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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41권, 선조 26년 8월 1일 임오 8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유성룡이 명군에의 진격 요청, 아군 및 적세, 군량 문제 등을 보고하다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이 치계(馳啓)하였다.

"신이 이달 9일에 유 총병(劉總兵)합천(陜川)에 있다는 말을 듣고 즉시 달려가 만나기를 청하였더니, 총병은 온화한 기색으로 신을 만나 주었습니다. 신이 왜노(倭奴)가 거짓된 화의(和議)로써 명병의 진군을 늦추어 진주(晉州)를 구원하지 못하게 하고, 실지로는 침략의 뜻을 행하고 있으므로 지금 본도(本道)와 호남(湖南)은 위험이 조석에 임박하였다는 것을 극력 진술하고 달려가 구원해 주기를 간청하였더니, 총병이 말하기를 ‘나의 뜻대로 행해지지 않을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소문대로라면 적이 이미 전라도로 향한 듯한데, 만약 이 도에서 막지 못하면 화란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나도 군사를 이끌고 달려가서 구원하고자 하였으나 이곳에 군사가 없으므로 일찍이 거창(居昌)에 주둔해 있는 요장(遼將)을 불러 그들로 하여금 와서 고령(高靈)합천을 지키게 한 뒤에 내가 행군(行軍)하려고 하였는데 호령(號令)이 행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실지로 호남이 침략당하고 있다는 것을 안 이상에는 당신들이 말한 대로 달려가 구원하여 왜적을 토벌해야 하겠으니, 경유하는 도로를 자세히 기재한 지도(地圖) 한 장을 가지고 오라.’ 하고, 또 ‘이곳에 장관(將官)과 군병 한 사람도 없는 것은 어찌된 영문인가?’ 하였습니다. 신이 대답하기를 ‘제장관(諸將官)이 처음에 함안(咸安)에 모였다가 물러가 각처(各處)를 지키고 있었는데, 진주가 함락되었다는 것을 듣고는 모두 궤산(潰散)하여 호남으로 갔다. 이것을 이미 국왕(國王)께 아뢰었으니 반드시 율(律)을 상고하여 치죄할 것이다. 다만 사세가 이처럼 위급하니 노야(老爺)는 속히 구제해 주기를 바란다.’ 하였더니, 총병이 말하기를 ‘나의 생각도 그러하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러나 전라도에 있는 적세(賊勢)의 허실(虛實)을 탐지한 뒤에 곧 진병(進兵)하겠다.’ 하였습니다. 신이 물러나와서 지도 한 장을 그리고 또 품첩(稟帖)을 만들어 올렸더니, 총병은 보고나서도 여전히 제장(諸將)이 자기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니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상황임을 누누이 말하면서도 즉시 많은 파발아(擺撥兒)를 보내어 의령(宜寧)의 적을 정탐하게 하였으니, 나아가 싸울 의사가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서 날마다 총병에게 간곡히 권하고 있습니다.

독포사(督捕使) 박진(朴晉), 조방장(助防將) 박명현(朴名賢), 별장(別將) 박종남(朴宗男)은 다만 지친 군사 5∼6백 명을 거느리고서 명장 오 유격(吳遊擊)과 함께 초계(草溪)를 차단하여 수비하고 있고, 최원(崔遠)·이빈(李薲)·이시언(李時言)진주(晉州)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거창(居昌)·함양(咸陽) 등지에서 떠났다고 합니다.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의 재촉하는 이문(移文)이 이곳에 왔는데 그들을 도무지 찾아낼 수 없고 지금 어느 곳에 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진주가 함락된 뒤로 인심이 흉흉하여 원근의 백성들이 피난 보따리를 싸 놓고 있으며 호남의 소식도 끊어졌습니다. 다만 박진에게 보낸 권율의 이문을 보니, 왜적이 이미 구례(求禮)에 입성했는데 장차 곡성(谷城)·남원(南原)으로 향하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이 이문으로 볼 때 왜적이 호남을 침범한 것은 확실한 듯하여 통민(痛憫)함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곳의 적은 의령(宜寧)기강(岐江) 등지에 책(柵)을 설치하고서 둔수(屯守)하고 있는 숫자가 매우 많은데 날마다 흩어져 나와서 삼가(三嘉)와 의령 등지에서 분탕질 치고 있습니다. 어제 합천의 40리 거리에서 망군(望軍)이 전고(傳告)하니, 총병이 갑옷을 입고 군사를 이끌고서 출발하려 하다가 적이 물러갔다는 말을 듣고는 곧 중지하였습니다. 오늘 의령으로 나아갔던 정탐병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데 만약 돌아오면 신이 순찰사(巡察使) 김늑(金玏)과 접반사(接伴使) 서성(徐渻) 등을 거느리고 총병의 뜰에 서서 눈물로 청원할 계획입니다.

