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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 4월 12일 병신 6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이항복이 유 총병에게 왜적을 상황을 전한 일로 아뢰다

병조 판서 이항복이 아뢰었다.

"신이 송 경략에게 문안한 자세한 내용은 이미 계달하였습니다. 그날 조반(朝飯)을 먹은 뒤에 부총병(副總兵) 유정(劉綎)의 진영에 찾아가니, 유 총병은 산에서 사냥을 하고 있었습니다. 역관(譯官)을 시켜 이름을 알리자 곧 달려와 자리를 정하였는데, 총병이 ‘판서는 동쪽에서 왔는데 근래 왜적의 소식은 어떠한가?’ 하기에, 신이 ‘한강 이남과 노원(蘆原) 등처는 노략질이 전보다 더욱 심하다.’ 하니, 총병이 ‘왜적이 중국에 강화를 요청하고서도 다시 이와 같이 한단 말인가? 하였습니다. 신이 ‘이 왜적은 처음 상주(尙州)에 이르러서 다시 이와 같이 하였다. 한편으로는 강화를 요청하고 한편으로는 진격하는 속임수를 썼는데 그들은 본래 이러하다. 대인은 적이 강화를 요청하는 것을 진정이라고 여기는가?’ 하고 물으니, 총병이 ‘이 왜적은 속임수가 많아서 가벼이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그렇다면 대인이 군사를 거느리고 여기에 온 것은 무엇을 하려고 해서인가?’ 하니, 총병이 ‘내가 이 군사를 거느리고 만리(萬里)를 건너온 것은 오로지 당신네 나라를 위해서 이 왜적을 죽이고자 함이었는데, 뜻밖에 경략이 전진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경략이 이미 병권을 주관하며 여기에 있고 제독도 있으니, 내가 진격하고자 하나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신이 ‘우리 나라의 군신(君臣)이 강화를 의논한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는 하늘을 우러르며 속을 썩이기만 하고 하소연할 곳이 없었다. 그래도 좀 기대한 것은 대인이 친히 강병(强兵)을 거느리고 조석(朝夕)으로 강을 건너니, 요행히 한 번 만나 우리의 간절한 마음을 펼 수 있으리라는 것뿐이었다.’ 하니, 총병이 ‘내가 13세 때부터 부친을 따라 군사를 거느리고 출정하여 천하를 횡행하였다. 그래서 외국에서 귀화한 사람들을 가정(家丁)으로 삼았다. 지금 내가 거느리고 있는 군사가 5천 명에 불과하지만 수전(水戰)이나 육전(陸戰)에 모두 쓸 수 있으니 왜적은 족히 두려워 할 것이 없다. 그리고 나는 익히 왜적들과 싸워서 그들의 실정을 잘 알고 있다. 4월과 5월에는 저들이 본국으로 돌아가는 데에 풍세(風勢)가 순조로울 듯하다. 그러나 한달 이상이 지나면 저들이 돌아가려고 하더라도 돌아갈 수 없게 될 것이니, 내 어찌 저들의 거짓말을 믿고서 싸움을 하지 않겠는가. 나는 싸우고 싶으나 그렇게 하면 대장의 명령을 어기는 것이 될 뿐만 아니라 이 제독(李提督)의 마음을 거스릴까 걱정이 된다.’ 하였습니다.

