬)이 순변사(巡邊使)로서 충주(忠州)에 있으면서 이일을 맞아 충주에서 함께 지켰습니다. 적이 정탐하여 방비가 없음을 알고 밤새 재를 넘어 곧바로 나아가 성을 에워쌌습니다. 신립이 나가 싸우다가 패하여 죽게 되자, 우리 군사는 적에게 밀려 모두 금탄(金灘)에 빠지니, 강물이 흐르지 못하였습니다. 충주는 경도(京都)의 상류에 있으니 충주를 이미 잃었으면 경성을 지킬 수가 없습니다.

이보다 앞서, 경도 사람들은 이일·신립이 다 중병(重兵)으로 험애(險隘)를 막고 있었으므로 날마다 승전의 소식을 기다렸는데 패하였다는 보고가 갑자기 이르렀습니다. 또 성안의 정장(精壯)도 먼저 신립·이일과 여러 장관(將官)들이 뽑아 데려 갔고, 제도(諸道)의 원병도 미처 불러 모으지 못하였습니다. 이에 우리 임금은 사세가 이미 급박해진 것을 알고 왕자(王子)와 재신(宰臣)들을 나누어 보내어 사방에서 불러 모으게 하고, 자신은 서방으로 옮아가 상국(上國) 지방에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에서 정성을 바쳐 천자의 뜰에서 은혜를 빌어 회복을 꾀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비록 나라를 지키는 떳떳한 도리는 아닐지라도 또한 일을 헤아리는 권의(權宜)인데, 과연 천자의 생성(生成)하는 은혜를 입어 오늘이 있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적변이 생긴 이래의 대체적인 사정입니다.

지난해 6월에 우리 임금이 의주(義州)에 계시면서 날마다 군량이 모자라 군용(軍用)을 이어 가지 못할 것을 근심하여, 판중추부사 유성룡(柳成龍)을 차출하여 이조 정랑(吏曹正郞) 신경진(辛慶晉), 제용감 정(濟用監正) 홍종록(洪宗綠) 등을 데리고 일로의 군량을 점열하게 하였습니다. 또 잇따라 상산군(商山君) 박충간(朴忠侃), 예조 참판 성수익(成壽益), 동지중추부사 이노(李輅), 전성군(全城君) 이준(李準)을 보내어 각각 관령(管領)하는 역참(驛站)에서 마초(馬草)와 양식을 독촉하게 하였습니다.

올해 정월 8일, 대군(大軍)이 평양(平壤)을 회복하던 때에는 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을 전차(專差)하여 좌랑(佐郞) 김계현(金繼賢)·이자해(李自海)를 데리고 군사를 따라 같이 다니며 양식과 마초를 맡게 하고, 또 박충간을 재촉하여 여전히 전운(轉運)을 맡아 살피게 하였습니다. 또 분호조 판서(分戶曹判書) 권징(權徵)을 차출하여 종사관(從事官) 황치경(黃致敬)·권회(權恢)와 중추부 경력(中樞府經歷) 신암(申黯)을 데리고 강화(江華)·교동(喬桐)에 들어가 공사(公私)의 저축을 다 징발하여 군량(軍糧)에 보태게 하고, 이어서 충청도·전라도의 바닷길로 조운(漕運)하는 것을 감독하여 계속하여 개성(開城)으로 수송하게 하였습니다. 또 사간원 정언 황극중(黃克中)을 보내어 근만(勤慢)을 살피게 하고 대신(大臣) 의정부 우의정 유홍(兪泓)을 시켜 모든 사무를 총독(總督)하여 밤낮으로 재촉해서 시각을 늦추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4월 12일에 적이 도성을 떠나고 그날로 대군이 입성하였다가 5월에 대군이 적을 쫓아 남으로 내려갈 때에는 호조 판서 이성중이 대군을 따라가 양식을 맡았는데, 뜻밖에도 7일에 이성중함창(咸昌)에서 병으로 죽었으므로 조도관(調度官) 홍문 정자(弘文正字) 윤경립(尹敬立)이 잠시 그 임무를 맡고 국왕에게 치계(馳啓)하였기에 곧 본조(本曹) 참의(參議) 정광적(鄭光績)을 보내어 대신하게 하였습니다. 또 이조 판서 이산보(李山甫)와 조도사(調度使) 강첨(姜籤)을 충청도로, 검찰사(檢察使) 김찬(金瓚), 조도사 변이중(邊以中)·임발영(任發英) 등을 전라도로 나누어 보내어 군량을 찾아 모으게 하였습니다. 이어서 홍문관 교리 박홍로(朴弘老)를 보내어 두 도(道)를 재촉 독려하여 전수(轉輸)하게 하였습니다.

