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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 4월 28일 임자 4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유홍·정철 등이 정릉을 옛 능으로 옮기자고 아뢰다

이튿날 다른 대신들과 제신들에게 두루 의논하게 하였다. 우의정 유홍(兪泓)이 의논드리기를,

"애당초 정릉을 이장할 때에 산천이 길하지 않다고 해서 이장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곳이 본래 여염(閭閻)의 풀뭇간이었으므로 능을 옮기라는 명이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희릉을 모신 곳은 본래 고양군이 읍치(邑治)이니 반드시 풀뭇간이 있을 것이라고 해서 그랬던 것입니다. 당시에 소신은 정언(正言)이었는데 40일 동안이나 간쟁하였으며 차자(箚子)를 올리기까지 하였는데도 윤허를 받지 못하였었습니다. 능을 옮긴 일은 소신이 머리를 기둥에 부딛치면서 극간하지 못한 탓입니다. 지금에 와서 말한다면 신에게도 남은 죄가 있습니다. 인종(仁宗)께서 병세가 위독하게 되시자 성교(聖敎)에 ‘나를 부왕(父王)의 곁에 장사지내라.’ 하셨는데, 하루아침에 다른 곳으로 이장하였으니, 지하에 계신 인종의 영혼이 어떻게 생각하시겠습니까.

정릉을 정한 것에 대하여 혹자는 ‘요승(妖僧) 보우(普雨)의 꾀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하는데, 소신이 그 자세한 내용을 알지는 못하나 그것이 빈말이 아님은 알 수 있습니다. 태릉(泰陵)께서 승하하신 뒤에 소신은 산릉 낭청(山陵郞廳)으로서 전에 정한 정릉의 곁에 가서 일하였었는데 명종께서 전교하시기를 ‘정릉은 불길하다.’ 하시어 마침내 태릉으로 이장하게 되었으니, 능을 옮긴 일은 애당초 명종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요즘 산릉에 변이 생겨 다시 길한 곳으로 안장한다면 한편으로는 인종의 영령을 위로 할 수가 있고, 한편으로는 편안히 모실 곳으로 다시 모실 수가 있는 것이니, 신은 인정으로 보나 예(禮)로 보나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오직 성상의 결정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정철이 의논드리기를,

"신정릉은 절대로 그대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다시 구릉을 사용해야 한다는 설에 대해서는, 신의 생각에 애당초 정릉을 개장한 것은 사실 피해야 할 만한 재난이 있어서도 아니었고 옮겨야 할 만한 명분이 있어서도 아닌 것으로, 단지 한때의 의견에서 나온 것일 뿐이었으니, 그렇다면 지금에 이른바 구릉으로 다시 모신다는 것은 이치에 맞는 듯합니다. 다만 능을 옮겼다가 다시 그곳을 사용하는 것이 예의(禮意)에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신은 아둔하고 고루하여 분명히 알 수가 없으니 오직 성상께서 정하심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윤우신(尹又新), 병조 참판(兵曹參判) 심충겸(沈忠謙), 행 호조 참의(行戶曹參議) 신점(申點), 한성부 우윤(漢城府右尹) 이노(李輅), 공조 참판(工曹參判) 박응복(朴應福),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유희림(柳希霖), 예조 참판(禮曹參判) 이충원(李忠元), 이조 참의(吏曹參議) 오억령(吳億齡), 병조 참지(兵曹參知) 장운익(張雲翼) 등의 의논은 모두 다시 구릉으로 옮기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상이 또 유신(儒臣)들로 하여금 의논을 올리게 하였다. 홍문관 응교(弘文館應敎) 허성(許筬), 부응교(副應敎) 박동현(朴東賢), 교리(校理) 이수광(李睟光)이 아뢰기를,

