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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38권, 선조 26년 5월 3일 병진 4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유성룡 등이 이 제독과 왜적의 추격, 왕자 구출 등을 의논하고 치계하다

도체찰사(都體察使) 유성룡(柳成龍)과 도원수(都元帥) 김명원(金命元)이 치계(馳啓)하였다.

"4월 20일 중국군이 경성에 진주했는데 초혼(初昏) 무렵에 제독이 신을 보고 ‘지금 군사를 내어 적을 추격해야 하니 그대 나라의 군마도 추격하도록 하라. 그리고 빨리 강을 건널 배를 준비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21일 이른 아침에 신들이 제독에게 가서 문안하고 경성을 수복한 것에 감사드린 뒤 인하여 군사를 진격시키는 일을 말하니, 제독이 즉시 대장 장세작(張世爵)이여백(李如栢)에게 분부하여 1만 5천명의 군사를 내어 적을 추격하게 하였습니다. 신들은 강을 건널 배가 제때에 마련되지 못할까 염려하여 한강에 나가 배의 마련을 감독했습니다. 수사(水使) 정걸(丁傑)이빈(李蘋) 등의 해선(海船)은 여울이 얕아서 올라올 수 없었으며, 왜적이 새로 만들어 놓은 배가 50여 척이 있었고 우리 배가 4척이 있었으므로 왕래하면서 군사를 실어 날랐습니다. 군마가 이미 강을 건너 남쪽 기슭에 있는 것이 5∼6천이나 되었고 그 나머지도 계속하여 도망하고 있었습니다.

신들이 나갔다가 한강에서 성중으로 돌아오는 조 총병(祖摠兵)을 길에서 만났는데, 제독이 돌아오라고 명령했다고 말하였습니다. 신들이 진실로 의아하게 생각하면서 강가에 이르러 이여백(李如栢)에게 문안하니, 이여백은 발병[足病]이 나서 찌르는 듯이 아프다고 하면서 강가의 나무 그늘에 누워 있었고, 장 대장(張大將)은 이미 성중으로 돌아갔습니다. 날이 저물자 이 대장(李大將) 역시 병이 심하다고 칭하면서 가마를 타고 되돌아갔습니다. 저물녘에 다시 제독의 문 밖에 나아가 그 일을 물으니, 얼마 후에 제독이 연방(椽房)을 시켜 ‘송 경략의 별첩(別帖)이 왔는데 절대로 왜적을 추격하지 말라고 금하니 나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또 들으니 왜적이 우리 사신과 두 왕자를 후미에 두고 행군한다 하니, 만약 그대 나라의 군사가 적을 섬멸한다면 우리 사신은 해를 당하더라도 괜찮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경우엔 우리 사신과 왕자를 다치게 할 뿐이니 그대로 나라에 실로 유익한 것이 없을 것이고 경략이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우리가 지휘를 잘못했다고 꾸짖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그 말이 하도 많아서 다 기록할 수 없으나 대개는 모두가 진격하려는 뜻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신이 답하기를 ‘왜구는 교만하고 사나와서 왕자와 포로로 잡아간 백성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가버릴 것이니 마땅히 대군으로 그 뒤를 추격하여 저들에게 두려운 마음이 들게 해야만 왕자와 백성들이 돌아올 희망이 있다. 지금 군대를 거두고 진격하지 않는다면 적이 무엇을 두려워하고 꺼리겠는가. 또 필시 영남 지방에 주둔해 있어 그 흉악한 계책을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니 그 때는 중국군이 추격하려고 해도 너무 늦어 따라 잡기 어렵지 않겠는가.’ 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 번 말을 주고받다가 밤이 깊어서야 물러나왔습니다.

