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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40권, 선조 26년 7월 16일 무진 3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비변 당상들과 진주 방어, 주청사 파견, 환도, 채은, 포상 등을 의논하다

상이 비변 당상(備邊堂上)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윤두수(尹斗壽), 좌찬성(左贊成) 정탁(鄭琢), 이조 참판 구사맹(具思孟), 병조 참판 심충겸(沈忠謙), 창산군(昌山君) 성수익(成壽益), 동부승지(同副承旨) 장운익(張雲翼), 직제학(直提學) 백유함(白惟咸), 지평(持平) 유몽인(柳夢寅), 정언(正言) 조존성(趙存性), 주서(注書) 남이신(南以信), 검열(檢閱) 김상준(金尙寯)·심흔(沈忻)이다. 】 상이 이르기를,

"진주가 이처럼 위급하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진주는 성지(城池)가 견고하여 적이 비록 쉽게 들어갈 수는 없으나, 만약 오랫동안 포위하여 양식이 떨어진다면 성중 사람들은 저절로 죽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참판의 말이 옳다. 성이 견고하여 적이 들어가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오랫동안 성을 포위한다면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왜적은 우리 나라 군사로서는 물리칠 수 없으니, 반드시 중국 군사와 협력하여 구원한 뒤에야 보전(保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성안의 사람들이 저절로 말라 죽을 것인데, 어떻게 해야 명장(明將)의 협력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중국 군대가 머뭇거리고 진병(進兵)하지 않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심유경(沈惟敬)의 화의(和議)를 믿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경략과 뜻이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근일 자주 품첩을 올렸으나 명장은 보통으로 여겨 전혀 마음을 쓰지 않고 있으니, 반드시 명장의 마음을 감동시킨 뒤에야 일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일의 주본(奏本)에 대한 일은 나의 생각에 매우 염려되었기 때문에 경략에게 품(稟)하지 말고 길을 서둘러 가게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경략이 품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부당하게 여기는 생각을 갖는다면 매우 곤란하다. 우리 나라의 존망이 모두 경략에게 달렸으니, 경략의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황진(黃璡)으로 하여금 주본의 초고(草稿)만을 경략 아문(經略衙門)에 보여주어 먼저 그의 뜻을 탐지한 뒤에 가게 하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하고, 충겸이 아뢰기를,

"경략이 주본을 보면 반드시 추환(追還)할 염려가 있으니 한 번 품문(稟問)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먼저 탐지하자는 좌상(左相)의 말이 옳다."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경략이 반드시 노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주가 포위된 지 오래여서 성 안의 사졸들이 도망해 나올 수 있는 길이 없을 것이다. 성을 지키는 일은 할 수 있을 듯하지만, 성 안에 마초(馬草)가 이미 다 떨어졌을 것이니 전마(戰馬)가 다 죽었을까 염려된다. 비봉산(飛鳳山)은 전에 곽재우(郭再祐)가 진을 쳤던 곳인데 지금은 모두 적진(賊陣)이 되었다. 진주성이 포위된 지 10여 일이 되었는데 필시 성 안의 장사(將士)와 밖에 있는 장관(將官)이 서로 통신하는 일이 있었을 것인데도, 지금은 납서(蠟書)로 은밀히 통한 일을 들을 수 없으니 답답하다."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진주의 포위를 풀려면 반드시 제독이 평양을 공격하던 기세로 한 뒤에야 가능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주성의 형세를 찬성은 본 적이 있는가?"

하니, 이 아뢰기를,

"신이 소시적에 잠시 보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촉석(矗石)대정(大定)의 청천강(淸川江)과 같던가?"

하니, 이 아뢰기를,

"촉석의 물이 성 밑으로 돌아 흐르고 있으니 양곡이 있으면 지킬 수 있지만, 만약 양곡이 없는데 오랫동안 적의 공격을 받는다면 저절로 고사(枯死)할 것입니다."

하였다. 충겸이 아뢰기를,

"소신이 매양 계달(啓達)하고자 하였으나 황공하여 미처 계달하지 못했습니다. 오늘의 일은 제독의 마음을 감동시켜야 도모할 수가 있습니다. 전에 듣건대 제독이 상의 수서(手書)를 보고 싶어했다고 하니, 상께서 친히 한 통의 수찰(手札)을 쓰시어 종친(宗親)이나 중관(中官)을 보내어 애절한 말로 간곡히 말한다면 제독이 반드시 생각을 바꾸어 깨닫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이 아뢰기를,

"임금의 도리는 대체(大體)를 보존하기를 힘쓰는 것인데 무엇 때문에 꼭 수서를 보내야 합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좌상의 생각은 어떠한가? 제독이 군사를 일으키고자 한다면 어찌 나의 수찰을 기다린 뒤에야 일으키겠는가."

