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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40권, 선조 26년 7월 15일 정묘 2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중국에 수군을 요청하는 일로 빈청에 의견을 묻다

상이 빈청(賓廳)에 전교하였다.

"풍신수길(豐臣秀吉)의 뜻을 보건대 음모(陰謀)가 더욱 흉악하고 기세가 날로 교만해져서 이미 군대를 증원하여 와서 기어이 양남(兩南)을 병탄(倂呑)하려 하니, 그 기세로 보아 수년 안에 전쟁이 끝날 상황이 아니다. 그런데 우리 나라의 병력으로는 도저히 물리칠 방도가 없고, 주둔하고 있는 중국 군사도 3∼4만에 불과한 데다가 피로마저 심하니 아마도 쉽게 대적하지 못할 듯하다. 지난해 주청(奏請)할 때 수군(水軍)과 육군이 함께 진격할 것으로 말을 하였는데도 중국에서는 다만 육군만을 보내왔다. 또 일찍이 통보(通報)를 보니 어떤 사람이 강절(江浙)의 수군을 보내어 바로 적의 소굴을 무찌르기를 제주(題奏)한 사람이 있었다.

나의 생각에는 ‘양남(兩南)이 만약 적에게 점거당하면 나라가 망하는 것은 시간 문제여서 이로 인해 천하에 일이 많게 될 것이니, 바라건대 장양(張亮)소정방(蘇定方)의 고사(故事)266) 대로 크게 수군을 일으켜 군량을 함께 싣고 천진(天津)에서 발선(發船)하든지 혹은 등주(登州)나 내주(萊州)에서 출항(出航)하여 돛대를 높이 올리고 곧 바로 우리 나라의 평안도나 황해도 등지에 도착한 다음 바다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서 우리 나라 사람으로 향도(嚮導)를 삼아 웅천(熊川)·부산(釜山) 등지에 이르러 우리의 수군과 협력, 진격하여 적의 소굴을 무찌르고 수군과 육군이 협공(狹攻)하면 일거에 적의 무리를 섬멸하게 되어 천위(天威)267) 가 멀리까지 퍼져서 만백성이 아무 걱정없이 살게 될 것이다.’라고 극력 진달(陳達)하고 싶다. 그러나 이는 너무 큰일이어서 서로 의견이 맞기가 어려우므로 명조(明朝)에서 따르지 않을까 염려된다. 그러나 우리의 입장에서는 진주(陳奏)를 그만두어서는 안 될 듯하다. 나는 밤낮으로 근심하고 분해 하며 이 적을 토멸(討滅)하지 않고서는 살아도 죽은 것이나 같아 한 순간도 마음에서 잊을 수가 없으나 다른 좋은 방책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진주하려는 것이다. 경(卿)들도 이런 생각을 해보았는가? 반복하여 자세히 참작하여 곡절(曲折)을 헤아려 아뢰라."


  • 【태백산사고본】 22책 40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36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註 266]
    장양(張亮)과 소정방(蘇定方)의 고사(故事) : 당 태종(唐太宗)이 고구려(高句麗)를 칠 때 장양이 평양도 행군 대총관(平壤道行軍大總管)으로서 군사를 이끌고 동래(東萊)에서 배를 타고서 나와 사비성(沙卑城)을 습격한 일과, 소정방(蘇定方)이 백제(百濟)를 칠 때 신구도 대총관(神丘道大總管)으로서 군사를 거느리고 성산(城山)에서 배를 타고 웅진(熊津)으로 들어온 일. 《신당서(新唐書)》 권94 장양전(張亮傳)·《신당서(新唐書)》 권100 소정방전(蘇定方傳).
  • [註 267]
    천위(天威) : 명나라의 위엄.

○上敎賓廳曰: "觀秀吉之志, 陰謀益兇, 其氣日驕, 已爲添兵而來, 期呑兩南, 其勢必非數年可解。 以我國兵力, 決無却退之理, 雖較以留在天兵, 不過三四萬, 而疲老已甚, 恐未易敵。 上年奏請之時, 以水、陸竝進爲辭, 而天兵, 只發陸兵矣。 又曾見通報中, 有人忘其名, 題奏請發水兵, 直擣賊巢云云。 予意極陳兩南若爲賊所據, 則國亡無日, 而天下自此多事矣。 願依張亮蘇定方古事, 大發水兵, 竝載糗糧, 或自天津發船, 或自開洋, 擧帆直到小邦平安黃海等道, 循海而南, 以小邦之人, 作爲嚮導, 至熊川釜山等處, 與小邦水兵, 協力進勦, 覆賊巢穴, 水陸挾擊, 則一擧而殲盡醜類, 天威遠暢, 萬姓無虞。 然此落落難合, 天朝恐或不從, 然在我陳奏, 則似不可已。 予日夜憂憤, 此賊不討, 生猶死耳, 未嘗一刻忘于懷, 而無他善策, 故欲陳奏如是。 卿等亦念及乎否? 反覆參詳, 籌度曲折以啓。"


  • 【태백산사고본】 22책 40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22책 36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명(明)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