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변사가 주둔 비용 문제로 명군 5천 명만 머물도록 청하자고 아뢰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삼가 유병(留兵)에 관한 경략의 자문(咨文)의 내용을 보니, 우리 나라를 유념하는 그의 마음이 지극합니다. 참호(塹濠)를 파고 관(關)과 성책(城柵)을 세우는 등의 일은 전쟁이 조금 누그러진 뒤에 지세(地勢)를 보아가며 하나하나 해야 할 일입니다.
다만 유병이 2만 명에 이를 경우 한 사람당 해마다 월급(月給)과 월량(月糧)으로 은(銀) 1냥(兩) 5전(錢), 행량(行糧)과 염채대(鹽菜代)로 은 1냥 5전, 의화대(衣靴代)로 3전, 호상(犒賞)으로 3전, 도합 3냥 6전을 지급해야 하니, 2만 명의 군사에게 1년 동안 지급할 은의 합계가 모두 1백만 냥이나 되는데, 본색(本色)의 양료(糧料)는 이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의 관원이 중국에서 나온 광부(礦夫)와 여러 곳에서 은맥(銀脈)을 찾고 있으나 아직까지 한 곳도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그렇다고 치고 양료만을 가지고 말하더라도, 우리 나라의 전성기(全盛期) 때에도 1년의 세수(稅收)가 양계(兩界)를 제외한 6도에서 받아들이는 쌀·콩·조가 겨우 23∼24만 석이었는데, 그 중에서 콩과 조를 빼고나면 쌀은 14만 석이 채 되지 않습니다. 중국 군사 2만 명이 1년 동안 먹는 양식에 대해 중국 승두(升斗)를 우리의 승두로 환산하여 계산하면, 1년 동안 필요한 쌀이 12만 석이나 되고, 만약 지금처럼 혼록(混錄)382) 하여 함부로 지나치게 주는 폐단이 있으면 거의 20만 석에 이를 것입니다. 이 밖에 상으로 호궤(犒饋)하는 은 86만 냥은 이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만약 경략의 말대로 2만 명을 유병시킨다면 우리 나라는 종묘 사직의 제사도 궐(闕)하고 상공(上供)도 없애고 관원의 녹도 주지 않고서 온 나라의 전재(錢財)를 다 털어 오로지 중국 군사만을 먹인다 할지라도 지탱하기 어려운 형세입니다. 그러므로 양남(兩南)이 모두 적의 요충(要衝)이 되는데도 당초 유병을 청할 적에 5천 명을 넘지 않은 것은, 많은 군사가 머물러 곳곳에 결진(結陣)하여 적으로 하여금 감히 엿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 만전의 계책인 줄을 몰라서가 아니라, 오로지 군량을 대기 어렵기 때문에 5천 명의 군사만을 청하여 성세(聲勢)를 펼치고 한편으로는 우리 나라의 군사를 쓸 수 있도록 교련(敎鍊)시키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진주(陳奏)하여 이미 황제의 윤허까지 받았으니 5천의 숫자는 가감(加減)할 수 없을 듯합니다. 이는 우리의 힘이 미칠 수 있는 바와 우리 나라의 형세를 헤아려서 발의(發議)한 것입니다.
주포(紬布) 등의 물건을 은냥(銀兩)으로 환산하여 쓴다 해도 생산에 한정이 있으니 역시 허다한 은냥의 수를 상채(償債)하기에는 어려울 것입니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결코 5천 명 이상은 더 청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회자(回咨) 말단(末端)에 의주(義州)로 곡식을 보내주기를 청하여 지금 주운(舟運)하는 것처럼 의주에서 서울로 운송하여 서울에 공급하고 3도의 조세(租稅)를 떼어내어 오로지 중국 군사들만을 먹인다면 1년은 지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우리 나라가 조처할 형편에 의거하여 말한 것일 뿐입니다. 자문 안에 편의에 따라 대답하되, 우리 나라를 친절히 보살펴 준 데 대하여 감격하고 있다는 뜻을 또한 말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답하고, 이어 전교하기를,
"우리 나라는 평시에도 오히려 가난을 걱정했는데, 더구나 잔파(殘破)된 끝이라서 더욱 모양이 말이 아닌 때이겠는가. 이 말을 비록 저들이 안다 해도 해로울 것이 없으니 숨기지 말고 회자에 첨가해 넣어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3책 41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67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군사-병참(兵站) / 외교-왜(倭) / 외교-명(明)
- [註 382]혼록(混錄) : 한 사람을 이중으로 기록함.
○備邊司啓曰: "伏見經略留兵咨意, 其留念我國之事, 至矣, 盡矣。 如(斬塹)〔塹濠〕 、(桃濠)、築關、(星)〔城〕 柵等事, 當於戎事稍定後, 相度地理形勢, 逐節爲之矣。 但留兵至於二萬, 每年月給、月糧銀一兩五錢, 行糧、鹽菜銀一兩五錢, 衣鞋三錢, 犒賞三錢, 共銀三兩六錢。 二萬軍一歲之計, 該銀一百萬兩, 本色糧料不計云。 今與自中朝出來礦夫, 諸處覓得, 無一處成功。 此則已矣, 只以糧料言之, 我國全盛之時, 一年稅入, 兩界外, 六道米、豆、粟幷, 歲僅二十三四萬石。 除豆、粟外, 不滿十四萬石。 天兵二萬一歲所食, 以上國升斗, 準我國升斗計之, 一歲用米十二萬石, 若如今時混錄濫受之弊, 則幾至二十萬石。 賞犒銀八十六萬兩, 不在此類。 若如經略之言, 則我國雖闕粢盛, 除上供, 不頒祿, 竭一國而專供天兵, 勢所難支。 故兩南俱是敵之要衝, 而當初請留兵, 不過五千者, 非不知多多挽駐, 在在結屯, 使賊不敢窺, 而以爲萬全之地也。 專爲糧餉之難, 只請五千, 作爲聲勢, 兼使敎鍊我士, 以爲之用, 至於陳奏, 已蒙準可。 五千之數, 似難加減。 此乃隨吾力所及, 量我國形勢而發也。 至以紬布等物, 以準銀兩事, 土地所産有限, 亦未必能償銀兩許多之數也。 反覆思之, 五千之外, 決不能加請也。 回咨末端, 竝爲請粟, 運至義州, 自義至京, 如今之舟運, 以供京城, 除三道之稅, 專餉天兵, 或可支一年矣。 此則只據我國措處形止而言。 咨文內, 隨宜隨答, 亦致感激慇懃我邦之意何如?" 答曰: "依啓。" 仍傳曰: "我國平時, 尙患貧窶。 況此殘破之後, 尤不成形? 此言雖知之無妨, 不爲隱諱, 回咨添入。"
- 【태백산사고본】 23책 41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67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군사-병참(兵站) / 외교-왜(倭) / 외교-명(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