밤 삼경에 야불수(夜不收) 2인이 전라 감사 권율을 압송하여 제독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함부로 강을 건너간 뜻을 따져 물었습니다. 또 순변사(巡邊使) 이빈(李薲)과 방어사(防禦使) 고언백(高彦伯) 등이 급히 보고한 바에 의하면 중국군이 강변에 늘어서서 군사를 진격하지 못하도록 하고 이빈의 중위 선봉장(中衛先鋒將)인 변양준(邊良俊)을 목에 칼을 씌워 끌고 갔기 때문에 상처가 심해 피까지 토했다고 했으며 이빈 역시 강가에 억류시켜 떠나가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또 고언백의 군대는 21일 진격하여 도중에 있었는데 사 총병(査摠兵)의 하인 20여 명이 길 앞에 줄지어 서서 전진하지 못하게 하고 고언백을 불러 성을 내며 힐책하니, 고언백이 부득이 군사를 정돈하고 대기하겠다는 것으로 핑계대었으나 사장군(査將軍)은 전혀 듣지 않고 억류시킨 채 놓아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독이 추격병을 발송하여 강을 건너게 한 것은 신들의 강력한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워 짐짓 추격한다는 정상을 보이려는 것에 불과할 따름이고 실제는 군사를 진격시키려는 뜻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장세작(張世爵)은 사고를 핑계대어 돌아갔고 이여백(李如栢)은 병을 핑계대어 진격하지 않는 등 중국 장병들 모두가 싸우려는 마음이 없습니다. 최후에는 경략의 첩문을 꺼내 보이면서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이유를 드러내어 말하는 등 이랬다 저랬다 사리에 맞지도 않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경략과 제독 및 제장(諸將)들이 계책을 정해 놓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기 때문이니 말로 논쟁하기는 어렵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38권 4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701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왕실-종친(宗親)

    ○都體察使柳成龍、都元帥金命元馳啓曰: "四月二十日, 天兵入京城, 初昏, 提督向臣言: ‘今當發兵追躡, 爾國軍馬, 亦令追躡。 須速備過江船隻。’ 二十一日早朝, 臣等參候提督, 致謝收復京城, 後因言進兵之事, 提督卽時分付大將張世爵李如栢, 發一萬五千兵追之。 臣等慮渡江船隻猶未及期, 出漢江監督船隻。 水使丁傑李蘋等海船, 因灘淺, 未得上來, 有新造船五十餘隻, 我國船四隻, 往來渡軍。 軍馬已在南岸者五六千, 其餘陸續皆渡。 而臣等出去時, 路逢祖揔兵, 自漢江還入城中, 以爲提督命之還來。 臣等固已疑之, 及至江上, 問安於李如栢, 則如栢稱足病刺痛, 臥在江邊樹陰, 張大將則已爲還入。 日暮, 李大將亦稱病重, 乘轎還入。 臨昏, 更就提督門外, 探候其事, 旣而提督使椽房, 出言: ‘宋經略別帖來, 至禁勿追躡, 吾亦不得自由。 且聞賊, 以天使二, 王子在後而行, 若爾國兵馬, 果然蕩滅, 則天使雖被害, 猶之可也。 不然則徒傷天使與王子, 於汝國實無所益, 經略聞之, 亦必咎吾節制失宜。’ 其說甚多, 不能盡記, 而大槪皆不欲進兵之意。 莫以奴狡詐桀驁, 不還王子及被虜人民而去, 當以重兵躡其後, 彼有畏懼之心, 然後王子人民可有還國之望。 今若撤兵不進, 則賊何所畏忌乎? 且必屯據嶺南, 兇謀難測, 此時天兵, 雖欲更爲追躡, 得無已晩難及乎? 如此往復數次, 因夜深退來。 三更夜不收二人, 押全羅監司權慄來提督處, 詰問經自渡江之意。 又據巡邊使李薲, 防禦使高彦伯等馳報, 天兵羅列江邊, 勿令進兵。 李薲中衛先鋒將邊良俊, 鎖項曳地, 傷重嘔血, 李薲亦被拘留江邊, 不使發去。 高彦伯軍, 則二十一日進兵在中路, 査緫兵家丁二十餘人, 列立前路, 使不得前進, 招高彦伯, 發怒詰責, 彦伯不得已托以整齊支待之事, 査將專不聽從, 挽留不放。 提督發送追兵渡江之事, 不過難於臣等之力請, 而姑示追擊之狀而已, 實無進兵之意。 故張世爵托故還來, 李如栢稱病不進, 將士皆無鬪心。 末抄, 出示經略帖文, 顯言不得自由之由, 如此支梧遮說, 頃刻變遷。 此緣經略提督及諸將, 定計已久, 難以口舌爭之。"


    • 【태백산사고본】 20책 38권 4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701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왕실-종친(宗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