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29일 함락된 진주성 싸움의 자세한 경과
당초에 적추(賊酋)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제추(諸酋)의 군대를 합치면 30만이라고 하였는데 어떤 자는 7∼8만 명이라고 하였다. 왜적이 수륙(水陸)으로 함께 나아가 진주를 공격하려 할 때 총병(總兵) 유정(劉綎)은 유격(遊擊) 오유충(吳惟忠)과 함께 대구(大丘)에 있고, 참장(參將) 낙상지(駱尙志)는 유격 송대빈(宋大斌)과 함께 남원(南原)에 있고, 유격 왕필적(王必迪)은 상주(尙州)에 있고, 유격 심유경(沈惟敬)은 평행장(平行長)의 영중(營中)에 있으면서 왜적과 강화(講和)하여 왕자를 돌아오게 하기를 도모하고 있었는데, 경략이 유경에게 이문(移文)하여 꾸짖기를,
"네가 왜적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 돌아가게 하고 왕자(王子)를 데리고 돌아오겠다고 말했었다. 그런데 아직까지 적이 주둔(駐屯)하여 노략질을 그치지 않으니, 너는 모름지기 다시 적의 진영으로 들어가 분명히 효유(曉諭)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병부(兵部)에 이자(移咨)하여 너의 죄를 끝까지 추궁하고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유경이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에게 전첩(傳帖)하기를,
"일본이 진주를 공격하는 것은 저들이 지난해에 이곳에서 매우 많이 피살되었고 또 선척(船隻)이 다 타거나 파손되었기 때문에 분한(忿恨)을 품고 있었는 데다가 귀국의 군사가 자주 풀을 베는 왜병을 죽였기 때문이다. 저들의 장령(將領)이 관백(關白)에게 문의하니, 관백이 말하기를 ‘너희들도 진주를 공격하여 성지(城池)를 격파해서 지난날의 원한을 풀라.’고 하였다. 행장(行長)이 본부(本府)를 보고 말하기를 ‘진주의 백성들로 하여금 공격의 예봉(銳鋒)을 피하게 하라. 공격하는 일본군도 성이 텅 비고 사람이 없는 것을 보면 즉시 철병(撤兵)하여 동쪽으로 돌아올 것이다.’고 하였다."
하였다. 유경이 적의 진영에서 돌아왔는데, 수행 통사(隨行通事) 이유열(李愉說)이 말하기를,
"청정이 진주 공격에 대한 의논을 강력히 주장하여 반드시 진주를 함락하고야 말겠다고 풍신수길(豐臣秀吉)에게 말하였다. 소서행장이 강력하게 저지하였으나 청정은 듣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번 행군(行軍)에 우희다수가(宇喜多秀家)·행장·삼성(三盛)·길계(吉繼) 등은 가지 않았다. 종의지(宗義智)는 당연히 가야 하는 대열에 있었으면서도 역시 가지 않았다. 행장이 양산(梁山)에서 유격을 전송할 적에 손을 잡고 이별하며 ‘내가 강력히 저지하였으나 청정이 돌이키지 않는다. 그러나 일본의 공격은 진주에서 끝날 것이니 결코 다른 근심은 없을 것이다.’고 하였다."
하였다. 김명원(金命元)과 순찰사 한효순(韓孝純)이 유경(惟敬)을 보고 말하기를,
"진양(晉陽)의 사태가 위급하니 힘을 다해 구원해 주기를 바란다."
하니, 유경이 말하기를,
"행장과 하루 동안 꼬박 이 문제를 간절하게 말했는데 행장의 생각도 나의 생각과 같았다. 그러나 저 청정의 기세가 대단하여 끝내 돌이키지 않으니 어쩌겠는가. 다른 방책은 없다. 진주에 있는 제장(諸將)들로 하여금 성을 비우고 잠시 동안 피하게 하는 방법밖에 없다. 나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찌하겠는가."