이 뒤의 절차는 경략(經略)의 비계(秘計)를 받들어 선후책(善後策)을 헤아려 공조 참판 이노(李輅)와 공조 좌랑(佐郞) 최흡(崔洽)을 빨리 보내어 설험(設險)하는 등의 일을 맡게 했습니다. 그 가운데에서도 군병을 조련하는 일은 이미 제도 도순찰사(諸道都巡察使) 권율(權慄)에게 맡겨 유 총병(劉總兵)의 관하에서 세 도(道)의 민정(民丁)·군장(軍壯)을 다 징발하여 영문(營門)에 나아가 지휘를 받게 하였습니다. 또 의정부 좌의정 윤두수(尹斗壽)를 보내어 제총(提總)케 하여 모두 감히 게을리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다만 광해군(光海君)은 지난번 변이 일어난 이후로 산을 넘고 내를 건너면서 무로(霧露)를 무릅쓴 탓으로 혈기(血氣)를 상하여 오랫동안 낫지 않으므로 잠시 해주(海州)에 머물러 있으면서 의원을 찾아 약을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어서 성지(聖旨)가 있었다는 말을 듣고는 황공하고 감격하여 감히 앓는다고 말하지 못하고 이미 병을 무릅쓰고 도성에 왔으니 곧 남으로 내려갈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소방이 미약하여 한번 미치광이 도둑에게 침범당하자 스스로 떨쳐 일어나지 못하고 왕사(王師)를 들판에서 노고하게 한 지도 이미 한 해가 넘었습니다. 번병(藩屛)의 임무를 다하지 못하여 성천자(聖天子)께 동쪽을 돌보는 근심을 크게 끼쳤으니, 죄를 피할 데가 없습니다. 그러나 소방은 이 적이 한 하늘 아래에서 같이 살 수 없는 원수로서 자손 만대 반드시 갚아야 할 원한이 있습니다. 적이 이미 우리 사직(社稷)을 짓밟았고, 우리 구롱(丘隴)을 파헤쳤으며, 우리 백성을 도륙하였고, 우리 자녀를 잡아갔고, 우리 재곡(財穀)을 탕진케 하였으니, 나라 안의 혈기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다 속을 썩히고 이를 갈며 적 앞에 나아가 죽으려 하는데, 더구나 천위(天威)에 힘입어 후환을 대비하려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이 어떤 큰일이고 어떤 기회인데, 또한 무슨 마음으로 우물쭈물 너그럽게 놓아 두어서 스스로 망하는 지경으로 나아가 재조(再造)의 은혜를 저버리겠습니까. 그러나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적이 아직 물러가지 않았기 때문일 뿐입니다. 적이 물러가지 않았으므로 힘쓸 겨를이 없고, 힘쓸 겨를이 없으므로 일이 미치지 못하는지라, 비록 국력을 쌓고 병정을 훈련하여 말년을 수습하려 해도 또한 스스로 떨치지 못하니, 이것이 바로 소방이 밤낮으로 답답해 하는 바입니다.

이제 경상도에 적이 있는 곳으로는 울산(蔚山)서생포(西生浦)동래(東萊)·부산(釜山)양산(梁山)의 상용당(上龍堂)·하용당(下龍堂)김해(金海)·창원(昌原)이며, 바다 안은 가덕(加德)·천성(天城)거제(巨濟)거제영등포(永登浦)장문포(場門浦)입니다. 소방의 맹장(猛將)·정병(精兵)이 전후(前後)로 힘껏 싸우다가 함안(咸安)·진주(晉州) 사이에서 죽은 자가 무려 수만여 인이며, 적의 수미(首尾)가 가도·우도에 걸쳐 수백 리에 뻗쳐 있으면서 번갈아 나와서 마구 약탈해 왔는데 다행히도 천병(天兵)이 대구(大丘)·경주(慶州)에 압림(壓臨)하여 있으므로, 울산의 적이 경주로 넘어오지 못하고 동래의 적이 대구로 넘어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북(西北)에 있는 본국의 제장(諸將) 즉 이빈(李薲)·고언백(高彦伯)·홍계남(洪季男)·선거이(宣居怡) 등도 또한 범이 산에 있는 위엄을 빙자할 수 있어서 영잔(零殘)한 군졸을 거두어 의령(宜寧)·울산·경주 사이에서 나누어 막으면서 날마다 혈전(血戰)하고 있는데 형세는 이미 위축되었습니다.

거제의 적이 전라도의 지경을 침범하기 쉬우므로 세 도의 주사장(舟師將) 이순신(李舜臣)·원균(元均)·이억기(李億麒) 등을 시켜 수군 1만여를 거느리고 한산도(閑山島)에서 서로 차단하여 서방으로 침범하는 길을 방비토록 하였습니다. 이것이 소방이 오늘날 적에게 대비하고 있는 형세의 대략이며, 그 밖에 징발한 군사는 모두 총병의 영문에 가서 훈련을 기다립니다. 양식이 나오는 곳으로 말하면, 다 전라도에 의뢰하여 장만하고 있는데, 온갖 계획을 세워 밤낮으로 독촉하여도 길이 험하고 먼데다가 사람의 힘이 쉽게 고갈되어 이따금 군량이 모자랍니다. 어찌 감히 일부러 게을리하겠습니까. 대저 이곳에서 협박당한 사람으로서 그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킨다는 것은 더욱 오늘날의 급무(急務)이므로 조금도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또 생각하건대, 소방의 백성은 대대로 성명(聖明)의 동방을 염려하시는 교화에 힘입어 천지 사이에서 약간은 안정된 생활을 영위해 왔습니다. 우리 임금이 번복(藩服)을 지키시면서 서정(庶政)을 애쓰시며 감히 자만하지 아니하여 사냥 등의 오락을 끊고 연락(宴樂)에 빠지는 실책이 없었습니다. 성심을 다한 것은 첫째는 대국(大國)을 섬기는 것이고 둘째는 백성을 돌보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문에 재위하신 기간 동안에 백성이 날로 번성하고 전야(田野)가 날로 개척되어 길에 굶어 죽은 자가 없었는데, 불행히도 갑자기 흉봉(兇鋒)을 맞아 백년 동안 번성했던 사업들이 한꺼번에 패멸(敗滅)하였습니다. 아아, 어찌 차마 말로 하겠습니까.