"국운이 불행하여 원릉(園陵)이 변을 당하였으니, 망극한 재앙은 말하자면 가슴이 아픕니다. 능을 다시 정하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일인데 인정이 쏠리는 곳에는 신도(神道)도 따르기 마련이니, 인정을 따른다면 다른 것을 의심할 것이 뭐 있겠습니까. 신들이 생각하건대 애당초 능을 옮긴 일은 한때의 의견에서 나온 것으로, 신명과 사람들의 마음에 통분해 함이 오랠수록 더욱 심하여졌습니다. 이제 다시 옛 장소로 정하려 함에 모든 사람들의 의견이 다 옳다 하니 인정의 똑같음을 속일 수 없습니다. 하물며 읍치(邑治)를 옮기고 능침을 정한 것은 실로 선왕의 뜻에서 나온 것인데이겠습니까. 그리고 안장(安葬)한 뒤 19년 동안 자손들이 번성하여 상서로운 일만 있었고 전혀 재해는 없었습니다. 신들이 생각하건대, 신도가 편안히 여기는 곳은 마땅히 저 신릉이 아니고 이 구릉일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신들이 또 듣건대 ‘정릉 곁에 부장(祔葬)하라.’는 것은 인종께서 돌아가실 때에 안석에 의지해서 내리신 하교로 사람들의 입에 전파되어 지금까지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제 구릉으로 돌아가시면 온 나라의 인정에 순응할 뿐만 아니라 하늘에 계신 두 성상의 영령을 위로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37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98면
  • 【분류】
    왕실-궁관(宮官)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翌日, 遍議于他大臣及諸臣。 右議政兪泓獻議曰: "當初靖陵移葬時, 非謂山川不吉也。 只以閭閻爐冶之所, 有遷陵之命。 蓋禧陵之地, 本高陽郡邑, 必有爐冶之所而然也。 當時小臣爲正言, 諫四十日, 至於上箚, 猶未蒙允。 遷陵之事, 由於小臣不得碎首之致。 至今言之, 臣亦有餘罪也。 當仁廟大漸之日, 聖敎以爲: ‘葬我於父王之側。’ 一朝移于他處, 仁廟地下之靈, 爲何如懷也? 靖陵之卜, 言者以爲出於妖僧普雨之謀, 小臣雖不詳知其曲折, 大槪知其不虛也。 泰陵昇遐之後, 小臣以山陵郞廳, 赴役於前卜靖陵之旁, 明廟傳敎以爲: ‘靖陵不吉。’ 乃葬于泰陵, 遷陵之擧, 初非明廟之志也。 今者山陵有變, 還安于吉地, 一以慰仁廟之靈, 一以復安厝之地。 臣恐於情於禮, 俱得便當。 伏惟上裁。" 領敦寧府事鄭澈議曰: "新靖陵, 決不可仍用。 至如還用舊陵之說, 臣竊以爲, 當初靖陵之遷, 果無可避之患, 可遷之名, 而特出於一時之意見, 則今玆所謂奉還舊陵者, 似亦有理。 但旣遷而還用其地, 未知於禮意如何。 臣之矇陋, 未能灼見, 惟在聖裁。" 知中樞府事尹又新、兵曹參判沈忠謙、行戶曹參議申點、漢城府右尹李輅、工曹參判朴應福、同知中樞府事柳希霖、禮曹參判李忠元、吏曹參議吳億齡、兵曹參知張雲翼等議, 皆以爲還卜舊陵爲當。 上亦令儒臣獻議。 弘文館應敎許筬、副應敎朴東賢、校理李睟光啓曰: "國運不幸, 園陵遭變, 罔極之禍, 言之痛矣。 改卜一事, 在所不已, 而人情所在, 神道不遠, 苟順人情, 他尙何疑? 臣等竊念, 當初遷改之擧, 出於一時意見, 神人之憤, 久而愈深。 及今還卜舊域, 群議皆然, 人情所同, 蓋不可誣? 況移徙邑居, 卜定寢陵, 實出於先王聖意。 而安厝十九年之久, 毓祥産祉, 永無災害。 則臣等竊想神道所安, 宜不在彼而在此也。 臣等又聞, 附葬靖陵之側, 乃是仁廟憑几之敎, 播在人口, 尙今不忘。 今玆還于舊陵, 不特順一國人情而已, 乃所以慰兩聖在天之靈也。"


  • 【태백산사고본】 20책 37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98면
  • 【분류】
    왕실-궁관(宮官)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