하였다. 이때 유 총병(劉總兵)이 청정에게 이서(移書)하기를,
"너희가 조선을 침범하여 우리의 속국(屬國)을 훼상(毁傷)시켜 병화(兵禍)가 계속되어 해마다 잠잠할 때가 없었다. 이에 우리 황상(皇上)께서 들으시고 혁연(赫然)히 진노(震怒)하시어 특별히 절월(節鉞)을 보내시고 호신(虎臣)272) 을 보내신 것은 너희들을 다 죽여 동해(東海)를 영원히 맑게 하시려는 생각에서였다. 근래 심유경(沈惟敬)이 일본 진영에 갔다가 돌아옴으로 인하여, 일본이 마침내 강화에 마음을 기울여 군대를 해체하고 성심으로 복종하여 맹약(盟約)하기를 청하고 조선(朝鮮) 땅에서 다 물러나서 무리를 이끌고 귀국(歸國)하기로 했다는 것을 면대(面對)해 들었다. 또 부산에서 소서비 탄수 구대부(小西飛彈守久大夫)를 보내어 천조(天朝)에 가서 명을 기다리게 한 일념(一念)이 지극히 정성스러워서 매우 가상(嘉尙)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천조(天朝)에서 보낸 수백만의 장병(將兵)이 모두 압록강(鴨綠江) 나루에 머물러 있고, 대장 제독(大將提督) 이 총병(李總兵)이 거느리고 서울에 주둔해 있는 2만의 군사와, 곽 총병(郭總兵)·진 총병(陳總兵)·이 총병(李總兵)이 거느리고 요동(遼東)에 주둔해 있는 2만의 군사와, 오 부장(吳副將)이 거느린 2만의 군사와 제장(諸將)들이 거느리고서 평양(平壤)·개성(開城) 등지에 분포(分布)해 있는 10만의 군사들이 모두 출동(出動)을 하지 않고 있다. 이는 혹시라도 한 번 교전(交戰)하였다가 화의(和議)의 약속을 저버려 당당한 우리 천조의 천지 같은 도량을 잃을까 두려워해서인데, 너희들은 아직까지 돌아갈 뜻을 결정하지 않고 다시 진주를 공격하여 앞서의 맹약을 저버리고서 지난날의 원한을 갚겠다고 했다. 조선 팔도의 지방이 이미 열에 일곱은 파괴되어 죄없이 화를 당한 남녀들의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고 잘린 목이 들판에 즐비하게 널렸으니 지극히 참혹하다 하겠는데, 다시 무슨 원수를 갚겠다는 것인가. 더구나 진주는 작은 지역인데 무엇 때문에 조그마한 혐의를 개의(介意)하여 대국(大國)에게 신의를 잃으려 하는가.
지금이라도 생각을 바꾸어 속히 철병(撤兵)하여 동쪽으로 돌아간다면 우리도 군사를 출동시켜 너희들에게 가해(加害)하여 너희 나라에 신의를 잃지 않고 너희들로 하여금 칼날을 만나지 않고 살아서 바다를 건너 돌아가게 하겠다. 만약 깨닫지 못하고 고집을 부려 병란(兵亂)이 점점 심해지면 우리는 반드시 오미복선(烏尾福船)·누선(樓船)·백조(栢艚)·용조(龍艚)·사선(沙船)·창선(艙船)·동발(銅鈸)·소소(小艄)·해도(海舠)·팔라호선(叭喇唬船)·팔장선(八奬船) 등을 조발(調發)하여 수군(水軍) 백만을 싣고 멀리 해안(海岸)을 차단하여 너희들의 돌아갈 길을 막고 군량 수송로를 끊을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결전(決戰)도 하기 전에 너희들은 도서(島嶼)에서 자멸(自滅)하여 한 사람도 살아서 돌아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관백(關白)이 원래 너와 동급(同級)인데 너희들은 저 관백에게 농락되어 다만 지시만을 따른다. 관백도 이미 천조(天朝)를 사모하여 조공(朝貢)을 바치기로 하였는데 너희들은 어찌하여 진주를 포위하고 공격하는가. 오늘의 진퇴(進退)하는 사이에 이해(利害)의 관계됨이 작지 않으니 깊이 생각하고 자세히 살펴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는데, 적은 듣지 않았다.
이때 변보(邊報)가 매우 위급하자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이 군사 3백 명을 거느리고서 6월 24일 진주로 달려 들어갔고, 충청 병사 황진(黃進)이 7백 명, 경상 우병사 최경회(崔慶會)가 5백 명, 의병 복수장(義兵復讎將) 고종후(高從厚)가 4백 명, 부장(副將) 장윤(張潤)이 3백 명, 의병장 이계련(李繼璉)이 1백여 명, 의병장 변사정(邊士禎)의 부장이 3백 명, 의병장 민여운(閔汝雲)이 2백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서 이미 먼저 와서 본부 목사(本府牧使) 서예원(徐禮元)과 김준민(金浚民)·이종인(李宗仁) 등과 수성(守城)을 의논하고 있었다.