하니, 장운익이 아뢰기를,

"소신의 생각도 심충겸의 생각과 같습니다."

하자, 이 아뢰기를,

"이는 제왕(帝王)의 대체가 아닙니다."

하였다. 충겸이 다시 아뢰기를,

"정탁의 말이 매우 잘못입니다. 옛날의 광평왕(廣平王) 숙(俶)은 회흘(回紇)의 말 앞에서 절하고 빌었으니270) , 종사(宗社)에 관계된 일이라면 체모(體貌)가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개 중국이 이적(夷狄)과 강화(講和)한 적이 대대로 간혹 있었는데 지금 또 심유경의 유세(遊說)하는 말을 듣고 화의(和議)를 성사시키고자 한다. 그리고 명군(明軍)이 비록 3∼4만이 있다 하더라도 적세(賊勢)와 상대가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에 들어와서 오래 주둔하였으므로 모두 지친 군대들인데 10만의 왜적을 어찌 당해낼 수가 있겠는가. 반드시 옛날의 악비(岳飛)271) 처럼 한 뒤에야 이 적을 당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명장(明將)을 보건대 모두 특이(特異)한 사람들이 아니니, 아마도 불리하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일부러 머뭇거리는 것인 듯하다."

하였다. 몽인이 아뢰기를,

"서울로 진주(進駐)하시는 것은 하루가 급합니다. 근자에 장마로 인하여 이곳에 머무시자, 서울 사람들은 어가(御駕)가 환도(還都)하기를 가뭄에 비를 기다리듯이 하고 있습니다."

하자, 존성(存性)이 아뢰기를,

"서울로 진주하실 일에 대해서는 전에 이미 계달하였습니다. 소신이 해주(海州)를 왕래할 때 풍문(風聞)에 듣자니, 어린 왕자(王子)를 모신 무리들이 남의 의복(衣服)을 빼앗거나 인마(人馬)를 조발(調發)하는 일이 매우 많아 이 때문에 민원(民怨)이 더욱 깊어간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급선무는 인심을 수습하는 것으로 으뜸을 삼아야 하는데 상께서는 다만 기계(器械)를 수리(修理)하라고 말씀하실 뿐, 백성을 사랑하시는 측은한 교서(敎書)가 없으셨고 재열(宰列)들도 경계의 말씀을 올리지 않았습니다. 옛날 요순(堯舜) 같은 성인에게도 진계(進戒)하는 말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말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몽인이 아뢰기를,

"은(銀)을 캐는 일이 매우 좋은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중국에서 은을 캐러온 사람을 거느린 통사(通事)들이 민간(民間)에 폐를 끼치고 있는데도, 감채관(監採官)들은 모두 비미(卑微)한 자들이어서 더욱 소요만 일으키니, 감채관과 역관(譯官)을 치죄하여 작폐(作弊)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일은 마치 중병(重病)을 앓고 있는 사람이 겨우 목숨만 붙어 있는 것과 같으니, 다른 일에는 정신을 쓸 겨를이 없고 먼저 급한 병부터 치료해야 한다. 우리 나라는 군량(軍糧)만 고갈된 것이 아니라 병력(兵力)도 부족한 실정이다. 비록 군사를 뽑아 모은다고 해도 모두 지친 군사들 뿐이니, 하삼도(下三道)에 과거(科擧)를 보이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혹자는 자주 과거를 보이면 군액(軍額)이 감축(減縮)되니 폐단만 있고 이익은 없다고 하는데, 이 말이 사실이다. 그러나 옛날에 별시위(別侍衛) 제도가 있었으니 과거에 급제(及第)한 사람들을 모두 별시위에 충원(充員)한다면 어찌 군액이 감축되는 폐단이 있겠는가. 또 이러한 때에 상규(常規)에 얽매여서야 되겠는가. 나의 생각에는 하삼도에 초시(初試)를 보여 각도마다 1천 명을 정하고 적의 수급(首級) 하나를 벤 자에게 급제(及第)를 허락하게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혹자는 왜적을 보지도 못한 자가 왜적의 머리를 사가지고 바칠 것이라고 하지만, 비록 왜적의 머리를 사다가 바치더라도 적 하나를 제거하는 것이어서 국가에 이익이 있는 것이니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하니, 존성이 아뢰기를,

"전일 과거에서 뽑혀 전지(戰地)로 나아간 사람들이 중로(中路)에서 남의 재물을 강탈하여 마치 왜적이 지나간 곳 같았으므로 백성들이 고통을 견딜 수 없었으며, 수원(水原)에서는 사창(社倉)을 부수고 관곡(官穀)을 훔쳐 가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통솔하는 사람이 없었는가?"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통솔하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군율(軍律)이 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소신이 근일 군공(軍功)이 있는 사람을 초록(抄錄)하였더니 모두 2천 7∼8백 명이었습니다. 어쩌다 그 사람됨을 보면 모두 용맹하고 건장한 군졸들이었습니다. 이들을 후대하여 성공하도록 권면하다면 반드시 상승군(常勝軍)이 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어떻게 하여야 후대함이 되는가?"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전지로 나아가는 사람에게 궁시(弓矢)를 내리기도 하고 혹은 그 가족을 구휼(救恤)하는 것이 바로 후대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매우 좋다."

