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략 등에게 심유경과 동행한 왜적의 통과를 허락하지 말라고 이자하다
경략·제독·찬획(贊畫)에게 이자(移咨)하였는데, 대략은 다음과 같다.
"이달 5일에 받은 접반 배신(接伴陪臣) 형조 판서 이덕형의 치계에 의거하면 ‘6월 24일 신시(申時)에 접수한 유격 심유경의 패문(牌文) 안에, 일본 장수 중의 한 사람인 소서비탄수(小西飛彈守)와 수종(隨從)하는 일본 인부(人夫) 등 35명을 대동하고 본부(本府)를 떠나 이달 20일 묘시(卯時)에 부산포(釜山浦)에서 말을 타고 서울과 평양을 거쳐 안주에 도착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신이 생각해 보건대, 왜적은 교활하고 거짓되어 흉모(凶謀)를 헤아리기 어려운데, 유격 심유경은 쉽게 강화되리라고 생각하여 대동하고 함께 오는 모양이나, 지금 서울과 평양의 속길[裏路]을 경유하여 안주에까지 간다면 저 왜적들은 반드시 명병(明兵)의 허실(虛實)과 아군(我軍)의 허약함을 엿보아 알고서는 더욱 방자하게 업신여겨 군대를 보충하여 내지(內地)로 쳐들어와서 날로 노략질을 하여도 마침내 막아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당직(當職)232) 이 생각하건대, 저 왜적이 간악한 생각을 품고 악행을 쌓아 몰래 기회를 엿보는 것이 날이 갈수록 더욱 심합니다. 황령(皇靈)을 두려워하여 겉으로 강화를 구하는 체하지만 진정이 아닙니다. 해구(海口)를 웅거하여 막고 집을 짓고 씨앗을 뿌리며 군대를 나누어 노략질을 하여 날로 사나운 기세를 더 부리는 것이 어찌 뜻이 다른 데 있는 것이겠습니까. 이는 우리의 방비와 계획을 해이(懈弛)시켜 다시 불측한 짓을 저지르려는 것일 뿐입니다. 바로 이점이 당직이 근심하고 분해 하던 바이고 대인(大人)께서도 깊이 생각하고 염려하신 바입니다.
우리 나라의 군신이 밤낮으로 머리를 맞대고서 남쪽을 바라보며 기다렸던 것은 오직 우리 나라를 구원하시는 혜택을 끝까지 하시어 뇌정(雷霆) 같으신 위엄으로 한 척의 왜선(倭船)도 살아 돌아가지 못하게 하여 해로(海路)가 영원히 편안해지기를 바랐을 뿐인데, 지금 아무 이유도 없이 저 왜적과 함께 와서 우리 나라를 두루 거쳐 중국으로 간다 하니, 당직은 이 말을 듣고 그 결말이 어떻게 될는지를 몰라 놀라고 괴이하게 여겼습니다. 적이 이미 강화하려 하니 의심할 것 없다고 여겨 대동하는 것이라면 사납게 날뛰는 모양이 앞에서 진술한 바와 같고, 적의 형세가 미친개 날뛰듯 하니 우선은 날뛰지 못하도록 매어 두어야 한다고 여겨 대동하는 것이라면 이는 먼저 우리의 약점을 보이는 것이어서 반드시 크게 저들의 업신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대동하고 오는 것은 앞으로 보나 뒤로 보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으로 앉아서 저들의 계략에 말려드는 것입니다.
당직이 비록 변변치 못하나 윤기(倫紀)와 의리를 대략 압니다. 이 적이 우리 종사(宗社)를 불태우고 우리의 생민을 모두 도륙하였으며, 선왕(先王)들의 묘를 파서 시해(尸骸)를 불태웠습니다. 그러나 종사의 유허(遺墟)를 아직 쓸어내지도 못했고 선왕의 능묘(陵墓)에 아직 복토(復土)도 덮지 못하였습니다. 이 왜적들은 만세의 원수로서 한 순간도 잊을 수 없습니다. 비록 힘과 형세가 약하여 분통함을 폭로하지는 못했으나 창자를 에이는 아픔으로 이미 애간장이 다 찢어졌으니, 무기를 잡고 흉적(凶賊)의 자취를 쓸어내지는 못할 망정 또 무슨 마음으로 그들이 우리 경내(境內)를 지나가도록 허락하여 저들의 탐욕스러운 행위를 그대로 버려두겠으며, 그들이 다시 우리 도성(都城)과 능묘(陵墓)를 지나가게 하여 우리 선왕의 백성들로 하여금 저들을 위하여 공급(供給)233) 하느라 분주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천지 일월이 위에 계신데 어찌 이런 일을 차마 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당직(當職)이 대인의 명을 어기기 어려워 허락한다 하더라도 우리 나라 인민들에게는 부모가 있고 처자도 있는데, 왜적은 그들의 원수입니다. 부모를 잃은 자가 부모의 원수를 갚고 형제 처자를 잃은 자가 형제 처자의 원수를 갚는 것은 천리(天理)의 발로(發露)이며 대의(大義)의 소재이며 인정(人情)의 필연이니, 비록 당직이라 한들 어찌 천리·대의·인정을 거역해가면서 이 왜적을 위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이를 허락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귀신에게 물어보아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적으로 하여금 엄연히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 나라의 중심부를 지나가게 한다면 대인께서는 이해(利害)가 어떠리라고 생각하시며 끝내 아무 걱정이 없을 것이라고 보장하실 수 있겠습니까.