7월 19일에 전라 병사 선거이(宣居怡)와 홍계남(洪季男)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사태를 보고는, 적은 많고 우리는 적으니 물러가서 내면(內面)을 지키는 것이 낫다고 하자, 김천일이 강력히 저지하였으나 거이와 계남 등은 성을 나가 운봉(雲峰)에 진을 쳤다. 21일에 적 2백여 기(騎)가 동북 산상(山上)에 출몰(出沒)하였고, 22일 진시(辰時)에 적 5백여 기가 북산(北山)에 올라 열진(列陣)하고서 병위(兵威)를 과시하였으나, 성 안에서 출동하지 않자 사시(巳時)에는 적의 대부대(大部隊)가 뒤이어 와서 2기(起)로 나누어 1기는 개경원(開慶院)의 산 허리에 진을 치고, 1기는 향교(鄕校) 앞길에 진을 쳤다. 처음으로 교전(交戰)할 때 성 안에서 왜적 30명을 쏘아 맞히니 적이 군대를 거두어 물러갔다. 초저녁에 다시 진격해 와서 한참 동안 크게 싸우다가 2경에 물러갔고 3경에 다시 진격해 와서 5경이 되어서야 물러갔다.
이보다 앞서 성 안에서는 적이 오려 한다는 것을 듣고서, 성남(城南)은 촉석(矗石)과 남강(南江)이 매우 위험하므로 적이 감히 범하지 못할 것이니 서북에 호(壕)를 파야 한다고 여겨 해자를 파서 그 곳에 물을 담아 두었으므로 적이 공격할 수 있는 곳은 동편뿐이었다. 그런데 이 때에 적이 그 해자를 파내어 물을 빼고서 다 마른 뒤에 흙을 운반해다가 해자를 메워 큰 길을 만들었다.
23일 낮에 세 차례 공격해 온 것을 세 번 물리쳤고 밤에 또 네 차례 공격해 온 것을 네 번 물리쳤는데, 적이 밤을 이용하여 일시에 크게 고함을 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성 안에서 어지럽게 쏘아대니 맞아 죽은 적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24일에 적의 증원군(增援軍) 5∼6천 명이 와서 마현(馬峴)에 진을 치고 또 5∼6백 명의 증원군이 와서 동편에 진을 쳤다. 25일에 적이 동문 밖에 흙을 메워 언덕을 만들고 그 위에 토옥(土屋)을 세워 성 안을 내려다 보고서 탄환을 비처럼 퍼부었다. 그러자 충청 병사 황진도 성 안에 높은 언덕을 쌓았는데 초저녁부터 밤중까지 황진이 전복(戰服)과 전립(戰笠)을 다 벗고 몸소 돌을 짊어지고 나르니 성 안의 남녀들이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며 힘을 다해 축조(築造)를 도왔으므로 하룻밤 사이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현자 총통(玄字銃筒)을 쏘아 적굴(賊窟)273) 을 파괴하였으나 적은 즉시 개수(改修)하였다. 이날 세 차례 진격해 온 것을 세 차례 다 물리쳤고 또 밤에 네 번 접전하여 네 번 다 격퇴하였다.
26일에 적이 나무로 궤짝을 만들어 생가죽을 씌워 각자 그 궤짝을 가지고 탄환과 화살을 막으면서 와서 성을 헐므로 성 안에서 큰 돌을 밑으로 떨어뜨리고 화살을 빗발처럼 쏘아대니 적이 물러갔다. 적이 또 동문(東門) 밖에 큰 나무 두 개를 세워 그 위에 판옥(板屋)을 만들어 놓고는 그 위에서 많은 화전(火箭)을 성 안으로 쏘아대니 성 안의 초가집이 일시에 연달아 불에 타서 연기와 불꽃이 하늘까지 뻗쳐올랐다. 목사(牧使) 서예원(徐禮元)이 겁을 먹고서 당황하니, 김천일(金千鎰)이 의병 부장(義兵副將) 장윤(張潤)을 가목사(假牧使)274) 로 삼았다. 이때 날씨가 크게 궂어 궁시(弓矢)가 모두 느슨하게 풀리고 병력도 매우 지쳤다. 적이 ‘대국(大國)의 군대도 항복하였는데 너희 나라가 어찌 감히 항거하는가.’ 하는 내용의 글을 성 안으로 쏘아 보내왔다. 성 안에서도 ‘우리 나라는 죽음으로 싸울 뿐이다. 더구나 명군(明軍) 30만이 지금 너희들을 추격하여 남김없이 섬멸하려는 데 있어서이겠는가.’ 하는 내용의 글로 답하니, 적이 이 글을 보고서 옷을 걷고 볼기를 두드리며 말하기를 ‘당장(唐將)은 이미 다 물러갔다.’ 하였다. 이날 낮에 세 번 싸움을 하여 세 번 다 물리쳤으며, 밤에 또 네 번 싸워 네 번 다 물리쳤다.
