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근수를 면대하여 송 경략의 속셈, 중국 장수들의 면모 등을 의논하다
윤근수(尹根壽)가 안주(安州)에서 오자 즉시 불러들여 면대하였다. 윤근수가 아뢰기를,
"경략이 어제야 비로소 신에게 출발을 명하였습니다. 오늘 안으로 회서를 보내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만약 미처 오지 못하더라도 정오 중에는 보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일인가?"
하니, 윤근수가 아뢰기를,
"문서를 보낸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략이 실제로 적을 추격하려 했다면 군사도 부족하지 않고 군량 문제도 벌써 비변사에 말해 놓았었다. 그런데 이제 대군이 강을 건너간 뒤에야 군량을 마련하게 하니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는가?"
하니, 윤근수가 아뢰기를,
"경략이 ‘지금 적이 어느 지역에 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을 건너간 뒤로는 전혀 적의 거동을 알 수 없다. 권율의 군대는 전라도로 떠났고 백사림(白士霖)의 군대도 흩어져 가버렸으니, 말로 형언할 수 없다. 단지 한강만을 우리 국토의 경계로 삼을 것인가? 나는 분하고 답답한 마음 뿐이었는데 이제 갑자기 경략의 말을 듣고 보니 감격스러움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군대를 독촉하는 일은 내가 명을 내린 것이 서너 차례나 되었는데, 요즈음 듣건대 권율은 군대를 해산했다 하고 도원수와 순찰사 등은 잔병(殘兵)만 거느리고 있다 한다. 적을 추격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소식조차 들을 수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우리 나라는 본래 척후병을 내보내어 요망(瞭望)하는 등의 일을 삼가서 잘하지를 못한다. 경략이 실제로 적을 치려고 했다면 군대의 기밀은 비밀을 지켜야 한다 할지라도 은미하게 통보해 주면 그래도 제때에 도모할 수 있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않았으니 이는 무슨 까닭인가?"
하니, 윤근수가 아뢰기를,
"저들은 우리 나라 사람들을 믿지 아니하여 기밀이 누설될가 염려해서 그런 것입니다. 장 기고(張旗鼓)를 만나보니 ‘노야(老爺)가 이제 적을 치고자 하는데 이것이 누설될까 염려하여 말하지 않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런 사정을 미리 알았다면 제때에 도모할 수 있었는데, 이제 제장(諸將)들이 다시는 가망이 없다고 여겨 이미 모두 흩어져 가버렸으니, 진실로 안타까운 일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경략이 실로 적을 치려 하였다면 어찌 대장에게 이러한 사실을 숨겼는가? 제독에게도 분부(分付)를 내리지 않았기 때문에 제독이 근래에 우리 나라 제장을 구속하여 적을 추격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이제 이렇게 한다면 우리 나라 사람들도 마땅히 분발하여 적을 토벌하여야 할 터인데도 풀어주어 공격하지 않을 것이니, 춘추법(春秋法)으로 논한다면 원수를 갚지 못하면 장례치른 사실도 기록하지 않았는데145) 이것은 나의 죄이다."
하였다. 윤근수가 비밀 문서를 바치니,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적을 추격하여 섬멸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 왜적은 극악 무도하니 어찌 항복할 리가 있겠는가. 죽더라도 구차하게 살지는 않을 것이다. 적이 6∼7만 명이나 되니 반드시 한꺼번에 모두 바다를 건널 수는 없을 것이다. 처음에 건너간 자들은 따라가 격살하지 못하더라도 뒤에 건너는 자들은 따라가 격살할 수 있을 것이다. 적은 매우 교활하고 흉악하니 남쪽 지방을 점거하여 소굴로 삼을까 걱정이 된다. 대체로 군량을 준비하는 것이 매우 어려우니, 이것이 문제이다."
하니, 윤근수가 아뢰기를,
"장 기고(張旗鼓)가 신을 재촉하여 속히 가게 해서 아무 날 자문 3통을 보내고 아무 날 부산에 당도할 것이라는 등의 일을 글로 써서 보여주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처음에는 적과 화친을 맺고 포상까지 하려고 했었는데 이제는 이와 같이 하니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마땅히 앞을 다투어 적을 향해 진격해야 할 것이다. 만약 복수하지 못한다면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우리 나라 사람들은 거짓말 하기를 좋아하는데 중국 사람들도 이를 알고 있다. 유 찬획(劉贊劃)이 ‘근래 우리 나라 사람이 왜적 2천 명을 죽였으므로 왜적이 이 때문에 화를 낸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거짓말이다.’ 하였다."