군량의 지공(支供)을 헤아려 보건대 본도는 곳곳이 탕패(蕩敗)되었고, 호남 제읍(諸邑)의 출참(出站)만으로는 지탁(支度)이 곤란한 실정이며, 전에 보내온 양곡도 거의 다 떨어져 가는데 근자에는 수송로마저 끊어졌습니다. 또 전라도 각 고을의 백성들은 그 도에 적변이 있다는 것을 듣고 놀라 도산(逃散)하고 있는데 금지시킬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지금 오 유격초계에 주둔해 있고 합천에는 유 총병(劉摠兵)이 있으며 거창에는 또 요장(遼將) 5인이 주둔하고 있고 대구(大丘)밀양(密陽) 직로(直路)의 각참(各站)에도 왕래하는 명병(明兵)이 있는데 많은 곳도 있고 적은 곳도 있습니다. 출참(出站)하는 여러 고을에서는 명병이 가는 곳마다 정신없이 뒤따라 가야 하기 때문에 사람도 지치고 말도 지쳐 쓰러져 기력이 다하였습니다. 만약 며칠 더 경과한다면 이미 수송해온 곡식은 다 떨어질 것인데 다시 곡식을 운송할 방법이 없으니, 천백 번 생각하고 계획해 보아도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달 7일에 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이 병으로 죽었으므로 조발(調發)할 중신(重臣)마저 없습니다.

일마다 이러하여 통민(痛憫)스럽기 그지없으니, 조정에서는 급히 호남·영남의 위급한 사세를 살펴 경략·제독(提督)의 아문(衙門)에 계속 간청하소서. 그렇게 한다면 비록 늦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구제할 가망이 있습니다. 그리고 군량을 조발할 관원도 급히 차송(差送)하소서."


  • 【태백산사고본】 23책 4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56면
  • 【분류】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都體察使柳成龍馳啓曰: "臣於本月初九日, 聞劉總兵陜川, 卽馳到。 總兵許與相見, 頗從容。 臣極陳倭奴譎詐, 以和議緩天兵, 使不得求晋州, 而實行呑噬之志。 今本道與湖南, 危在朝夕, 懇乞馳救。 總兵曰: ‘吾志不行, 無可言者。 似聞賊已向全羅。 若此道不能遮遏, 則患不可勝言。 吾欲提兵往救, 而此處亦無軍兵。 曾招住居昌遼將, 使之來守高靈陜川, 然後吾欲行軍, 而號令不行。 然若實知湖南被兵, 則當隨爾等所言而赴救。 須討一地圖, 詳載道路由經之路以來。’ 且言: ‘此處無一將官, 軍兵亦無一人, 何耶?’ 臣對 ‘諸將官, 初聚咸安, 退保各處, 而聞晋州之陷, 皆潰散, 向湖南以去。 曾已啓知國王, 必按律治罪, 但事勢危急如此, 望老爺亟速救濟。’ 總兵曰: ‘吾意亦然, 而不能自擅。 若體探全羅賊勢虛實, 則當卽進兵。’ 臣退, 畫地圖一件, 又爲稟帖以呈, 總兵見畢, 猶言諸將不行其令, 不得自便之狀, 縷縷不已, 而卽多發擺撥兒, 哨探宜寧之賊, 不無進戰之意, 故臣留在此處, 日日苦勸。 督捕使朴晋、助防將朴名賢、別將朴宗男, 只率疲兵五六百人, 同天將吳遊擊, 把截草溪, 而崔遠李薲李時言, 聞晋州之陷, 卽從居昌咸陽等處而去云。 都元帥權慄催促移文, 來此不得尋覓, 不知在於何地。 自晋州之陷, 人心洶駭, 遠近之民, 荷擔而立。 湖南聲息斷絶, 只見權慄移文朴晋處云: ‘倭賊已入求禮, 將向谷城南原。’ 以此觀之, 犯湖南, 似爲的然, 不勝痛憫。 此處之賊, 如宜寧歧江等地, 設柵屯守, 其數甚多, 日日散出, 焚掠於三嘉宜寧之境。 昨日距陜川四十里, 望軍傳告, 總兵披掛, 領軍將發, 而聞賊退去乃止。 今日, 宜寧體探未來。 若來, 則臣率巡察使金玏、接伴官徐渻等, 立庭泣請計料。 糧餉支供, 本道則處處蕩敗, 只以湖南諸邑出站, 艱難支度, 前來糧饌, 已爲垂盡, 近日則繼軍路絶。 又全羅各邑之民, 聞其道有賊變, 驚動逃散, 不能禁止。 今, 吳遊擊草溪, 陜川劉揔兵, 居昌又有將五員駐軍; 大丘密陽直路各站, 亦有往來天兵, 或多或少。 出站諸邑, 隨其所在, 顚倒追隨, 人困馬斃, 氣力都盡。 若過數日, 已輸之糧竭盡, 繼運之穀無路, 千思百計, 實無所出, 而戶曹判書李誠中, 又於本月初七日, 以病身死, 無調發重臣。 事事如此, 痛憫罔極。 朝廷急察兩湖危迫之勢, 連續致懇於經略、提督等衙門。 今雖已晩, 庶有可救之望, 而調糧之員, 亦急時差送。"


  • 【태백산사고본】 23책 4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56면
  • 【분류】
    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