27일에 적이 동문과 서문 밖 다섯 군데에 언덕을 축조(築造)하고 그 위에 대나무를 엮고 붕(棚)275) 을 만들어 놓고서 성 안을 내려다 보고 탄환을 쏘아대니 성 안에 죽은 자가 3백여 명이나 되었다. 또 큰 궤짝으로 사륜거(四輪車)를 만들어 적 수십 명이 각각 철갑(鐵甲)을 입고 궤를 옹위(擁衛)하고 나와서 철추(鐵錐)로 성을 뚫으려 했다. 이때 김해 부사(金海府使) 이종인(李宗仁)의 힘이 군중(軍中)에서 으뜸이었는데 종인이 연거푸 5명의 적을 죽이니 나머지 적이 모두 도주하였다. 성 안의 사람들도 기름을 부은 횃불을 계속 던지니 왜적들이 다 타 죽었다. 초저녁에 적이 다시 신북문(新北門)으로 침범해 왔는데 종인이 그 수하(手下)와 더불어 힘을 다해 싸워서 많은 적을 죽이자 적이 물러갔다.
28일 여명(黎明)에 종인이 지키던 성비(城陴)로 돌아가 보니 전날 밤에 서예원(徐禮元)이 야간 경비(夜間警備)를 소홀하게 하여 적이 몰래 와서 성을 뚫었으므로 성이 무너지려 하였다. 종인이 크게 노하여 서예원을 꾸짖었다. 적이 성 밑까지 바싹 다가 왔는데 성 안 사람들이 모두 죽을 각오로 힘을 다해 싸웠으므로 죽은 적이 매우 많았으며, 그 중에 적추(賊酋) 하나가 탄환을 맞고 죽자 뭇 적이 그 시체를 끌고 물러갔다. 황진이 성 안을 굽어보며 ‘오늘 싸움에서 죽은 적이 1천여 명은 충분히 될 것이다.’고 말하고 있는데, 성밑에 잠복하고 있던 적이 위로 대고 철환(鐵丸)을 쏘았다. 그 철환이 목판(木板)에 비껴 맞고 퉁겨나와서 황진의 왼쪽 이마에 맞았다. 이때 황진과 장윤(張潤)의 역전(力戰)이 제장(諸將) 중에서 으뜸이라고 칭해졌기 때문에 온 성 안이 그에 의지하여 중히 여겼으므로 황진이 탄환을 맞고 죽자 【혹자는 황진이 탄환을 맞았으나 죽지 않았고 성이 함몰(陷沒)될 때 피살되었다고 하였다. 】 온 성안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였다.
29일에 서예원으로 황진을 대신하여 순성장(巡城將)을 삼았는데, 예원은 겁을 먹고 전립(戰笠)도 벗은 채 말을 타고서 눈물을 흘리며 순행하니, 병사 최경회(崔慶會)가 예원이 군정(軍情)을 경동(驚動)시킨다고 하여 참(斬)하려 하다가 그만두고서 장윤으로 대신 순성장을 삼았으나 얼마 되지 않아서 장윤도 탄환에 맞아 죽었다. 미시(未時)에 비로 인하여 동문쪽의 성이 무너져서 적이 개미떼처럼 붙어 올라오자 종인이 수하(手下)의 병사들과 더불어 궁시(弓矢)는 놓아두고 창과 칼을 들고서 상대해 육박전을 하여 쳐죽인 적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이니 적이 물러갔다. 또 서북문에서 적이 고함을 치며 돌진해 오자 창의사의 군사가 궤산(潰散)276) 하여 모두 촉석루(矗石樓)로 모였다. 적이 성으로 올라와서 칼을 휘두르며 날뛰자 서예원이 먼저 달아나니 제군(諸軍)이 일시에 궤산되고 종인도 탄환을 맞아 죽었다.