어려움을 겪은 뒤로 일이 간혹 이완되고 소홀하여 기한에 미치지 못하기도 하였으니 이것은 참으로 신하들이 받들지 못한 죄입니다. 우리 임금께서 노심초사 뼈에 사무치게 나라의 치욕을 씻으려는 생각이야 어찌 잠시인들 잊은 적이 있겠습니까. 낮에는 먹을 겨를이 없고 밤에는 베개를 베지 않고서 일념으로 애태우는 것은 천지·귀신이 다 아는 바입니다. 오직 이러하므로 민심은 옛 나라를 생각하는 데에 간절하고 의사(義士)는 나라의 쇠망에 분격하여, 적이 서울을 함락한 뒤부터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각자 불러모아서 회복을 꾀하는 자가 여기저기에서 벌떼처럼 일어난 것을 이루 기록할 수 없는데, 이따금 힘껏 싸우고 굽히지 않아서 몸을 나라에 바쳐 절의(節義)가 뚜렷하게 드러난 자도 많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 첨지중추부사 고경명(高敬命), 김해 부사(金海府使) 백사림(白士霖), 거제 현령 김준민(金浚民), 충청 절도사 황진(黃進), 경상우도 절도사 최경회(崔慶會), 원임 좌랑(原任佐郞) 조헌(趙憲), 원주 목사 김제갑(金悌甲), 회양 부사 김연광(金鍊光), 진주 목사 서예원(徐禮元), 판관 성수경(成守慶), 옥천 군수 권희잉(權希仍), 의승장(義僧將) 영규(靈奎), 해미 현감(海美縣監) 정명세(鄭名洗), 경상우도 절도사 유업잉(柳業仍), 절도사 김시민(金時敏), 동래 부사 송상현(宋象賢), 첨지중추부사 유극량(劉克良), 상운 찰방(祥雲察訪) 남정소(南廷甦), 보령 현감(保寧縣監) 이의정(李義精) 등이 외로운 성을 지키거나 적의 보루를 공격하다가 적의 칼날에 쓰러질지언정 차마 구차하게 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적이 소방을 침범한 지 이제 이미 1년이 되었는데, 지방을 지키는 신하나 대대로 녹을 먹는 집안의 선비로서 제 몸을 더럽히고 적을 맞아들여 항복한 자는 참으로 하나도 없으며, 비록 무지한 우민(愚民)·걸인(乞人)·천례(賤隷)라도 한때 그들에게 잡혀서 스스로 빠져 나오지는 못하였어도 조금만 틈이 있으면 곧 도망쳐 돌아왔습니다. 서울 백성들은 적이 성안에 들어오고부터는 누구나 다 칼을 갈며 날마다 밖에서 구원하러 오는 군사를 기다려 안에서 호응할 것을 꾀하므로, 적이 끝내 그들에게 소용이 되지 않을 줄을 알고서는 정월 24일에 속임수를 써서 죄다 죽이니, 성안에 가득히 피가 흘렀습니다. 경상도·전라도·충청도·황해도·평안도의 백성으로 말하면, 안으로는 조도(調度)에 이바지하고, 밖으로는 정역(征役)에 종사하며, 역자석해(易子析骸)621) 의 어려움을 갖춰 당하지 않은 자가 없었으나, 한번 영(令)이 내린 것을 듣고는 도로에서 허둥지둥 뛰며 남녀 노소가 지고 싣고 따라가면서 조금도 원망하지 않았으니, 민심의 소재를 알 수 있습니다. 나라를 일으키는 근본이 여기에 있지 않겠습니까.