하였다. 충겸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먼저 보낸 사람들에게는 청포(靑布) 1필씩을 주기도 하고 혹은 마필(馬匹)을 주어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주를 어찌하면 되겠는가?"

하니, 충겸이 아뢰기를,

"지금의 형세로는 제독과 경략의 마음을 감동시켜 우리 군사와 협력하여 도모하게 하는 이외에는 다른 방책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의 기세가 대단하여 생사도 불고하고 선발대(先發隊)가 쳐들어오면 후속 부대(後屬部隊)가 계속 밀고 들어올 것인데 그러면 전진(前進)만을 알고 후퇴라고는 없는 이 적을 누가 당해낼 수 있겠는가."

하니, 존성이 아뢰기를,

"전에 김대정(金大鼎)의 말을 듣건대, 적이 성(城)에 오를 수 있는 힘은 있지만 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기구(器具)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운익충겸에게 지도를 보여주며 이르기를,

"울산(蔚山)양산(梁山)에는 이미 적이 퇴각하였다고 하니, 이곳에서 진격해 나아간다면 도모할 수 있겠으나 누가 그 일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40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38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 / 군사-전쟁(戰爭) / 군사-군정(軍政)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광업-광산(鑛山) / 인사-선발(選拔)

  • [註 270]
    광평왕(廣平王)숙(俶)은 회흘(回紇)의 말 앞에서 절하고 빌었으니 : 안녹산(安祿山)의 난리 때에 회흘(回紇)이 당(唐)을 구원하러 오자 당시 황제인 숙종(肅宗)은 광평왕(廣平王:뒤에 대종〈代宗〉이 됨)으로 하여금 회흘의 섭호(葉護)와 형제의 의를 맺게 하였는데, 아마도 이 일을 말한 것인 듯하다. 말 앞에서 절하고 빈 사실은 상고할 수 없다. 《당서(唐書)》 회흘전(回紇傳).
  • [註 271]
    악비(岳飛) : 송 고종(宋高宗) 때의 명장(名將) 악비는 금군(金軍)이 쳐들어오자 자신의 안위는 생각지 않고 오직 국가만을 위하여 적은 군사로써 많은 금군을 무찌른 것을 말함. 《송사(宋史)》 권365 악비전(岳飛傳).