좌우가 김천일을 부축해 일으켜서 피하기를 권하였으나, 천일은 꼼짝도 하지 않고 앉아서 좌우를 돌아보며 ‘나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하고, 마침내 아들 김상건(金象乾)과 더불어 서로 끌어안고서 강으로 몸을 던져 죽었다.
적이 본성(本城)을 무찔러 평지(平地)를 만들었는데 성 안에 죽은 자가 6만여 인이었다. 【어떤 이는 8만여 인이라 하고, 또 어떤 이는 3만여 인이라고 한다. 뒤에 감사 김늑(金玏)이 사근 찰방(沙斤察訪) 이정(李瀞)을 시켜 조사하게 하였는데 성 안에 쌓인 시체가 1천여 구(軀)이고, 촉석루에서 남강(南江)의 북안(北岸)까지 쌓인 시체가 서로 겹쳤으며, 청천강(菁川江)에서부터 옥봉리(玉峯里)·천오리(遷五里)까지 죽은 시체가 강 가득히 떠내려갔다. 】 성이 함락된 뒤 적은 군대를 몇 기(起)로 나누어 1기는 단성(丹城)·산음(山陰)을 향해 출발하여 지리산(智異山)으로 들어가고, 1기는 바로 본주(本州) 서면(西面)으로 나아가서 지리산으로 간 적과 합세하여 구례(求禮)·광양(光陽)·남원(南原)·순천(順天) 등지로 흩어져 들어가서 마을을 노략질하였다.
이때 낙 참장(駱參將)은 남원에 있으면서 성지(城池)를 수축(修築)하여 죽음으로 지킬 계획을 하고, 포수(砲手) 3백 명을 파견하여 취성(鷲城)에 진을 친 다음 영상(嶺上)에 기치(旗幟)를 많이 벌여 놓고서 불을 들어 호응하게 하였다. 홍계남(洪季男)이 군사를 거느리고 영(嶺)을 내려가다가 적의 선봉(先鋒)을 만나 길에서 적을 공격하여 수십 리를 가며 싸우다가 구례(求禮)·광양(光陽)에 이르러 오랫동안 크게 싸우니 적이 물러갔다. 1기는 사천(泗川)·고성(固城)으로 향해 가서 분탕질을 했고, 1기는 삼가(三嘉)·의령(宜寧)으로 향해 가서 공사(公私)의 가옥(家屋)을 불태우고 돌아와서 함안(咸安)·창원(昌原) 등지에 주둔하였으며, 1기는 포로로 잡은 남녀와 복물(卜物)을 싣고 김해(金海)를 향해 돌아갔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40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39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 [註 272]호신(虎臣) : 무신(武臣).
- [註 273]
적굴(賊窟) : 언덕 위에 세운 토옥.- [註 274]
○初, 賊酋淸正, 合諸酋兵, 聲言三十餘萬, 或云七、八萬, 水陸俱進, 將犯晋州時, 劉揔兵 綎與吳遊擊 惟忠在大丘, 駱參將 尙志與宋遊擊 大斌在南原, 王遊擊 必迪在尙州。 沈遊擊 惟敬, 方在平行長營中, 與賊講和, 圖脫王子。 宋經略移文惟敬責之曰: "爾旣以令倭下海, 取歸王子, 而賊猶屯駐, 搶掠不已。 爾須還入賊營, 分明曉諭。 不然, 我將移咨兵部, 重究不恕。" 惟敬傳帖於都元帥金命元曰: "日本攻打晋州之事, 彼因去歲, 於此被殺甚多, 且船隻盡爲燒毁, 是以忿恨不平。 況貴國兵, 累殺日本削草之倭, 彼將領問之關白。 關白曰: ‘爾等亦可進攻晋州, 打破城池, 以洩(盡)〔舊〕 怨。’ 行長見本府言: ‘令晋州之民, 可避其鋒。 