하니, 윤근수가 중국 조정에서 써 보낸 서찰을 가지고 들어와 아뢰기를,
"제독이 28일에 군사를 진격시킨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나도 들었는데 그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하니 이것이 정확한 소식인가? 날짜를 계산해 보면 유 원외(劉員外)와 박진(朴晉)은 이미 경성에 들어갔을 것이다. 어제 들으니 권율의 군대가 왜적의 앞길을 차단했다 하니, 매우 이상스럽다."
하니, 윤근수가 아뢰기를,
"권율의 군대가 후방에 있는데 어떻게 앞에서 차단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의 무리가 3만 명이라는 것은 지나치다. 설령 3만 명이라 하더라도 약탈하지 못하고 갔다면 어떻게 식량을 구하여 밥을 먹을 수 있겠는가. 굶주리고 지친 적을 추격하면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김상(金相)은 술사(術士)인가? 지난날에 문첩(文帖)에 쓰인 것을 내가 본 적이 있었다. 중원(中原)에 지난 정축년간에 혜성이 하늘을 가로질렀는데, 혜성은 바로 우리 나라에서 치우기(蚩尤旗)146) 라고 하는 것으로, 김상이 말하기를 ‘이 혜성이 기성(箕星)의 꼬리에서 나와 두성(斗星)과 우성(牛星)에 닿았는데, 기성은 연(燕)의 분야(分野)에 해당하고 두성과 우성은 월(越)의 분야에 해당하니 10년 후에 조선이 병화(兵禍)를 받을 것이다.’라고 했으며, 또 최우(崔遇)에게 ‘지금 천상(天象)을 보니 4월이면 왜적이 물러갈 것이다.’라고 했었다. 내가 일찍이 김상을 천문을 아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4월에 적이 과연 물러가니, 내가 기이하게 여겨 묻는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왕 통판(王通判)은 장략(將略)이 없고 내가 보기로는 황응양(黃應暘)이 장략이 있다고 생각된다. 지난번 중국 조정에서 우리 나라가 반역하는가 하고 의심했을 때 그가 힘써 변호해 주었으니 마음이 지성스럽지 않다면 이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후 그의 은혜에 감격하여 선물을 보냈으나 받지 않고 동료들에게 주었으며 끝내는 경략에게 이를 아뢰는 서찰을 올리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인품이 제일이라고 생각한다. 모습은 비록 훤칠하지 못하나 옛사람 중에도 장양(張良)147) 이 있지 않았는가. 그가 올린 글이 매우 훌륭하고 계책도 적절하여 척계광(戚繼光)148) 도 의사(義士)로 대했다고 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38권 7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702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과학-천기(天氣)
- [註 145]춘추법(春秋法)으로 논한다면 원수를 갚지 못하면 장례치른 사실도 기록하지 않았는데 : 《춘추》에는 왕이 시해되었을 경우 그 범인을 잡아 처단하지 못했으면 사적(史籍)에 장례한 사실을 기록하지 않았음. 이는 복수심을 불태워 범인을 기어이 색출하겠다는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였음.
