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 등이 경략의 패문과 왜적을 치자고 쟁변한 내용을 아뢰다
도체찰사인 풍원 부원군(豊原府院君) 유성룡과 도원수인 좌참찬 김명원이 치계하였다.
"금일 총병(摠兵) 이영(李寧)과 유격장(遊擊將) 척금(戚金)·전세정(錢世禎)이 동파(東坡)에 와서 총병 사대수(査大受)와 한곳에 있으면서 신들과 순찰사(巡察使) 이정형(李廷馨)을 불러 함께 앉게 한 다음 ‘왜적이 이미 조공을 애걸하였고 조정(朝廷)123) 에서는 이를 허락했다.’는 것을 극진히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신에 나라의 신민들은 거의 모두 죽게 되었고 농사는 모두 폐하여 사세가 급박하다.’는 상황을 누누이 말하였습니다. 이에 신이 ‘노야의 이러한 말은 의향이 어디에 있는 것인가?’ 하고 물으니, 유격 등이 ‘우리 조정에서 이미 조공을 허락했으니 귀국(貴國)도 왜적을 죽이거나 사로잡지 말아서 경략의 패문(牌文)을 따라야만 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패문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습니다.
1. 왜인들이 이제 이미 조공할 것을 애걸하였으니 양초(糧草)를 노략질하거나 인민을 죽여서는 안 된다. 어기는 자는 전례에 비추어 용서하지 않고 죽일 것이다.
1. 일본이 이제 이미 조공을 애걸하였으니 우리의 관병(官兵)은 오로지 본부(本部)의 처분에 따라 행동하라. 만일 군공(軍功)을 탐하여 뒤떨어져 있는 적을 살육하는 자가 있으면 참형에 처할 것이다.
1. 조선국의 관병(官兵)과 왜적은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원수이다. 하지만 저들이 이미 조공할 것을 애걸하였으니, 본부의 의처(議處)를 기다리라. 만일 보복하여 사건을 야기시키는 자가 있으면 참형에 처할 것이다.
신들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가 만약 왜노(倭奴)와 강화하려고 했다면 오늘까지 기다리지 않았을 것이다. 당초 왜노가 우리 나라에 강화할 것을 요구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처음에는 동래에서 글을 보내왔고 다시 상주(尙州)에서 글을 보내왔고 세 번째는 평양에서 글을 보내왔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서는 왜노가 중국에서 불공(不恭)한 말을 한 것을 분하게 여겨 천하의 대의(大義)를 위해서 차라리 죽을지언정 치욕을 당하지 않고자 하였기 때문에 지금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이제 왜적은 종묘와 사직을 불태웠고 능침(陵寢)을 파헤쳤으며 우리 백성들을 살육하여 불공대천의 원수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패문(牌文)으로 다시 복수를 못하게 금하니, 이것이 우리 나라의 백성들이 뼈에 사무치도록 원통해서 명령을 받을 수 없는 이유이다.’ 하였습니다.
전세정(錢世禎)과 척금(戚金)은 반복해서 쟁변(爭辨)하며 글로 써서 보여주기도 하고 준엄하게 말로 꾸짖기도 하였습니다. 신이 ‘우리 나라가 비록 작으나 부자(父子)와 군신(君臣)의 의리가 있음을 알고 있다. 지금 왜노와는 임금과 어버이에 대한 원수가 있어 기어이 복수해야 할 처지에 있다. 그런데 중국 장수들이 다시 왜적을 죽이는 것을 죄로 삼을 줄은 미처 생각지도 못하였다.’ 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또 ‘이것은 천자의 성지(聖旨)로서 경략과 제독이 받들어 실행하는 것이니, 어찌 감히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왜노들이 이미 사로잡힌 왕자와 배신 그리고 백성들을 보내준다고 허락했으니 조선에서도 시세(時勢)를 잘 살펴서 우선 용인(容忍)해주고 후일에 국세(國勢)가 점차 강성해지고 군병이 점차 조련되기를 기다린다면 자연 복수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옛날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치욕을 참으며 국력을 양성하고 군병을 훈련시킨 것124) 처럼 하여야 바야흐로 원대한 계책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목전(目前)의 분함을 참지 못해서 대계(大計)를 망치려 하는가?’ 하였습니다. 신들이 ‘이해(利害)로 말하더라도 중국이 이 왜적에게 속임을 당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옛부터 중국이 외이(外夷)와 강화를 해서 일을 그르친 경우가 많았다.’ 하니, 전 유격(錢遊擊)이 발끈 성을 내며 손으로 글씨를 쓴 종이를 찢어버리고서 언성을 높여 책망하자, 척 유격(戚遊擊)이 웃으며 화해시켰습니다.
