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이 편전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각자의 의견을 말하게 하다
사시(巳時)에 상이 편전(便殿)에 나아가 대신들에게 이르기를,
"경들은 각각 의견을 말하라."
하였다. 심충겸(沈忠謙)이 아뢰기를,
"요사이 국세를 살피건대, 점점 위급하고 절박해져 마치 오랜 병이 더욱 위중해져 원기가 시든 것과 같아서 아찔할 정도의 약을 투여하지 않는다면 날로 점점 여위어 마침내는 구제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대신이 이미 내려가 있으니 급히 이런 뜻으로 송 경략(宋經略)에게 통고, 합세해서 진격하여 한번 사전(死戰)을 결행하게 해야 합니다. 양호(兩湖)의 물력(物力)이 한번의 싸움은 그래도 지탱할 수 있지만 오래 대치할 경우는 사세가 지탱하기 어렵게 될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국이 이미 강화(講和)하기로 하였는데 총병(總兵)이 어찌 진격하려 하겠는가. 반드시 중국 조정에 상달하고 또 경략과 제독이 마음을 돌리게 한 다음에야 진격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유성룡이 아뢰기를,
"앞서 총병의 말을 들어보건대 진격하려는 뜻이 있는 듯했고, 또 석 상서(石尙書)가 송 경략에게 보낸 글을 보건대 ‘형편에 따라 일을 해 가라.’는 말이 있었으니, 이런 뜻으로 좌상(左相)에게 하서(下書)하여 총병과 더불어 비밀히 의정(議定)하여 진격을 상의하게 함이 합당하겠습니다."
하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박진(朴晉)은 아뢰기를,
"청하 현감(淸河縣監) 정응성(鄭應星)과 흥해 군수(興海郡守) 최보신(崔輔臣)은 시종 굳게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농사짓고 수확하여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으니 그들의 공이 적지 않습니다만 상직(賞職)이 얼마인지 모르겠습니다. 연일 현감(延日縣監) 홍창세(洪昌世)는 이수일(李守一)과 군공(軍功)이 서로 비등한데 이수일은 이미 당상으로 승진했지만 홍창세는 아직 상을 받지 못했으니 억울한 것 같습니다. 양산 군수(梁山郡守) 변몽룡(邊夢龍)은 직접 자신이 돌격하여 수급(首級)을 일곱이나 베었고 군관을 나누어 보내어 용당(龍堂)에 있는 적선(賊船)을 모두 분탕(焚蕩)했습니다. 공이 변몽룡만 못한 사람이 도리어 그의 위에 있으니 억울해 하는 뜻이 있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이 큰데 상이 작았거나 혹 상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경이 모두 말해 보라."
하였다. 박진이 아뢰기를,
"경주(慶州) 최문병(崔文炳)은 자인현(慈仁縣)을 지키면서 국곡(國穀)을 수호, 4월에서 8월까지 버티고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청송 부사(靑松府使) 정신(鄭愼)은 한인보(韓仁溥)와 함께 힘을 다해 성을 지키면서 군량을 많이 도왔고, 의성 현령(義城縣令) 이여온(李汝溫)도 군량을 잘 조달하였으니, 그 공이 가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권응수(權應銖)는 경의 부하(部下)에 있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장수가 될 만한가?"
하였다. 박진이 아뢰기를,
"처사가 전도되고 군졸을 아끼지 않습니다."
하고, 성룡은 아뢰기를,
"주살(誅殺)이 지나치기 때문에 인심이 붙좇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천(永川)에서 세운 공은 덮어둘 수가 없습니다. 정대임(鄭大任)도 성심으로 적을 쳐서 그 공이 권응수와 다름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대임은 어떤 사람인가?"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신이 그 위인을 보건대 장수가 될 만했습니다. 스스로 하는 말이 ‘나는 글을 모르므로 목민관(牧民官)은 될 수 없다. 장수로 정하여 내려보내어 일대(一隊)를 담당하게 해준다면 적들을 칠 수 있다.’고 하였는데, 그의 뜻이 가상했습니다. 그리고 영천에서의 공을 모두 권응수에게 돌리고 자신의 공은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슨 관직에 있는가?"
하였다. 아뢰기를,
"예천 군수(醴泉郡守)로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원대로 하는 것이 합당하다."
하였다. 박진이 아뢰기를,
"정기룡(鄭起龍)은 접전할 때 말에서 내려 적을 베고는 말을 탔는데 이는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조경(趙儆)이 적에게 살해될 뻔했다가 기룡 때문에 죽음을 면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적에는 항오(行伍) 가운데에서 발탁하여 등용하기도 했었다. 정기룡과 같은 사람을 판관(判官)에 두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하였다. 성룡이 아뢰기를,
"기룡은 젊고 재략(才略)이 있는가 하면 또 목민(牧民)에도 능합니다. 중국 장수를 접대할 적에도 성의를 다하여 친히 풀을 베어 오기까지 했습니다. 상주(尙州) 사람들이 모두 하는 말이 ‘판관(判官)을 목사(牧使)로 올리면 다시 판관은 낼 필요가 없다.’고 했으니, 이만한 사람은 요사이 보기 드뭅니다."
하고, 박진은 아뢰기를,
"상인(常人)으로 말한다면 울산(蔚山)의 백정(白丁) 장오석(張五石)과 사노(私奴) 김선진(金善進) 등이 모두 역전(力戰)한 공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관직을 제수해야 용동(聳動)된다."