걱정되는 것은 태평을 누린 지 이미 오래 되어 기율로 말하면 해이하고, 기계로 말하면 예리하지 못하고, 군졸로 말하면 훈련되지 않았고, 장수로 말하면 마땅한 재목이 아니어서, 소란한 변이 눈앞에 닥쳐 와도 손발을 쓸 수 없는 것입니다. 이제 천위(天威)가 이미 진노함에 저 추악한 무리가 넋을 빼앗겨 연해(沿海)로 물러가 진퇴를 망설이고 있으므로, 그 흉모(兇謀)를 헤아릴 수 없기는 하나 대세는 이미 꺾였습니다. 소방이 조금 더 시일을 얻어 지탱하여 망하지 않고 군사를 얻고 양식을 모아서 뒷날의 공효(功効)를 꾀한다면 천만 큰 다행이겠으며, 천조(天朝)에서도 이 큰 은혜를 다하여 위령(威靈)을 멀리 펴서 미약해진 왜의 형세로 하여금 다시 성대해지지 않게 하여 주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옛사람이 이르기를 ‘자방(咨訪)은 사신의 큰 임무이다.’ 하였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노야(老爺)는 이 사정을 조정에 낱낱이 알리시어 소방으로 하여금 죄를 면할 수 있게 하고 바다의 요사한 기운도 일거에 깨끗이 소탕하여 삼한(三韓) 수천리의 백성이 구원의 은택을 길이 입게 하소서. 그렇게 한다면 어찌 다행하지 않겠으며 시원하지 않겠습니까. 말이 번거롭고 줄이지 않아서 존위(尊威)를 모독하였으니,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위와 같이 사연을 갖추어 올리니, 잘 살펴 전보(轉報)하여 시행케 하여 바친 자에게 이르게 하소서."

하였다. 상이 이를 사신에게 바치고 말하기를,

"소방의 몹시 답답한 정상을 대인에게 전달하지 않으면 어디에 고하겠습니까."

하니, 사신이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국왕의 말씀입니까? 어느 사람이 쓴 것입니까?"

하였다. 장운익(張雲翼)이 말하기를,

"국왕이 분부하신 것을 배신(陪臣)이 썼습니다."

하니, 사신이 말하기를,

"나도 들은 것이 있으니, 첩(帖)을 만들어서 바치겠습니다."

하였다. 또 말하기를,

"팔도의 어느 주(州), 어느 현(縣)에서 훈련하고 있는 군사가 얼마이며, 호구는 얼마이고 축적한 양식은 얼마인지를 유 의정(柳議政)과 상의하여 기록해서 보여 주면 내가 보고자 합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사신이 말하기를,

"내가 사람들에게 들었는데, 사람들이 다 유 의정은 어진 신하라 하니, 반드시 상의하여 보여 주셔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분부대로 따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손수 작은 첩자(帖子)를 썼는데, 그 게첩(揭帖)에,

"소방이 불행하여 갑자기 왜적의 화를 입어 군신이 달아나고 종사(宗社)가 폐허가 되었는데, 성천자(聖天子)의 천지·부모와 같은 인애(仁愛)로 발병(發兵)하여 구원하심을 힘입어 오늘이 있을 수 있었으니, 황은(皇恩)이 그지없어 밤낮으로 감격해 울거니와, 동국 만대에 그 만분의 일도 우러러 갚을 길이 없습니다. 경략(經略)·제독(提督) 두 분 대인께서 무릇 소방을 위하여 규획(規畫)하는데 극진히 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삼도(三都)의 회복과 팔로(八路)가 거의 안정된 것은 참으로 두 대인의 은혜인지라 혈기가 있는 자는 누구나 다 은혜를 느끼고 있습니다.

다만 평양에서 처음 격파하자 천위(天威)가 진동하여 적이 다 넋을 빼앗기고 경성으로 달아났는데, 감히 스스로 보전할 계책을 꾀하여 교묘하게 조공(朝貢)하기를 바란다는 말로 핑계하여 드디어 그 추류(醜類)들을 온전히 보전하고 물러가 변성(邊城)에 웅거하였습니다. 동래(東萊) 【부산포(釜山浦)는 동래와 잇닿은 육지에 있다. 】 ·울산(蔚山) 【서생포(西生浦)는 울산과 잇닿은 육지에 있다. 】 ·김해(金海)·웅천(熊川)·거제(巨濟)·천성(天城) 등지에 가득히 나뉘어 주둔하여 사방으로 출몰하며 약탈하더니, 근일에는 경주(慶州)·안강현(安康縣)에서 관군 2백여 명을 죽이었으니, 하늘을 얕보고 천리를 어기는 것이 이토록 극심합니다.

소방은 2년의 병화 끝에 백성의 힘이 이미 고갈되었고, 양식이 떨어져 공사(公私)간에 다 비었으니, 어떻게 대적하겠습니까. 조석으로 반드시 망하기만을 기다릴 뿐입니다. 대저 왜노(倭奴)는 천지 사이에서 지극히 흉악하고 지극히 교사한 별종(別種)이어서 모든 오랑캐와 다르고 짐승보다 심하여 까닭없이 남의 나라에 들어와 백성을 도탄에 빠뜨리고 병위(兵威)를 믿고 조공하기를 요구하며 변방에 둔거(屯據)하여 양식을 나르고 성을 쌓아 소굴을 만드니, 이것을 보면 그 꾀를 알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위력으로 억제해야 마땅하며 화해를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시경(詩經)》에 ‘융적(戎狄)을 응징한다.’고 하였으니, 반역한 자를 정벌하고 포악한 자를 주벌(誅罰)하는 것은 제왕(帝王)의 성전(盛典)입니다. 소방의 군신이 날마다 섬멸하는 거사를 바라기를 큰 가뭄에 구름을 기다리는 것보다 더합니다. 생각하건대, 대인은 천자의 명을 받들어 오셨으니, 이는 소방이 다시 살아날 기회인 것입니다. 바라건대, 대인께서는 적정을 분명히 살펴 조정에 상세히 아뢰어 한 나라의 백성을 구제하소서. 몹시 답답하고 절박하여 울며 간절히 빌어 마지않으니, 대인은 가엾게 여기소서."