신이 또 ‘우리 나라가 병력이 적고 약해서 스스로 복수할 수 없으니 이 점은 만번 죽더라도 애석할 것이 없다. 화전(和戰)의 대계(大計)는 중국에서 주관한 것으로 우리 나라는 관여하지 못하였으니, 말로 쟁변(爭辨)하기 어렵다. 이만 물러가겠다.’ 하였습니다. 유격이 ‘경략의 패문을 잘 준행(遵行)하여야 한다.’ 하기에, 신들이 ‘각처의 관병과 의병이 모두 부모와 형제의 원수를 갚으려고 하는데 어떻게 싸우지 못하도록 금할 수 있겠는가. 더구나 우리 임금의 명령을 아직 받지 못했으니 어떻게 감히 마음대로 경략의 패문을 준행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유격 등이 성을 내면서 ‘이것은 바로 우리 조정의 명령이니 조선 국왕이라도 어떻게 감히 이견(異見)을 가질 수 있겠는가. 지금 만약 국왕에게 가서 아뢴 뒤에 실행한다면, 그동안 우리들은 어떻게 앉아서 기다릴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는데, 말소리와 기색이 준엄하여 전혀 돌이킬 의사가 없었습니다.
신들이 밖에 나왔다가 잠시 후에 다시 들어가 만나기를 청하니, 이 총병은 옷을 떨치고 먼저 마산(馬山)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신은 홀로 척금·전세정과 계속하여 쟁변하느라 한동안 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신들이 물러나와 당시 정문(呈文)을 만들어 들여보내니, 두 사람은 성을 내면서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제독에게 아뢰어 군사를 철수하여 돌아가고 당신들이 스스로 조처하게 맡기겠다’ 하였습니다. 잠시 후에 척금·전세정 두 사람도 전라 순찰사(全羅巡察使) 진영인 마산으로 가서 패문을 전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신들에게 공문(公文)을 내어 전라영(全羅營)에 전하여 보일 것을 요구하는 한편 출입할 때에 향도(嚮導)하게 하고 역관(譯官)과 하인들로 하여금 빙 둘러 서도록 재촉한 다음 자기들은 말을 세우고서 기다렸습니다. 신들이 생각하기를 ‘이것은 바로 중국 조정의 명령이니 끝내 말로 정지시킬 수 없다.’고 여겨 부득이 전라영에 공문을 보냈습니다. 그 내용은 대략 ‘척 유격이 패문을 가지고 가니 각처에 전통(傳通)하는 외에는 군병을 정제(整齊)하고 있다가 왜노가 함부로 나타나 노략질을 하거든 지역에 따라 용서하지 말고 쳐 죽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유격 등은 이것을 받아 본 뒤에야 비로소 출발하였습니다. 이때 경기 감사 성영(成泳)이 치보(馳報)하기를 ‘중국 장수가 문서를 보내왔는데 「근일 우리 나라 백성들이 왜적과 말썽을 일으켜서 중국의 법령을 전혀 준행하지 않는다. 」 하였고, 「왜이(倭夷)는 순종을 하는데 조선은 도리어 배반한다. 」는 말도 있었으며, 심지어 우리들을 군문(軍門)에 잡아다가 조사하기까지 한다.’고 하였는데, 그 말은 차마 아뢸 수가 없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37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94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註 123]조정(朝廷) : 중국 조정.