신이 ‘중국 장수들이 모두 싸우자는 말을 하려 하지 않는데 유독 대인만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총병이 ‘장수들은 모두 그와 같은데 오직 나만이 이러한 의사를 가지고 있으므로 감히 송 경략에게 다시 아뢸 수 없는 것이다. 당신네 나라의 왕이 간곡하게 자문(咨文)을 보낸다면 그들도 감동될 것이니 내가 그때 생각했던 것을 말할 수가 있을 것이다. 내가 싸우려고 하는 것은 당신 나라를 위해서만이 아니다. 조선이 왜적에게 점거된다면 이것은 곧 중국이 왜적과 이웃이 되는 것이니, 이른바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게 된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전에 국왕께서 정세가 급박하므로 번거로움을 깨닫지 못하고 여러 차례 자문을 올려 요청하였었다. 이 때문에 송 경략의 마음을 거슬려서 회자(回咨)에 책망하는 말이 매우 준엄하였다. 지금은 머뭇거리고 두려워만 하는 중이라 하소연할 곳도 없다. 오직 대인이 이러한 실정을 헤아려 주시기만을 바랄 뿐이다. 우리 나라의 존망(存亡)은 대인의 몸에 달려 있다.’ 하니, 총병이 ‘모든 일이 이치에 맞지 않으면 남을 복종시킬 수 없는 것이다. 경략이 지위가 높고 중하지만 어찌 감히 당신네 나라를 죄줄 수 있으며 또한 어찌 당신네 나라의 대신을 책망할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신이 ‘국왕께서 회자를 보고 황공해서 감히 다시 청하지 못하고 있다. 대인은 이미 송 경략의 군전(軍前)에 있으니 불시에 나아가 뵙고 함께 병사(兵事)를 의논하다가 경략의 뜻이 지금도 그러하거든 혹 경략의 마음을 풀어드릴 수도 있을 것이다. 본인은 이 점을 바라고 있다.’ 하니, 총병이 ‘대장이 군사를 이끌고 이 곳에 왔으면 의당 여러 의견을 널리 모으고 아울러 당신 나라의 사정을 모두 알고서 보다 나은 것을 따라 조처하는 것이 옳다. 내가 품달하려고 하나 문을 굳게 잠궈 놓고 접견을 허락하지 않으니 진달할 길이 없다. 배신은 내가 이와 같이 말했다 하지 말고 자문(咨文)을 가지고 오라. 그리고 강화하여 퇴병(退兵)하는 기한이 이달 8일이나 12∼13일 중에 있을 것인데 그 뒤에는 반드시 저들의 거류(去留) 여부에 대한 소식이 있을 것이다. 만일 저들이 약속대로 철수하지 않는다면 그때에는 내 응당 말을 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의 말을 보건대 강개(慷慨)하여 무인(武人)같지 않았으며, 매우 도량이 크고 온후하였습니다. 신이 그가 거느리고 있는 각처의 묘족(苗族)과 만족(蠻族)에 대한 명칭과 사용하는 기예(技藝)에 대하여 묻자, 총병은 곧 섬라(暹羅)도만(都蠻) 등 여러 번방(藩邦)에서 귀화(歸化)한 병사들을 불러 좌우에 세워 놓고 각기 자신의 무기를 잡고 차례로 나와 묘기를 보이게 했는데, 괴이한 형상이 각각 특이하여 보는 이의 눈을 어지럽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가진 무기에는 편가노(扁架弩)·담노(擔弩)·제갈노(諸葛弩)·피갑(皮甲)·뇌설도(雷雪刀)·관도(關刀)·월아전(月牙剗)·아창(丫槍)·등패(籐牌)·활나인곤(活拿人棍)·나인과(拿人檛)·낭선(郞筅)·타권(打拳)·천봉전(天篷戔)·양가창(楊家槍) 등의 명칭을 가진 것들이 있었고, 사릉편(四楞鞭)과 칠십 근 무게의 언월도(偃月刀) 및 수전(袖箭) 등의 무기는 총병이 직접 사용하는 것이었습니다. 종일토록 구경하고 나서신이 ‘대인이 관문(關門)098) 을 지나기도 전에 우리 나라 군신들은 벌써 대인의 위명(威名)을 듣고 밤낮으로 기다렸다. 심지어는 어린 종들과 심부름꾼들까지도 그 소식을 듣고 서로들 「잠시 동안만 죽지 않고 있으면 유 총병이 와서 우리를 살려줄 것이다. 」 하였다. 이제 진영(陣營)의 기계(器械)와 사졸들의 용맹스러움을 보니, 저와 같은 무기를 가지고 만리 먼 길을 왔다가 그냥 맨손으로 돌아간다면 우리 나라 사람만이 다시 살아날 희망이 없어질 뿐이겠는가. 대인에게 있어서도 어찌 애석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총병은 즉시 두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높여 말하기를 ‘진실로 그러하다. 기러기는 지나가면 소리를 남기고 사람은 지나가면 명성을 남기는 법이다. 본래 공(功)을 이루어 이름을 해외(海外)에 남기려고 하였는데 어찌 빈 손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윤근수가 또 ‘우리 나라 사람들은 오로지 노야(老爺)만을 우러르고 있다. 그러므로 애절한 호소를 이미 극진히 하였다. 내일에는 모름지기 송 경략을 만나서 이러한 뜻을 다시 이야기하라.’ 하니, 총병이 ‘모두 잘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총병은 하인에게 가벼운 경궁(勁弓)과 껍데기를 벗기지 않은 철촉(鐵簇)의 장전(長箭)을 사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부총병(副總兵) 유정(劉綎)은 장수 집안의 자제로서 상투틀 나이 때부터 싸움터에 출정하였으므로 경솔히 말할 인물이 아닌 것 같다. 그러나 경략과 제독에게 제지당하여 싸움터에서 한 번도 시험할 수 없었으니 애석하다. 유정유현(劉顯)의 아들이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37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685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외교-동남아(東南亞) / 군사-전쟁(戰爭) / 군사-군기(軍器)

  • [註 098]
    관문(關門) : 산해관(山海關).