하였다. 상이 자리에서 내려와 친히 사신에게 바치니, 사신이 자리에서 내려와 받았는데, 좌우를 물리치고 보았으므로 시신(侍臣)들도 다 보지 못하였다. 사신이 홍첩(紅貼)을 가져다가 좌우를 물리치고 써서 자리에서 내려와 친히 상에게 바쳤다. 이렇게 한 것이 두 번이었다. 사신이 말하기를,

"잔치가 끝났으니 별배(別拜)를 하겠습니다."

하니, 【손수 쓴 소첩(小帖)은 위에 보인다. 】 상이 말하기를,

"예(禮)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다시 잔을 올리겠습니다."

하였으나, 사신이 사양하였다. 상이 예단(禮單)을 바치니, 사신이 말하기를,

"예물을 받은 것이 이미 많으니, 이제 다시 받을 수 없습니다."

하자, 상이 굳이 청하니, 사신이 받고 말하기를,

"후한 선물에 매우 감사합니다."

하니, 상이 말하기를,

"황은(皇恩)이 아니면 어떻게 대인을 뵈었겠습니까. 소방의 신민은 오로지 대인만 바라봅니다."

하였다. 상이 환궁한 뒤에 봉서(封書) 한 통을 정원(政院)에 내렸는데, 이는 곧 사신과 함께 좌우를 물리치고 문답한 서찰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26책 45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148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註 618]
    신유년 : 1561 명종 16년.
  • [註 619]
    창잔(創殘) : 다친 끝에 살아 남은 자.
  • [註 620]
    신묘년 : 1591 선조 24년.
  • [註 621]
    역자석해(易子析骸) : 남의 자식과 제 자식을 바꾸어 먹고 해골을 빠개어 불때서 밥을 지음. 적의 침범으로 포위를 당하여 큰 고난을 당하는 것을 말함.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애공 8년(哀公八年).

○上詣南別宮, 引見領議政柳成龍於幕次。 都承旨沈喜壽、注書南以信、待敎金尙寯、檢閱朴東善入侍, 成龍進曰: "天使辟左右, 書示曰: ‘俺以忠誠、直諒問之, 所問之事, 不須隱諱。’ 臣答曰: "老爺有問, 小生不敢不以實告。 若不以實, 是欺天也。’ 天使曰: ‘天兵殺倭子, 幾許?’" 臣答曰: ‘以小生在安州時聞之, 天兵斬賊萬餘云。’ 天使曰: ‘碧蹄之戰, 勝敗如何?’ 臣答曰: ‘小生在坡州陣中, 未得詳知, 而査揔兵不利而退云。’ 【査摠兵, 名大受】 天使曰: ‘李提督墮馬云,信乎?’ 臣答曰: ‘然矣’ 我國朝臣, 及天將是非, 亦問之, 而臣不答。 且言: ‘天朝兵馬, 擾害生民云, 然耶?’ 臣答曰: ‘師之所處, 荊棘生之, 豈無此事? 然劉綎戚金在此, 今無此弊矣。’ 大槪朝廷事情, 欲詳知之矣。" 上曰: "我國事情, 今欲力陳之矣。 與予相對, 亦令書示乎? 倉卒間, 令書示難答之事, 則如何以處之?" 成龍曰: "追後從容書示無妨。 凡言語不可輕易, 商量爲之可也。" 上曰: "天使之來, 爲何事乎?" 成龍曰: "前聞浙江, 三年不去, 若割據者然, 至於用天下之兵, 不殺數十賊。 其後戚繼光於辛酉年後, 始乃勝捷云。 朝難於此賊, 沈惟敬之出來,專爲誘出此賊, 此出於下策矣。" 上曰: "此賊元非奉正朔之國, 求貢何意耶?" 成龍曰: "此賊必待糧盡, 而四出搶掠矣。 姑爲乞和之計, 以疲我師。" 上曰: "此言, 無人言者, 而獨平安監司言之。" 【時, 李元翼爲平安藍司。】 上出幕次, 與天使, 俱至殿上, 北向相揖, 行茶禮。 上曰: "聞大人將南下。 非但冒寒下去爲未安, 慶尙一路蕩敗, 甚於西路。 請少留。" 天使曰: "俺之來, 非但爲宣諭, 欲議處光海君及三曹判書下去之事。 欲與劉摠兵面議, 而以離營爲難, 俺不可往見於大丘戚摠兵亦言不必往云。 俺雖不去, 賊情已知之矣。" 又曰: "昨觀國都, 甚好。 但偏近於西, 若小移東南則好矣。 俺頗解風水, 若送人則當指敎。" 上曰: "大人將爲指敎矣, 別書以示之, 則尤幸矣。" 上以賊勢揭帖。