- [註 146]
치우기(蚩尤旗) : 혜성(慧星)과 같은 모양인데 뒤가 굽었으며, 이 별이 나타나면 병란(兵亂)이 일어난다고 함. 《사기(史記)》 권27 천관서(天官書).- [註 147]
장양(張良) : 전한(前漢)의 모사(謀士)로 자(字)는 자방(子房). 병략에 통달하여 유방(劉邦)을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유후(留候)에 봉해졌음. 그는 몸이 왜소하고 얼굴이 부인과 같아 호걸풍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임.- [註 148]
척계광(戚繼光) : 명(明)나라의 명장(名將). 산동(山東) 봉래(蓬萊) 출신으로 자(字)는 원경(元敬)이며, 호는 남당(南塘), 또는 맹저(孟諸). 일찍이 총병관(總兵官)이 되어 여러 차례 왜구를 격퇴하고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군사학에 정통하여 연병(練兵)·치계(治械)·진도(陣圖) 등에 탁견을 갖고 있었음. 저서로는 《기효신서(紀效新書)》·《연병실기(鍊兵實紀)》·《지지당집(知止堂集)》이 있음.○尹根壽, 自安州來詣, 卽引對。 根壽曰: "經略昨始命去。 今日內有回下之事。 如不及來, 午間當送" 云云。 上曰: "何事?" 根壽曰: "付以文書。" 上曰: "經略實欲追之, 則兵非不足, 軍糧事曾已言于備邊司。 而今於大兵渡江後, 糧餉始爲磨鍊, 何以爲之?" 根壽曰: "經略問: ‘賊今在何地?’ 云。" 上曰: "渡江後, 全不知賊之形止。 權慄兵去全羅, 白士霖亦罷去, 不可形言。 只以漢江爲我土乎? 予徒懷憤鬱而已, 忽見經略分付, 不勝感激。 督兵事, 有旨幾至三四度, 而近聞權慄罷兵, 都元帥巡察使等, 只率殘兵。 雖未及追賊, 聲息亦不得聞, 何以爲之? 我國本不謹斥候瞭望等事矣。 經略實欲擊之, 則兵機雖密, 若隱然分付, 則猶可及圖, 而不此之爲, 此何事耶?" 根壽曰: "不信我國人, 恐其漏洩而然。 見張旗鼓, 則: ‘老爺今欲擧之, 恐洩不言。’ 云矣。" 上曰: "如此之情, 若預知, 則可以及圖, 而今則諸將以爲無復可望, 巳盡散去, 誠可悶也。" 又曰: "經略實欲擊之, 則豈諱於大將乎? 提督處不爲分付, 故提督今者鎖拿我國諸將, 使不得追勦。 今若如此, 我國人亦當憤發以討, 而亦釋不擊, 以《春秋》之法言之, 不復讎不書葬, 此予之罪。" 根壽呈秘密文書, 上曰: "必使追勦可矣。 而此賊極惡, 豈有降之之理? 雖死, 不苟活矣。 賊衆雖六七萬, 不必能一時盡渡。 初運雖不及擊, 後渡者猶可及擊之。 賊甚兇狡, 恐據南徼爲巢穴。 大槪糧餉極難。" 根壽曰: "張旗鼓催臣速往, 某日行咨文三度, 某日當到釜山等事, 書示矣。" 上曰: "初則與賊講和, 至欲褒賞, 今則如此幸矣。 所當爭首赴敵。 如不復讎, 生亦何爲? 我國人喜爲虛言, 天朝人亦知之。 劉賛畫言: ‘近有我國人殺倭二千, 倭以故作怒。’ 此是虛語也。" 根壽以天朝所書紙入啓曰: "提督, 二十八日進兵云。" 上曰: "予亦聞之, 而厥後仍在云此是的傳否? 以日計之, 則劉員外、朴晋, 已入王京矣。 昨聞權慄軍遮截倭賊於前路云, 甚怪矣。" 根壽曰: "權慄軍在後, 何敢前遮乎?" 上曰: "賊徒三萬, 則過矣。 設使三萬不得搶掠而歸, 則何以得食? 飢困之賊, 若追則可趕矣。" 上曰: "金相術士乎? 前者出於文帖, 予見之。 中原, 往在丁丑年間, 慧星經天, 我國之所謂蚩尤旗也, 金相曰: ‘此星出於箕尾, 觸於斗牛, 箕是燕分, 斗牛越分, 十年後, 朝鮮受兵。’ 又言於崔遇曰: ‘今觀天象, 倭賊四月當出。’ 云。 予嘗謂相知天文之人, 四月賊果退, 予故奇而問之。" 又曰: "王通判無將略, 予之所見, 黃應晹也。 當初天朝疑我國反逆之時, 力辨之, 非用心至誠, 不至此也。 厥後, 感激其恩, 贈之以物, 則不受, 至於同儕, 終至稟帖於經略, 其爲人第一人也。 貌雖不揚, 古人亦有張良。 其上書極好, 謀策亦好, 戚啓光亦待以義士云耳。"
- 【태백산사고본】 20책 38권 7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702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과학-천기(天氣)
- [註 1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