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근수가 경략이 군량을 못댄 일과 군병이 도망한 책임을 조선에게 넘긴다고 치계하다
원접사(遠接使) 윤근수(尹根壽)가 치계(馳啓)하기를,
"경략은 군량을 잇대지 못하고 우리 군병이 도망했다는 이유로 세 명의 통역관을 목베고 신을 곤장치려 합니다. 또 장 기고(張旗鼓)가 은밀히 ‘제독 이하 천 파총(千把摠)에 이르기까지 군정(軍情)이 모두 「조선은 복수에 급급해서 군마와 군량이 없으면서도 있다고 한다. 천병(天兵)이 나가 싸워서 승리하면 복수를 할 수 있고 설사 패하더라도 저들에게 손해될 것이 없으므로 우리의 승패에는 관계하지 않고 우리가 나가 싸우기만을 바라는 것이니, 조선의 말을 받아들이지 말라. 우리로서는 왕경(王京)이 이미 수복되어 중국의 할 일도 이미 정해졌으니, 마땅히 한강(漢江)을 지키면서 형세를 살펴 철수해야 한다. 」고 하였다. 그러나 경략은 「조선은 원래 남을 속이거나 허황되지 않으니 어찌 우리를 기만할 리가 있겠는가. 」 하면서 지금 굳이 진병(進兵)하게 하였다. 그런데도 지금까지 그대 나라에서는 병마를 지원하여 정벌에 협력한 적이 없었고 또한 양초(糧草)도 공급한 적이 없었으므로 오늘에 와서야 비로소 크게 노하여 왕명(王命)을 따르지 않는 관리를 목베려 하는 것이다. 국왕께서는 즉시 말을 달려 관원을 파견해서 현지에 이르러 세밀히 조사하여 낱낱이 보고하되, 없으면 없다 하고 있으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정언에 분부하기를,
"이 서장(書狀)을 보니 너무도 경악스럽다. 이는 반드시 우리 나라에서 죄를 뒤집어 씌우려는 것이니 내가 지난날 비변사에게 이르지 않았던가? 우리 나라 군병이 왜 싸우지 않고 그대로 해산하였는가? 이 일을 장차 어떻게 대처해야 한단 말인가? 내 생각에는 경략 앞으로 품첩(稟帖)을 만들어 보내되 ‘우리 나라 군병으로서 진격하는 자를 중국군이 잡아 구금하고 협박해서 왜적을 섬멸하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이 때문에 제군(諸軍)이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싸움을 그만두고 귀환한 자도 있었다. 이는 근거없는 말이 아니다.’라는 사실로 말을 만들어 후일 선처할 근거를 삼아야 할 듯하다."
하였다. 좌의정 윤두수 등이 아뢰기를,
"삼가 윤근수의 장계를 살펴보건대, 우리 병사들은 중국군이 꾸짖어 못하게 하더라도 마땅히 군을 주둔시키고 조정에 명을 품했어야 할 것인데, 자기 마음대로 곧바로 해산하였으니, 실로 그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자세히 설명하지 않는 것도 미안한 일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가 성조(聖朝)의 천지 부모와 같은 은혜를 힘입어 오늘이 있게 되었으니 우리 나라의 군신(君臣)들은 죽어서라도 결초 보은(結草報恩)하여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을 것을 생각한다. 매번 군량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많은 실수를 범하여 자주 대인에게 분부를 내리시는 수고를 끼쳐 드리니 죄송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우리 나라의 관병(官兵)과 의병(義兵)이 대부분 상처투성이의 오합지졸(烏合之卒)인데다가 군량마저 없이 이리저리 다니면서 전투하고 있다. 경성의 기근은 더욱 심하여 다소나마 모아진 것으로 중국군에게 지급하고 그 나머지를 우리 군사가 먹는데 양이 하루에 한 되도 채 못 되며 그나마도 점차 감축되고 있다. 그러던 중 중국 조정에서 왜국의 입공(入貢)을 허락하여 돌아가게끔 한다는 소식을 들었고, 세 분 사신께서 압송되자 일로(一路)에 대해서 누차 전투를 중지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므로, 우리의 장병들은 중국에서 입공을 허락하였으니 다시는 용병(用兵)하지 않을 줄로 잘못 알고 제각기 일으킨 군대를 해산한 것이니 참으로 놀랍고 분한 일이다. 