朝鮮國陪臣原任議政府領議政鄭澈、領中樞府事沈守慶、議政府領議政柳成龍等, 謹呈爲陳情事。 竊照小邦不祿, 遭此禍變, 欽惟聖天子, 赫然震怒, 討誅兇醜, 拯濟危困, 小邦生靈, 免於塗炭, 而宗廟、社稷, 更得完保斯圖。 事絶前聞, 功隆往牒, 而德意之厚, 際天塞地, 非小邦君臣糜身粉骨, 所能報稱。 卽又老爺台座, 奉承天子明命, 慰撫創殘, 戒飭疎緩, 欲爲小邦, 謀善後之圖, 載色載笑, 莫非出於終始全安之意, 小邦之人, 傾瞻德範, 仰聆至敎, 灑然如蘇再生。 不得不更以區區憫迫之情, 及時奔走, 徹聞於咨諏之聽, 以求導達於天日之明也。 伏乞老爺, 哀矜照察焉。 謹査小邦, 前於辛卯夏, 日本賊酋, 遣妖僧玄蘇, 來叩邊門投書, 其言絶悖, (䝱)〔脅〕 小邦以從已。 小邦君臣, 爲之痛心疾首, 知必有賊變, 卽差使臣, 馳奏京師。 又分差巡察使金睟 于慶尙道李洸全羅道尹先覺忠淸道, 巡邊使申砬李鎰京畿黃海道, 點閱軍丁, 修造軍器, 繕築城池。 又以慶尙道前受敵之地, 增築釜山東萊密陽金海多大浦昌原咸安等城, 鑿深壕塹。 其內地之無城處, 如大丘府淸道郡星州牧三嘉縣永川郡慶山縣河陽縣安東府尙州牧, 悉發民築城。 又慮人情狃安怠慢, 國王連發近臣、承旨等官, 閱視催督, 其違慢失機者, 以輕重行罰。 至壬辰三月, 釜山僉使鄭撥飛報, 對馬島平義智船, 來泊浦口, 投書僉使, 有借道等語。 小邦聞之, 益駭且憤, 斥還其書, 而飭邊盡驅出境上, 不許容留等候。 義智回泊釜山浦海島絶影島數日, 怏怏而去, 旣而四月十三日, 而賊已犯境矣。 釜山陷, 僉使鄭撥力戰而死, 翌日東萊又陷, 府使宋象賢、敎授盧盖邦梁山郡守趙英珪以下將官軍民死者, 數萬餘人。 密陽府使朴晋, 率軍連戰於梁山密陽之間, 皆敗, 密陽又陷。 時, 賊鋒銳甚, 倍道兼行, 人心駭動, 列鎭不及相援。 巡邊使李鎰, 迎戰於尙州城外, 未及布陳, 而賊奄至, 以鳥銃四面衝之, 軍潰, 僅以身免, 從事官弘文校理尹暹、修撰朴箎尙州判官權吉等皆死之。 尙州民, 所在相聚力戰, 無一投降者, 死者尤多, 闔境爲之殘破。 收散卒, 欲退保鳥嶺, 有申砬巡邊使在忠州, 邀共守忠州。 賊詗知無備, 達夜踰嶺, (經)〔徑〕 進圍城。 出戰敗死, 我軍爲賊所擠, 悉赴金灘, 江水爲之不流。 忠州在京都上流, 忠州已失, 則京城不可守矣。 先是都人, 以李鎰申砬, 皆以重兵扼險, 日望捷音, 及敗報奄至, 且城中精壯, 先爲申砬李鎰及諸將官抄領帶去, 諸道援兵, 亦未及召聚。 於是, 寡君知事勢已急, 分遣王子及宰臣, 召募四方, 身自西遷, 欲稍近上國地方, 得投誠乞恩於天子之庭, 以圖恢復。 雖非守國之經道, 亦揆事之權宜也, 而果蒙天地生成之恩, 得有今日。 此賊變以來, 事情梗槪也。 前年六月, 寡君在義州, 日憂糧餉匱乏, 不足以接濟軍興, 差判中樞府事柳成龍, 帶同吏曹正郞辛慶晋、濟用監正洪宗祿等, 點閱一路糧料。 又連遣商山君 朴忠侃、禮曹參判成壽益、同知中樞府事李輅全城君 李準, 各在管領驛站, 董草催糧。 今年正月初八日, 大軍克平壤, 又專差戶曹判書李誠中, 率佐郞金繼賢李自海, 隨軍一行, 句管糧草。 又催朴忠侃, 仍舊管察轉運。 又差分戶曹判書權徵, 帶同從事官黃致敬權悏、中樞府經歷申黯, 入江華 喬桐, 盡發公私藏蓄, 添補軍糧, 因督忠淸全羅海路漕運, 陸續輸到開城。 又遣司諫院正言黃克中, 按視勤慢。 又令大臣議政府右議政兪泓, 總督諸務, 竝晝夜催儧, 不許時刻稽緩。 四月十二日, 賊離都城, 其日大軍入城; 五月, 大軍追賊南下, 戶曹判書李誠中, 因隨大軍管糧, 不期七日, 誠中咸昌病故, 有調度官弘文正字尹敬立, 暫管其任, 馳啓國王, 卽遣本曹參議鄭光績往代。 又分遣吏曹判書李山甫、調度使姜籤忠淸道; 檢察使金瓚、調度使邊以中任發英等于全羅道, 搜括軍糧。 續遣弘文館校理朴弘老, 催督兩道轉輸。 在後節次, 承奉經略秘計, 料理善後事, 宜速遣工曹參判李輅、同佐郞崔洽, 句當設險等事。 其中操練軍兵一款, 已委諸道都巡察使權慄, 在劉總兵管下, 悉發三道民丁、軍壯, 赴營聽調。 又遣議政府左議政尹斗壽提總, 竝不敢違慢。 只有光海君, 自前年變後, 跋涉山川, 蒙犯霧露, 致傷榮衛, 久不痊可, 未免暫留海州, 尋醫下藥。 