나의 걱정스런 마음으로 생각해 보건대, 우리 나라는 번번이 패전만 하여 국맥(國脈)을 겨우 보존하고 있는 것이 마치 실낱 같은 목숨이 끊어지려는 것과 같고, 서쪽에서 남쪽 끝까지의 모든 고을이 다 불타고, 들에 널려 있는 썩은 살덩이와 구렁에 가득한 굶어죽은 시체가 천리에 깔려 있어 마치 빈 고을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왜적이 만일 이곳을 지나가게 된다면 병력(兵力)의 강약과 자량(資糧)의 요핍(饒乏)과 도로의 우직(迂直)234) 과 형세(形勢)235) 의 난이(難易)를 단번에 자세히 알게 될 것이니, 후일 흉봉(凶鋒)의 선도(先導)가 아마도 이번 걸음에서 나올 것입니다. 우리 나라의 서로(西路)는 중국의 문호(門戶)인데, 순안(順安) 이서를 적이 아직 정탐하지 못한 것은 바로 천행입니다. 이곳은 높은 산이나 큰 내의 막힘이 없으니, 이곳의 길마저 적이 자세히 알게 된다면 어찌 우리 나라의 근심만이 될 뿐이겠습니까.
명조(明朝)에서 왜인에게 조공 바치기를 허락한 것은 오직 영파(寧波)의 옛 길을 경유하여 바치게 하였을 뿐, 우리 나라를 경유하게 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계획이 적의 창안(創案)인데도 전혀 막지 않고 있으니, 더욱 이해할 수 없습니다. 홍무(洪武)236) 연간의 일을 살펴보건대, 왜의 국왕이 중을 보내어 조공하였으나 표문(表文)이 없다는 이유로 물리쳤고, 왜국의 신하가 중을 보내어 말[馬]과 차[茶]를 바치었으나 사공(私貢)이라는 이유로 물리쳤으며, 또 해마다 침구(侵寇)하기 때문에 중서성(中書省)으로 하여금 이문(移文)하여 꾸짖게 하고 그 보낸 중을 천섬(川陝) 번사(番寺)에 안치(安置)시켰습니다. 또 영덕(永德)·선덕(宣德)237) 연간에는 그 공기(貢期)와 공항(貢航)을 정하여 주고서 정한 제도대로 하지 않으면 모두 침구(侵寇)로 논하였으니, 황조(皇朝)에서 이 왜적을 대하심이 매우 세밀하였고 금방(禁防)하신 한계가 엄하고도 정연하였다 하겠습니다. 그 신묘하고도 원대하신 계책이 탁월하여 천고에 뛰어났기 때문에 동남에서 해구(海寇)의 경보(警報)가 일어나지 않은 지가 거의 백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 이와 같이 한다면 어찌 후일의 후회를 남김이 없겠습니까.
천하의 일에는 두 가지 도리가 없는 것이니 전쟁을 하려면 전쟁을 하고 화친을 하려면 화친을 해야 하는 것이지 한편으로는 노략질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귀순하게 한다면 그들이 반서(反噬)238) 하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뱀과 범을 방 안에 끌어들여 함께 기거(起居)하면서 저것들이 나를 침해하거나 물지 않는다고 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어찌 이런 이치가 있겠습니까. 근자에 듣건대, 풍신수길(豐臣秀吉)이 흉도(凶徒)들에게 특별히 신칙하였으므로 악독한 짓을 하는 것이 더욱 심하다 하는데, 저들의 요구를 들어주어 저들의 기세를 올려주는 것은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한 나라의 안위(安危)가 비록 작은 일이기는 하지만 천하에 관계되는 바가 가볍지 않으니 바라건대 대인(大人)께서는 위로는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이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고 아래로는 적도(賊徒)의 흉계는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을 헤아리어 선조(先朝)에서 오랑캐를 대우하던 성범(成範)을 따르고 우리 나라의 위급한 정성을 헤아리어 틈을 노리는 왜적의 싹을 영원히 끊어버리고 망한 나라를 다시 흥기시키는 공적을 이루신다면 우리 나라의 사직과 생민의 소망에 있어 어찌 다행이라 할 뿐이겠습니까."
- 【태백산사고본】 22책 40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27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註 232]당직(當職) : 선조(宣祖) 자신을 지칭함.