- [註 124]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치욕을 참으며 국력을 양성하고 군병을 훈련시킨 것 : 월왕 구천은 춘추 시대 월나라의 제2대 임금. 기원전 496년에 군대를 이끌고 출동하여 오왕(吳王) 합려(闔廬)의 군대를 무찔렀으나, 기원전 496년 그의 아들 부차(夫差)에게 대패(大敗)하여 회계산(會稽山)에서 치욕적인 화의(和議)를 맺고는 와신 상담(臥薪嘗膽)하면서 복수심을 불태우며 국력을 기르고 군사를 훈련시킨 다음, 기원전 473년에 복수전을 전개한 끝에 오군을 대파하고 오나라를 멸망시켰음. - [註 124]
○都體察使豐原府院君 柳成龍、都元帥左參贊金命元馳 啓曰: "今日李摠兵 寧, 戚遊擊金, 錢遊擊 世禎來在東坡, 與査摠兵大受, 同在一處, 招臣等及巡察使李廷馨, 同坐極言: ‘倭賊旣已乞貢, 而朝廷許之。’ 且: ‘爾國臣民, 幾盡死亡, 農作盡廢, 事勢危迫。’ 之狀, 縷縷不已。 臣對曰: ‘老爺此言, 意思在何?’ 遊擊等曰: ‘朝廷旣已許貢, 本國亦當勿爲勦捕, 以遵經略牌文。’ 其牌文曰: ‘一, 日本衆倭, 今旣乞貢, 不許搶掠糧草, 斫殺人民。 違者, 照舊勦殺不恕。 一, 日本今旣乞貢求哀, 我國官兵, 專聽本部處分, 貪功殺戮零賊者斬。 一, 朝鮮國官兵, 與倭不共戴天。 但彼旣乞貢求哀, 亦候本部議處。 報復啓釁者斬。 臣等對曰: ‘我國若欲與倭奴講和, 則不待今日。 當初倭奴要和於我國者非一非再。 投書於東萊, 再投於尙州, 三投於平壤。 而我國憤倭奴有不恭天朝之語, 爲天下大義, 寧死不辱, 以至於此。 今倭賊焚燒廟社, 發掘丘陵, 屠戮人民, 有不共戴天之讎。 乃以此牌文, 更爲禁約報讎, 此小邦人民之所以痛惋切骨, 而不敢承命者也。’ 錢、戚兩人, 反覆爭辨, 或書寫以示, 或嚴辭峻責。 臣對之曰: ‘弊邦雖小, 亦知有父子君臣之義。 今倭奴有君親之讎, 而爲必報之地。 不圖天將, 更以殺戮爲罪。’ 兩人又云: ‘此天子聖旨, 而經略提督奉行, 何敢不從? 且倭奴已許返王子陪臣及人民, 朝鮮亦當相時度勢, 姑爲容忍, 待後國勢稍强, 軍兵稍鍊, 自有復讎之日。 如句踐之生聚訓鍊, 方爲長遠之慮。 豈可不忍目前之忿, 而敗大計乎?’ 臣等對曰: ‘雖以利害言之, 恐天朝爲此賊所欺。 自古中國與外夷講和, 而誤事多矣。’ 錢遊擊勃然大怒, 以手裂去所書之紙, 勵聲相詰, 戚遊擊笑而解之。 臣又曰: ‘小邦兵力寡弱, 不能自復大讐, 萬死毋惜。 至於和戰大計, 天朝制之, 小邦不敢干預, 難以口舌爭。 願辭退。’ 遊擊云: ‘經略牌文, 當遵行。’ 臣等答之曰: ‘各處官義之兵, 皆欲報復父母兄弟之讎, 豈能禁之? 況未承寡君之命, 安敢擅便遵行?’ 遊擊等怒曰: ‘此乃朝廷之命, 雖國王, 豈敢異同? 今若往稟國王而後行, 則吾輩寧能坐待乎?’ 辭色峻絶, 斷無回意。 臣等辭出, 旣而還入請見, 則李摠兵拂衣, 先馳向馬山。 獨與戚、錢論說, 縷縷爭卞, 移時而不聽。 臣等退來, 又具呈文入送, 則二人怒曰: ‘若然, 則吾當稟於提督, 撤兵還去, 任爾自處。’ 旣而戚、錢兩人, 又欲向馬山 全羅巡察使營, 傳通牌文。 要臣等出公文, 傳示全羅營, 且令出入嚮導, 令譯官下人, 環立催促, 立馬以待。 臣等念: ‘此乃天朝命令, 終不可以言辭停止。’ 不得已移文於全羅營。 略以: ‘戚遊擊持牌文進去, 除傳通各處知委外, 整齊軍兵, 如有倭奴橫出搶掠, 隨處截殺不恕之意。’ 成送。 遊擊等取見, 然後始爲起去。 卽刻, 京畿監司成泳馳報云: ‘天將下帖, 以: 「近日我國人民, 與倭搆釁, 天朝法令, 專然不遵’」 有倭夷效順, 而朝鮮反叛。’ 之語, 至拿成泳等于軍門査究云, 其言不可忍聞。"
- 【태백산사고본】 20책 37권 33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94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