繼聞有聖旨, 惶恐感激, 不敢言病, 已力疾赴都, 朝夕南下外。 因竊伏念, 小邦微弱, 一爲狂寇所乘, 不能自振, 勞王師暴露, 已涉一年。 藩屛之任不效, 重貽聖天子東顧之憂, 罪已無所逃矣。 第以小邦於此賊, 有不共戴天之讎, 萬世必報之怨。 旣殘夷我社稷, 發掘我丘隴, 屠戮我生靈, 係累我子女, 蕩盡我財穀, 邦域之內, 凡有血氣之倫, 莫不腐心切齒, 欲前死於賊。 況倚仗天威, 圖毖後患? 是何等大事, 何等機會, 亦何心而泄泄寬縱, 以自趨於覆亡之域, 辜負再造之恩哉? 然而未能者, 特以賊未退耳。 賊未退, 故力未暇; 力未暇, 故事不逮。 雖(無)〔欲〕 生聚訓鍊, 以收桑楡, 而顧未能自振, 此小邦之日夜所悶也。 今之賊之在慶尙道者, 蔚山西生浦也, 東萊也, 釜山也, 梁山下龍堂也, 金海也, 熊川也, 昌原也; 海中則加德天城也, 巨濟也, 巨濟永登浦也, 場門浦也。 小邦猛將、精兵, 前後力戰, 而死於咸安晋州之間者, 無慮數萬餘人, 賊首尾連亘於左、右道數百里, 迭出橫掠, 猶幸天兵, 壓臨於大丘慶州, 故蔚山之賊, 不得踰慶州, 而東萊之賊, 不得踰大丘。 而西北本國諸將李薲高彦伯洪季男宣居怡等, 亦得(籍)〔藉〕 虎豹在山之威, 收拾零殘之卒, 分頭相截於宜寧之間, 逐日血戰, 而勢已蹙矣。 又以巨濟之賊, 將犯全羅之境正易, 故令三道舟師將李舜臣元均李億麒等, 領水軍萬餘, 相截於閑山島, 以備西犯之路。 此小邦今日備賊形勢大槪, 而其他調發之軍, 悉赴總兵營下, 敢候訓鍊。 至於糧運所出, 則皆倚(辨)〔辦〕全羅道, 雖百計措畫, 晝夜催督, 而道旣險遠, 人力易竭, 往往不敷。 豈敢故行怠緩? 若夫此處被脅之人, 以安反側, 尤係今日急務, 不容小忽。 且念小邦人民, 世被 聖明東顧之化, 稍安耕鑿於覆載之中, 寡君自守藩服, 憂勤庶政, 不敢滿(暇)〔假〕 , 絶遊畋弋獵之娛, (欲)〔無〕 宴樂流連之失。 其所盡心者, 一則事大, 二則恤民。 以此二十七年之間, 生齒日繁, 田野日闢, 道無餓莩, 不幸猝被兇鋒, 百年殷庶之業, 一敗塗地。 嗚呼! 尙忍言哉! 艱虞之後, 事或疎緩, 未及期會, 此實臣子不能奉承之罪。 寡君之所以焦心切骨, 圖雪國恥者, 曷嘗斯須忘哉! 日不遑食, 夜不設枕, 一念惓惓, 天地鬼神, 所共監臨。 唯其如此, 故民心切於思舊, 義士奮於垂亡, 自賊陷京都之後, 慷慨飮泣, 各自呼聚, 以圖興復者, 在在蜂起, 不可殫記, 往往力戰不屈, 以身循國, 節義表著者, 亦多有之。 如倡義使金千鎰、僉知中樞府事高敬命金海府使白士霖巨濟縣令(金浚民)〔金俊民〕 忠淸節度使黃進慶尙右道節度使崔慶會、原任佐郞趙憲原州牧使金悌甲淮陽府使金鍊光晋州牧使徐禮元、判官成守慶沃川郡守權希仍、義僧將靈奎海美縣監鄭名洗慶尙右道節度使柳業仍、節度使金時敏東萊府使宋象賢、僉知中樞府事劉克良祥雲察訪南廷甦(報寧)〔保寧〕 縣監李義精等, 或捍禦孤城, 或衝犯賊壘, 糜身鋒刃, 而不忍偸生。 賊在小邦, 今已(七)〔二〕 年, 而實無一介守土之臣。 世族之士, 汚身迎降者, 雖無知愚民、傭丐、賤隷, 一時爲其係累, 不能自拔, 而少有間隙, 旋卽逃還。 京都之民, 自賊入城, 莫不淬勵刀劍, 日望外兵, 以圖內應。 賊知其終不爲已用, 乃於正月, 二十四日設詐而盡殺, 滿城流血。 至於慶尙全羅忠淸黃海平安之民, 內供調度, 外事征役, 易子(折)〔析〕 骸之困, 無不備有, 而一聞令下, 匍匐道路, 老少男女, 負戴追隨, 而少無怨咨, 民心所在, 亦可見矣, 而興邦之本, 其不在玆乎? 所患昇平旣久, 以言其紀律則解弛, 以言其器械則不利, 以言其軍卒則未練, 以言其將帥則非材, 搶攘之變, 驟到目前, 而不遑於措手足ㆍ耳目。 今天威已震, 醜類褫魄, 退遁沿海, 徘徊前却, 雖其兇謀, 有難(則)〔測〕 度, 而大勢已挫矣。 小邦稍假日月, 支撑不亡, 得兵聚糧, 以圖後效, 固萬萬大幸。 亦望天朝, 畢此大恩, 而遠布威靈, 勿使涓涓之微, 又至於懷(衰)〔襄〕 而已。 古人云: ‘咨訪, 使臣之大務。’ 伏乞老爺, 將此事情, 一一轉報朝廷, 使小邦得免罪戾, 而海上妖氣, 一擧廓淸, 三韓數千里生靈, 永被拯濟之澤, 豈不幸哉, 豈不快哉? 辭煩不殺, 冒瀆尊威, 罪死罪死。 爲此合行具呈, 伏乞照詳, 轉報施行, 須至呈者。"