彼見城空人盡, 卽撤東回而已。’ 惟敬還自賊營, 隨行通事李愉說稱淸正力主此議, 言于秀吉, 期於必陷晋州而後已。 行長力止之不聽, 故是行也, 秀家、行長、三盛、吉繼等不往, 獨義智在應往之中, 亦止不行。 行長送遊擊于梁山, 把手爲別曰: ‘我力止, 淸正獨不回。 然止於晋州而已, 保無他憂也。’" 金命元與巡察韓孝純見(惟忠)〔惟敬〕 曰: "晋陽事急, 願盡力救之。" 惟敬曰: "與行長終日終夜懇懇言之。 行長之意亦然。 然其勢已盛, 終不回奈何? 無他策, 欲令晋州諸將, 空城少避, 不從吾言奈何?" 時劉揔兵移書淸正曰:"日本侵犯朝鮮, 毁我屬國, 兵連禍結, 比歲無休。 皇上聞之, 赫然震怒, 特送節鉞, 分遣虎臣, 意圖盡戮長鯨, 永淸東海。 邇因沈惟敬往回, 面講日本, 遂能傾心解甲, 納款乞盟, 盡行退還朝鮮地方, 引類歸國, 又從釜山, 遣小西飛彈守, 久大夫, 叩款天朝俟命, 一念至誠, 深可嘉賞。 故天朝所遣數百萬兵將, 盡止鴨綠江頭, 大將提督李總兵, 二萬駐王京, 郭揔兵、陳總兵、李總兵, 領兵二十萬駐遼東, 吳副將領兵二萬, 與諸將分布平壤、開城者, 十萬有餘, 俱按兵不動。 恐一與交鋒, 便爽約議, 失我堂堂天朝覆載度量, 不意汝等, 歸志不決, 復攻晋州, 頓背前盟, 云洩舊忿。 夫朝鮮八道地方, 已破其七, 士女橫罹(茶)〔荼〕 毒者, 枕骸遍野, 懸首楹杆, 亦云慘極, 更復何讎? 矧晋州黑子之區, 何必以少嫌介意, 而甘失大信於中國哉? 及今尙當易慮改心, 速速撤兵東返, 則我輩必不擧兵相加, 失信外國, 務令汝等, 不遭鋒鏑, 航海生還, 若復執迷, 兵難遂寢, 必發烏尾福船、樓船、栢艚、龍艚、沙船、艙船、銅鈸、小艄、海舠、叭喇(虎)〔唬〕 、八奬等船, 裝載水軍百萬, 邀截海涯, 斷汝歸路, 絶汝糧餉, 不待決戰, 爾將自斃島嶼, 片甲不返還矣。 且關白與汝(厚)〔原〕 是比肩, 爾等被彼牢籠, 但聽驅使, 關白旣慕天朝而納貢, 汝等何向晋州而攻圍? 今日進退之間, 利害所關非細, 三思自審, 免悔噬臍" 賊猶不聽。 時, 邊報甚急, 倡義使金千鎰領兵三百, 以六月二十四日, 馳入晋州, 忠淸兵使黃進領兵七百, 慶尙右兵使崔慶會領兵五百, 義兵復讎將高從厚領兵四百, 副將張潤領兵三百, 義兵將李繼璉領兵百餘, 義兵將(邊士禎)〔邊士貞〕 遣其副將領兵三百, 義兵將閔汝雲領兵二百, 先已來會, 與本州牧使徐禮元及(金浚民)〔金俊民〕 、李完仁等, 方議守城。 七月十九日, 全羅兵使宣居怡及洪季男等, 領兵來會以爲, 賊衆我寡, 不如退守內面, 金千鎰抗言止之, 居怡、季男等, 出陣于雲峯。 二十一日, 賊二百餘騎, 出沒於東北山上。 二十二日辰時, 賊五百餘騎, 登北山列陣耀兵, 城中按兵不動。 巳時, 大衆繼至, 分爲二起, 一起陣於開慶院山腰, 一起陣於鄕校前路。 初一交戰, 城中射中三十餘人, 賊斂兵而退。 初昏更進, 大戰良久, 至二更退。 三更更進, 五更始退。 先是城中, 聞賊將至, 以爲城南矗石 南江最險絶, 賊必不敢犯, 惟西北可以鑿壕, 遂鑿爲壕潢, 儲水其下, 只有東邊爲受敵之地。 至是賊鑿決其壕, 待其乾涸, 負土塡塞, 作爲大路。 二十三日, 三戰三退, 其夜又四戰四退。 賊乘夜, 一時大呼, 聲振天地, 城中亂射, 死者不記其數。 二十四日, 賊五六千, 添兵而來, 陣於馬峴, 又有五六百添兵, 陣於東邊。 二十五日, 賊於東門外, 塡土爲陵, 因作土屋, 俯視城中, 放丸如雨。 忠淸兵使黃進, 亦於城內, 對築高陵。 