- [註 233]
공급(供給) : 음식을 제공함.- [註 234]
우직(迂直) : 우회로와 직통로.- [註 235]
형세(形勢) : 지형.- [註 236]
○移咨于經略、提督、贊畫。 略曰:
本月初五日, 據接伴陪臣刑曹判書李德馨馳啓: "六月二十四日申時, 接得遊擊沈牌文一紙內, ‘帶日本將一員小西飛彈守, 隨從日本人夫等三十五名等, 開本府, 的于本月二十日卯時, 釜山浦騎馬, 回至王京、平壤、安州等地方。’ 臣竊照本賊狡詐, 兇謀難測, 而遊擊沈容易講貢, 帶與俱來。 如今徑由王京、平壤裏路, 以至安州地面, 伊必(頕)〔覘〕 知天兵虛實、我軍單弱, 益肆陵侮, 添兵內向, 日復呑噬, 委難防遏" 云。 當職竊照, 伊賊懷奸稔惡, 環伺潛窺者, 到今日滋甚。 雖怵於皇靈, 陽若求成, 非實情也。 據扼海口, 架屋種田, 分兵搶掠, 日肆虐焰, 志豈有他哉? 特欲懈我之備、弛我之圖, 復逞其不測也。 此當職所嘗憂憤, 而亦大人積思而熟慮者也。 小邦君臣, 日夕聚首, 南望以徯者, 唯冀惠澤克竟, 雷霆有厲, 隻輪不返, 鯨浪永帖, 而今乃無他端, 而與伊俱來, 遍歷小邦, 達諸上國。 當職聞此, 且驚且怪, 莫知其倪, 以爲賊旣爲媾, 無足猜啀, 則梟獍之狀, 如前所陳。 以爲賊勢方猘, 姑且羈縻, 則先示其弱, 侮予必大。 進退無據, 坐墮計中。 當職雖無似, 粗知有倫紀矣, 粗知有義理矣。 此賊燔焫我宗社, 屠戮我生民, 掘拔我墳墓, 灰燼我先骸。 遺墟未掃, 復土未掩, 萬世之讐, 一息難忘。 雖力綿勢孱, 憤惋莫白, 而摧傷號痛, 固已肝蝕而腸裂矣。 縱不能操戈奮戟, 篲掃兇踪, 又何心, 許其過境, 任伊朶頤, 復使之過都歷墓, 使吾先王赤子, 爲伊供給而趨走乎? 天地日月, 臨之在上, 夫豈忍此? 設令當職, 重違大人之命, 而小邦人民, 有父母焉, 有妻子焉, 擧其讐也。 有父母者, 報父母之讎; 有兄弟者, 報兄弟之讐; 有妻子者, 報妻子之讎, 則是皆天理之攸發, 大義之所存, 人情之必至。 當職又安能逆天理、拂大義、乖人情, 爲此賊地乎? 此其不可許者, 已質諸鬼神, 而苟使此賊, 儼然將兵, 橫貫腹內, 則大人以謂利害如何, 而終可保無他虞乎? 以私憂計之, 小邦百敗僅存, 奄奄如縷, 自西極南, 列郡蕩燹, 腦胔布野, 餓莩塡壑, 千里相望, 有同虛邑。 兵力之强弱, 資糧之饒乏, 道里之迂直, 形勢之難易, 可一擧而諳委。 異日兇鋒之先導, 恐未始不由於玆行也。 小邦西路, 上國門戶。 順安以西, 賊未偵詗者, 是天幸也。 無高山、大川, 爲之關隔, 而此路一脈, 又爲賊所悉, 則豈獨爲小邦之憂哉? 況天朝許貢, 唯其寧波舊路, 未聞其由我地方, 而創自賊謀, 莫或遏絶, 此尤未解之尤者也。 竊觀洪武年間, 其國王遣僧朝貢, 以無表文却之; 其臣遣僧貢馬及茶, 以其私貢却之。 又以頻年爲寇, 令中書省移文責之, 安置所遣僧于川陝 番寺, 且於永樂、宣德之際, 定厥貢期。 貢舡, 有不如制, 則皆以寇論。 皇朝之待此賊, 可謂至密, 而禁防界限, 有嚴且截矣。 且神謀遠猷, 逈出千古, 卓乎不可及, 而海寇之警, 不敢作於東南者, 且百年矣。 今乃如是, 則得無貽悔於後日耶? 天下之事, 無兩端道理, 戰則戰, 和則和焉。 有一邊搶掠, 一邊歸順, 而能保其不反噬者乎? 是無異引虺蝪而處堂, 驅虎兕而同室曰, ‘彼不侵我, 彼不囓我’, 寧有是理哉? 近聞秀吉, 別飭兇徒, 肆毒益甚, 翼而角之, 非計之得, 邦之安危雖小, 天下之所係非輕。 伏願大人, 上會天理人情之不容已, 下揣賊徒凶計之不可測, 遵先朝待夷之成範, 諒小邦危迫之誠懇, 永絶窺覬之萠, 以終興滅之勳, 則其於小邦社稷、生民之望, 豈勝幸甚。
- 【태백산사고본】 22책 40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2책 27면
- 【분류】군사-전쟁(戰爭)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註 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