呈于天使曰: "小邦悶迫之情, 若不達大人, 則何所控告乎?" 天使見之曰: "此國王之辭乎? 誰人所書乎?" 張雲翼曰: "國王所敎, 而陪臣書之矣。" 天使曰: "俺亦有聞, 當作帖以呈。" 又曰: "八道某州、某縣, 鍊兵幾何, 戶口幾何, 積糧幾何? 與議政相議, 開錄以示, 則俺欲見之。" 上曰: "當遵敎。" 天使曰: "吾聞於人, 人皆曰: ‘議政, 賢臣。’ 須相議以示。" 上曰: "當遵敎。" 上以手書小帖, 其揭帖曰:

小邦不祿, 猝被賊之禍, 君臣奔竄, 宗社爲墟, 特蒙聖天子天地、父母之仁, 發兵救援, 得有今日。 皇恩罔極, 日夜感泣, 東國萬世, 無以仰報其萬一。 經略、提督兩位大人, 凡爲小邦規畫, 無所不用其極, 三都之克復, 八路之幾定, 實兩大人之賜也。 凡有血氣, 莫不感恩。 第惟平壤初破, 天威震疊, 賊皆褫魄, 遁還京城, 敢圖自全之計, 巧託求貢之說, 遂得以全其醜類, 退據邊城, 東萊 【釜山浦, 在東萊連陸之地。】蔚山 【西生浦, 蔚山連陸之地。】金海熊川巨濟加德天城等處, 彌漫分屯, 四出搶掠, 近日於慶州 安康縣, 砍殺官軍二百餘名, 其慢天犯順, 至此極矣。 小邦二年兵禍之餘, 民力已竭, 糧餉將盡, 公私赤立, 何以抵敵? 只待朝夕必亡而已矣。 夫倭奴, 乃天地間極兇至詐之別種, 異於諸夷, 甚於禽獸, 無故入人之國, 塗炭生靈, 挾其兵威, 要以講貢, 屯據邊徼, 運糧築城, 作爲巢穴, 此其謀不難知也。 當以威制, 未可許款。 (侍)〔《詩》〕云: ‘戎狄是膺。’ 伐叛誅暴, 帝王盛典。 小邦君臣, 日望勦滅之擧, 不啻如大(早)〔旱〕 之望雲霓也。 仰惟大人, 祗奉天子明命來臨, 小邦再生之秋也。 伏願大人, 明照賊情, (祥)〔詳〕 奏朝廷, (極)〔拯〕 濟一邦生靈, 無任悶迫痛泣祈懇之至。 惟大人矜恤焉。

降座親呈天使前, 天使降座受之。 辟左右覽之, 侍臣皆不得見。 天使取紅貼, 辟左右書之, 降座親呈于上前。 如是者再。 天使曰: "宴畢。 請行別拜。" 【手書小貼, 見上。】 上曰: "禮未畢。 請更進酌。" 天使請辭, 上呈禮單。 天使曰: "受禮旣多, 今不可更受。" 上强請, 天使受之曰: "多謝厚貺。" 上曰: "若非皇恩, 何以見大人? 小邦臣民, 專仰大人矣。" 上還宮後, 以一封書, 下于政院, 乃與天使, 辟左右問答書札也。


  • 【태백산사고본】 26책 45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148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