自昏達夜, 進盡脫衣笠, 親自負石, 城中男女, 感激涕泣, 竭力助築, 一夜而畢。 於是放玄字銃筒, 中破賊窟, 賊卽(改)〔散〕 。 是日, 三進三退, 又四戰四退。 二十六日, 賊作木櫃, 裹以生皮, 各自負戴以防丸矢, 來毁城子, 城中以大石滾下, 射矢如雨, 賊乃退。 賊又建二大木於東門外, 上設板屋, 多放火於城內, 城內草屋, 一時延爇, 烟焰漲天。 牧使徐禮元, 畏㤼顚倒, 金千鎰以義兵副將張潤爲假牧使。 時天大雨, 弓矢皆解, 兵力已困。 賊以書投城中曰: "大國之兵, 亦且投降。 爾國敢爲抗拒乎?" 城中以書答之曰: "我國死戰而已。 況天兵三十萬, 今方追擊汝等, 盡勦無遺。" 賊褰臀扣之曰: "唐將已盡退矣。" 是日三戰三退, 其夜又四戰四退。 二十七日, 賊築五阜於東、西兩門之外, 結竹爲棚, 俯臨城中, 放丸如雨, 城中死者三百餘名。 又作大櫃爲四輪車, 賊數十人, 各穿鐵甲, 擁櫃而進, 以鐵錐鑿城。 時, 金海府使李宗仁, 膂力冠于軍中, 宗仁連殪五賊, 餘皆遁走。 城中之人, 束火灌油而投之, 倭因皆燒死。 初更, 賊更犯新北門, 宗仁與其手下, 力戰殺退。 二十八日黎明, 宗仁還到所守城陴, 則其夜徐禮元, 不謹警夜, 賊潛來鑿城, 城子將頹, 宗仁大怒責之。 賊進迫城下, 城中殊死力戰, 賊死者甚衆。 賊酋一人, 中丸而死, 群賊曳尸而去。 黃進俯視城中曰: "今日之戰, 賊死者多至千餘。" 有一賊潛伏城下, 仰放鐵丸, 橫中木板, 跳擲而中進左額。 時黃進、張潤最稱力戰, 爲諸將首, 一城倚以爲重, 進中丸而死, 【或云進中丸不死, 陷沒時被殺云。】 城中洶懼。 二十九日, 以徐禮元代進爲巡城將。 禮元畏怯, 脫笠騎馬, 涕泣而行。 兵使崔慶會, 以禮元驚動軍情, 將斬而止, 以張潤代將, 未幾, 潤亦中丸而死。 未時, 東門城子, 因雨頹落, 衆賊蟻附以上, 宗仁與其親兵, 捨其弓矢, 直用槍刀, 相對摶戰格殺, 死者積堆如山, 賊仍以退去。 又於西北門, 高聲突進, 倡義使軍潰散, 皆聚於矗石樓。 賊乃登城, 揮劍踴躍, 徐禮元先走, 諸軍一時潰散, 宗仁中丸而死。 左右扶起千鎰, 勸使退避, 千鎰堅坐不起, 顧曰: ‘我當死於此’, 遂與其子象乾, 相抱投江而死。 賊屠夷本城, 作爲平地。 城中死者六萬餘人。 【或云八萬餘人, 或云三萬。 後, 監司金玏, 令沙斤察訪李瀞驗視, 則城中積屍千餘, 自矗石樓, 至南江北岸, 積屍相枕。 自菁川江, 至玉峯、遷五里, 死者塞江而下。】 城旣陷, 賊分數起, 一起向丹城、山陰, 一轉入智異山; 一起直出本州西面, 與智異山賊合勢, 散入求禮、光陽、南原、順天, 搶掠閭里。 時, 駱參將在南原, 修治城池, 以爲死守之計, 泒送砲手三百名, 陣于鷲城嶺上, 多張旗幟, 擧火爲應。 洪季男領兵下嶺, 遇賊前鋒, 要擊於路, 轉鬪數十里, 至於求禮、光陽, 大戰良久, 賊因以退去。 一起向泗川、固城焚掠; 一起向三嘉、宜寧, 焚燒公私閭家, 還屯咸安、昌原等地; 一起裝載被擄男女、卜物, 還向金海。
- 【태백산사고본】 22책 40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39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외교-왜(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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