○兵曹判書李恒福啓曰: "臣宋經略前問安曲折, 已爲啓達矣。 其日朝飯後, 往劉摠兵營中, 則總兵方獵于山上。 令譯官通名, 則卽馳來坐定, 摠兵卽問曰: ‘判書新從東邊來, 奴聲息, 近來何如?’ 臣答曰: ‘漢江以南及蘆原等處, 搶掠比前尤甚。’ 總兵曰: ‘乞和於天朝, 而乃復如是耶?’ 臣答曰: ‘這賊初到尙州, 與我國請和, 及到臨津平壤, 亦復如是。 一邊請和, 一邊進兵, 其情詐緩, 本來如此。 大人以賊請和爲實情耶?’ 摠兵曰: ‘我豈不知? 此賊極詐, 不可輕信。’ 臣曰: ‘然則大人領兵來此, 今欲何爲?’ 摠兵曰: ‘我領此軍, 萬里來到, 專爲爾國, 要殺此賊, 不料, 經略勿令前進。 經略旣主兵在此, 又有提督, 雖欲有爲, 不得自由。’ 臣曰: ‘小邦君臣, 自聞和議, 仰天腐心, 無所告訴。 而猶有所望者, 大人親統强兵, 朝夕渡江, 幸或一見, 得申衷曲耳。’ 摠兵曰: ‘我自十三歲, 從父親領兵征戰, 橫行天下。 將外國向化者, 作爲家丁。 今所統率, 雖只五千, 水陸之戰皆可用, 賊不足畏也。 且我憤與戰, 熟知其情。 四月五月, 則自此還歸其國, 風勢似順。 若過月餘, 渠雖欲歸, 亦不可歸。 豈可信其詐言, 不爲之戰乎? 我雖欲戰, 非但違大將之令, 恐忤李提督耳。’ 臣曰: ‘天朝將官, 皆不欲言戰, 大人獨有此言, 何耶?’ 摠兵曰: ‘箇箇將官皆如此, 唯我有此意思, 而不敢再稟于老爺爾。 國王哀懇移咨, 則彼亦感動, 我於此時, 可以展試所懷。 我之欲戰, 非徒爲爾國。 朝鮮若爲奴所據, 是中國奴爲隣, 所謂唇亡齒寒者也。’ 臣曰: ‘前此國王, 情急勢迫, 不覺煩瀆, 屢次咨請。 因拂宋爺之意, 回咨切責, 辭極嚴峻。 今則回惶中路, 無所籲告。 幸冀大人, 量此情悃耳。 小邦存亡, 存大人身上。’ 摠兵曰: ‘凡事不合於理, 則不可以服人。 經略雖尊重, 豈敢罪爾國? 亦安得遽責爾國大臣乎?’ 臣曰: ‘國王自見回咨, 惶恐不敢復請。 大人旣在宋爺軍前, 不時進見, 與論兵事, 意復如此, 或可以解宋爺之意。 陪臣所望於此。’ 摠兵曰: ‘大將領兵來此, 所當博採群議, 兼使爾國之情, 無不得通, 從長處之可也。 我雖欲稟, 牢鎖大門, 不許接見, 無由進達。 陪臣勿言我如此云云, 備咨前來。 且講和退兵之限, 在今月初八日十二日十三日, 此後必有去留消息。 若不如約, 此時我當有說話。’ 觀其辭語慷慨, 不似武人, 極爲蘊(籍)〔藉〕 。 臣問所領各處苗蠻名號, 所用技藝, 則摠兵卽呼暹羅都蠻等諸藩向化, 擺列左右, 各執其器, 次次來呈, 殊形怪狀, 種種不一, 眩曜人目。 有扁架弩、擔弩、諸葛弩、皮甲、雷雪刀、關刀、月牙剗、丫搶、藤牌、活拿人棍、拿人撾、郞筅、打拳、天蓬剗、揚家搶等名號, 又有四楞鞭, 七十斤偃月刀、袖箭等器, 則摠兵所自用也。 終日閱視、閱畢, 臣告曰: ‘大人身未過關, 小邦君臣, 已聞威名, 日夜竚待。 至於童奴走卒, 亦知其聲, 自相謂曰: 「願少須臾毋死, 劉爺來, 活我也。」 今觀營陣器械, 士卒勇銳, 以如許威名, 將如許器械, 萬里程途, 空來空往, 不唯小邦之人, 無復有望於更生, 其在大人, 豈不可惜?’ 摠兵卽瞋目揚言曰: ‘誠然。 誠然。 雁過留聲, 人過留名。 本欲成功, 留名海外, 豈可空手回去?’ 尹根壽又告曰: ‘小邦之人, 專仰老爺。 故哀懇已盡。 明日須見宋爺, 以此意再講。’ 摠兵答曰: "都曉得云云。’ 摠兵言於下人, 欲買輕捷勁弓, 又求不去皮鐵簇長箭云云矣。"

【史臣曰: "劉副摠, 以將家子, 結髮征戰, 似非易言之將。 而掣肘於經略, 提督不得一試之於逐殺之場, 其可恉也。 劉綎之子也。"】


  • 【태백산사고본】 20책 37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685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외교-동남아(東南亞) / 군사-전쟁(戰爭) / 군사-군기(軍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