호서와 군대로 말하면 왜적이 본도에 쳐들어올까 두려우므로 각각 돌아가서 왜적의 침입로를 차단한 것이요, 파산하여 돌아간 것은 아니다. 근래 대인의 분부로 인하여 이들을 수습해서 왜적을 추격하여 섬멸하도록 밤낮으로 독촉하고 있으나 도로가 멀어 일이 다소 지연되고 있으며 수군(水軍)은 이미 모여졌는지도 알 수 없다. 군량은 충청도와 전라도 각읍에 저축된 것을 일로(一路)로 운반해 오게 하였다. 근래에 이곳의 양식을 관장하는 재신(宰臣)의 보고에 의하면 웬만큼 준비되었다고 하였는데 지금 전무(全無)하다는 글을 받고 보니, 무슨 연고인지 모르겠다. 수군은 이미 3∼4만의 무리를 모아 돌아가는 왜적을 다시 섬멸하려 하고 있다. 근래 남쪽으로부터 돌아온 배신(陪臣) 중에 이것을 직접 목격한 자가 있는데 지금 한 사람도 보지 못하였다고 하니, 이 역시 무슨 연고인지 모르겠다. 아마도 해구(海口)에서 아군이 있는 것을 못 본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하여 이러한 뜻으로 별도의 자문(咨文)을 만들거나 또는 품첩(稟帖)을 만들어서 보내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자문을 만들 필요는 없고 품첩만 보내면 된다. 그러나 내용에 있어 사실을 속이는 듯한 감이 있으면 후일의 일이 더욱 곤란해질 것이니 자세히 살펴서 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38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704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군사-병참(兵站)
○遠接使尹根壽馳啓曰: "經略, 以糧餉不繼, 軍兵躱散, 欲斬三通官, 棍打尹根壽。 且張旗鼓密語云: ‘自提督, 下至千犯摠, 軍情皆曰: 「朝鮮急於復讎, 凡軍馬糧餉雖無, 說有天兵進戰, 勝則足以復讎, 雖敗, 在彼無損, 不管勝敗, 只要我進戰, 請勿聽朝鮮之語。 在我言之, 王京旣復, 中國之事已定, 當守漢江, 觀勢撤回。」 經略以爲: ‘朝鮮本不詐謊, 豈有哄我之理?’ 强令進兵。 到今未見爾國兵馬, 協力征討, 亦未見接濟糧草, 今日始發盛怒, 欲斬不用王命之官。 國王卽可飛馬差官, 到地頭細査, 數目開報, 無則言無, 有則言有。’ 上敎政院曰: "觀此書狀, 至爲驚愕。 此必歸罪於我國, 予前日不言于備邊司乎? 我國軍兵, 何以經罷? 今將何以處之乎? 予意, 經略前作稟帖: ‘以我國軍兵進擊者, 天兵鎖拿迫脅, 使不得攻勦, 故諸軍痛哭流涕, 或有罷歸者。 此非虛語。’ 以此爲言, 爲後日善處之地。" 左議政尹斗壽等啓曰: "伏覩尹根壽狀啓, 我國之兵, 雖天兵呵禁, 所當按兵, 以稟朝廷之令, 而經自罷散, 固難逃責。 然不爲之略敍曲折, 則亦爲未安。 今當答之曰: ‘小邦荷聖朝天地父母之恩, 得有今日, 小邦君臣, 唯思隕結, 以報萬一。 而每於兵糧一事, 多致缺誤, 屢勤大令敎, 竦惕靡容。 我國官、義諸軍, 皆是瘡痍烏合之衆, 擧皆缺糧轉鬪。 京城飢饉尤甚, 些少轃合, 支給天兵之外, 我軍所食, 日不滿升, 漸至減縮。 及聞天朝許貢放回, 至於三位天使押去, 一路屢下戢兵之令, 小邦將卒, 迷謬錯認, 天朝旣許修貢, 再不用兵, 各起之兵, 卒爾解散, 誠可駭憤。 至於兩湖之兵, 則恐賊闌入本道, 各歸把截, 實非罷歸也。 近因大人分付, 使之收合追勦, 星夜催督, 而道路綿遠, 事多稽遲, 未知水軍已聚否也。 至於糧餉, 則忠淸、全羅兩道各邑所儲, 使之搬運一路。 近見本處管糧宰臣所報, 說稱粗有所備, 而今蒙全缺之諭, 未知何故也。 水軍則已撥三四萬衆, 更擬勦歸賊。 近有自南還陪臣, 有親見者, 而今稱未見一人, 亦未知何故, 抑未知海口, 不得見我軍有無而然也。’ 以此意, 別具一咨, 或爲稟帖以送。" 上曰: "不必爲咨文, 只可爲稟帖。 而其所措語, 若欺誑者, 然則後日之事爲尤難。 仔細察爲。"
- 【태백산사고본】 20책 38권 11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70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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