○上引見備邊堂上。 【左議政尹斗壽、左贊成鄭琢、吏曹參判具思益、兵曹參判沈忠謙、昌山君 成壽益、同副承旨張雲翼、直提學白惟咸、持平柳夢寅、正言趙存性、注書南以信、檢閱金尙雋、沈忻。】 上曰: "晋州如是危急, 何以爲之?" 忠謙曰: "晋州城池堅固, 賊雖不得易入, 若外圍糧盡, 則城中之人, 自爾就盡矣。" 上曰: "參判言是矣。 堅城之下, 雖不得入, 外圍則無奈何。 此非我國之兵所能却退, 必與天兵協力救之, 然後似可保全。 不然則城中自爾枯死。 何以則可得天將之協力乎?" 忠謙曰: "天兵遲留不進之意, 有二端。 信聽沈惟敬之和議, 且與經略不協。 近日雖稟帖頻數, 天將視爲尋常, 不爲動念。 必使天將, 感動其心, 然後事可成矣。" 上曰: "前日奏本之事, 予意甚悶, 故不稟於經略, 使之兼程進去。 若經略以不稟之故, 有未穩之意, 則甚不可矣。 我國存亡, 皆係於經略, 不可失經略之意也。" 斗壽曰: "令黃璡, 只示奏本草於經略衙門, 先探其意後, 進去爲當。" 忠謙曰: "經略見奏本, 必有追還之患矣。 一番稟問可矣。" 上曰: "左相先探之言可也。" 忠謙曰: "經略必怒矣。" 上曰: "晋州被圍已久, 城中士卒, 固無逃出之路。 守城則雖似可爲, 但恐城中馬草已乏, 戰馬則想必盡死。 飛鳳山, 乃郭再祐前日所陣處也, 而今皆爲賊陣。 晋州被圍, 已十餘日矣, 城中將士, 必有與在外將官相通之事, 今則全未聞潛通蠟書等事, 可悶。" 忠謙曰: "解晋州之圍, 必如提督攻平壤之勢, 然後可以爲之矣。" 上曰: "晋州城中形勢, 贊成見之乎?" 曰: "臣少時, 暫見之矣。" 上曰: "矗石大定 淸川乎?" 曰: "矗石之水, 環流城下, 有糧則可以守之矣, 若無糧而受敵持久, 則自爾枯死矣。" 忠謙曰: "小臣每欲啓達, 而惶恐未果也。 今日之事, 感動提督之心, 乃可圖之。 前聞提督欲見上手字云。 自上親寫一札, 或遣宗戚, 或遣中官, 哀辭懇告, 則提督必翻然悟矣。" 曰: "人君之道, 務存大體。 何必爲手書?" 上曰: "左相之意何如? 提督自欲擧師, 則何待予手札後爲之?" 張雲翼曰: "小臣之意, 如沈忠謙之言。" 琢曰: "此非帝王之大體。" 忠謙曰: "鄭琢之言, 甚不然。 昔廣平王 , 拜乞於回訖馬前。 若事係宗社, 則體貌何關焉?" 上曰: "大槪中國與夷狄講和, 代或有之, 今乃聽沈惟敬之遊說, 欲成和議。 且天兵雖有三四萬, 非但與賊勢不敵, 深入我境, 師老日久, 皆是疲困之卒, 十萬之賊, 其何能當之? 必如古之岳飛, 然後當此賊。 今見天將, 皆非特異之人, 恐爲不利, 故故爲之遲遛矣。" 夢寅曰: "京城進駐, 一日爲急, 而頃因潦水, 停駐於此, 而城中之人, 望之如雲霓。" 存性曰: "進駐之事, 前已啓達矣。 小臣往來海州時, 風聞小王子侍陪之人, 奪人衣服甚多, 調發人馬亦多。 以此民怨益深。 當今之務, 收拾民心爲上, 而自上只修治器械而已, 未聞有愛(君)〔民〕 惻怛之敎, 宰列亦不進儆戒之言。 古者之聖, 亦有進戒之辭, 今則未聞焉。" 夢寅曰: "採銀, 極是好事, 而天朝採銀之人, 率通事貽弊民間, 監採之官, 皆是卑微, 尤致騷擾。 監採官、譯官治罪, 使不作弊。" 上曰: "今日之事, 如人病重, 氣在咽喉, 不遑他事。 先治急病可也。 我國非徒軍食罄竭, 兵力亦缺。 雖或抄括, 皆疲頓之卒。 欲令下三道, 設科何如? 或者言: ‘頻試科擧, 則軍額減縮, 弊多無益’ 云, 此言信然。 但古有別侍衛, 使此及第之人, 皆充別侍衛, 則豈有軍額減縮之弊乎? 且此時, 豈可拘於常規乎? 予意令下三道設初試, 各定一千, 斬一級者, 許及第似當。 議者或云, ‘目不見, 而貿得頭’ 云, 雖或貿納, 除一賊, 有益於國家, 有何關焉?" 存性曰: "前日取科赴戰之人, 中路奪人釜鼎, 若倭賊過處, 民不堪其苦, 而如水原社倉, 至破開倉庫, 偸取官穀云。" 上曰: "統領無人乎?" 忠謙曰: "雖有統領之人, 軍律不嚴故也。" 且曰: "小臣近日抄錄軍功之人, 則二千七八百人, 而或觀其爲人, 皆是勇健之卒。 若厚待此輩, 以責其效, 則皆爲常勝軍矣。" 上曰: "如何可以厚待?" 忠謙曰: "赴戰之人, 或賜弓矢, 或加護恤, 此謂厚待。" 上曰: "此言至可。" 忠謙曰: "頃日先送之人, 給靑布一匹, 或給馬匹以送矣。" 上曰: "晋州何以爲之?" 忠謙曰: "今日之勢, 感動提督經略之心, 與我兵協力圖却之外, 更無他策矣。" 上曰: "賊勢浩大, 不計死生。 前驅突入, 後軍繼至, 有進無退, 此賊誰可當之。" 存性曰: "前聞金大鼎之言: ‘賊有登城之力, 無陷城之具’ 云矣。" 上以地圖, 示雲翼忠謙曰: "蔚山梁山已無賊巢云, 由此(經)〔徑〕 進, 則猶可圖之, 而誰可爲者?"


  • 【태백산사고본】 22책 40권 28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38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 / 군사-전쟁(戰爭) / 군사-군정(軍政)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광업-광산(鑛山) / 인사-선발(選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