하였다. 박진이 아뢰기를,
"경주(慶州)의 이극복(李克福), 정로위(定虜衛) 최봉천(崔奉天), 흥해(興海)의 이돈(李敦)·박응성(朴應聖) 등은 변란이 처음 발생했을 적에 도(道)에 주장(主將)이 없었으므로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역전하여 공이 있었는데 모두 적에게 살해되었습니다."
하니, 상이 주서(注書)에게 자세히 성명을 써놓게 했다. 심충겸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법령은 금방 세웠다가 바로 금방 폐지하는 것이 미안하게 생각될 듯도 합니다만 서인(庶人)들이 착모(着帽)하게 한 것은 인정이 모두들 편리하지 못하게 여깁니다. 성상의 뜻은 한결같이 중국 제도대로 하시려는 것이기는 합니다마는, 중국 군사라고 가칭(假稱)하면서 중로에서 작적(作賊)할 폐단이 있기도 합니다. 의주(義州)에서는 복색이 혼잡하여 간사한 짓을 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생각에는 서인들이 소모(小帽)를 쓰고 금군(禁軍)은 전립(氈笠)을 쓰면 싸움하기가 편할 듯하였으며, 서리(書吏)들은 《대전(大典)》에 의하면 각각 써야 할 것이 있으므로 사람마다 모두 죽기(竹機)를 지니고 다니다가 비를 만나면 즉각 쓰면 되리라 여겼었다. 중국 장수들이 보고서 매양 조소(嘲笑)한다니, 고치는 것이 뭐가 해롭겠는가."
하였다. 아룀을 끝내고 차례대로 물러갔다.
- 【태백산사고본】 25책 44권 4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119면
- 【분류】의생활-관복(官服)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乙卯/巳時, 上御便殿, 謂大臣等曰: "卿等各言所懷。" 沈忠謙對曰: "近觀國勢, 漸就危迫, 如久病彌留, 元氣萎弱。 若不投以瞑眩之藥, 日漸焦槁, 終至於不可救矣。 大臣旣已下去, 急以此意, 通于經略, 合勢進擊, 決一死戰可也。 兩湖物力, 一戰則猶或可支, 若持久, 則勢難支吾矣。" 上曰: "中原, 旣已講和, 總兵豈肯擊之? 必須上達于朝廷, 而又使經略、提督回, 心然後可擊。" 柳成龍曰: "前聞總兵之言, 似有進擊之意, 且見石尙書通經略書, 有便宜從事之語。 此意下書于左相, 與總兵秘密議定, 相議進戰爲當。" 同知中樞府事朴晋曰: "淸河縣監鄭應聖, 與興海郡守崔輔臣, 終始堅守, 故民皆耕穫, 至今保存。 其功不小, 而未知賞職幾何? 延日縣監洪昌世, 與李守一, 軍功相等, 而守一已陞堂上, 昌世則尙未蒙賞, 似爲冤悶。 梁山郡守邊夢龍, 親自突擊, 手斬七級, 分遣軍官, 龍堂賊船, 盡爲焚蕩, 而功不如夢龍者, 反居其上, 似有冤悶之意。" 上曰: "功高而賞小, 或未蒙賞者, 卿一一言之。" 晋對曰: "慶州 崔文炳, 把截慈仁縣, 守護國穀, 自四月至八月, 拒守不退。 靑松府使鄭愼, 與韓仁溥, 竭力守城, 多助軍糧。 義城縣令李汝溫, 亦能接濟軍糧, 其功可嘉。" 上曰: "權應銖, 卿之部下人, 其人能將乎?" 晋曰: "處事顚倒, 不愛軍卒。" 成龍曰: "過爲誅殺, 故人心不附, 然不能掩永川之功矣。 鄭大任, 誠心討賊, 其功與應銖無異。" 上曰: "鄭大任, 何如人?" 成龍曰: "臣見其人, 可堪爲將。 自言我不解文, 不可爲牧民之官, 若定將下送, 令自當一隊, 則可以討賊云, 其志可尙。 且永川之功, 歸美於應銖, 而渠則口不言功。" 上曰: "何官?" 對曰: "醴泉郡守也。" 上曰: "依願爲當。" 晋曰: "鄭起龍, 接戰時, 下馬斬賊, 旋卽上馬, 此事甚難。 趙儆幾爲賊所殺, 賴起龍得免。" 上曰: "古者, 或拔用於行伍之中。 如起龍者, 不當置於判官。" 成龍曰: "起龍, 年少有才略。 且長於牧民, 接待天將, 極盡其誠, 至親自刈草。 尙州人皆曰: ‘判官可陞牧使, 而判官不必出也。’ 如此之人, 今所罕見。" 晋曰: "以常人言之, 蔚山白丁張五石、私奴金善進等, 皆力戰有功。" 上曰: "如此之人, 必須除職, 可以聳動。" 晋曰: "慶州 李克福、定虜衛崔奉天、興海 李敦、朴應聖等, 當變初, 道無將主, 親自領軍, 力戰有功, 而皆爲賊所害。" (生)〔上〕 命注書, 詳書姓名。 忠謙曰: "我國法令, 旋立旋廢, 雖似未安, 如庶人着帽事, 人情皆以爲非便。 聖意雖欲一依華制, 或有假稱唐兵, 中路作賊之弊。 義州則服色混淆, 不無奸細之事矣。" 上曰: "予意庶人着小帽; 禁軍着氈笠, 則赴戰似爲簡便, 而書吏, 則《大典》各有所着之物, 人人皆挾竹機, 逢雨輒着可也。 唐將見之, 每爲嘲笑, 改之何妨?" 啓訖, 以次退。
- 【태백산사고본】 25책 44권 4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119면
- 【분류】의생활-관복(官服) /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인사-관리(管理)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