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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 4월 10일 갑오 2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이항복이 송 경략이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아뢰다

병조 판서 이항복이 아뢰었다.

"신이 임반관(林畔館)에 도착하여 송 경략에게 자문을 주고 또 국왕께서 옆 고을에서 기다리며 감히 만나기를 청하지 못하고 계시다는 뜻을 말하니, 경략이 통사(通事)와 왕 통판(王通判)을 불러 만나고 싶지 않다는 뜻을 강력히 표하였는데 말은 매우 완곡하였습니다. 또 ‘말을 전할 때에 만일 사실과 다르게 전달되어 국왕의 마음을 불안하게 한다면 어찌 매우 미안하지 않겠는가. 나는 절대로 다른 뜻이 없으니 나의 뜻을 국왕에게 잘 전달해서 거가(車駕)로 하여금 속히 거처해야 할 곳으로 돌아가게 해서 군무(軍務)를 대처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하고, 이어 왕 통판을 시켜 신을 불러 상대하게 한 다음 서로 만날 수 없다는 뜻을 써서 신으로 하여금 계달하게 하였습니다. 대개 그 사기(辭氣)를 살펴보건대, 앞서의 자문과 거절한 말은 매우 무리했었는데 지금은 전에 잘못한 말을 부끄럽게 여겨 다른 이유를 끌어대어 전의 잘못을 변명하려는 듯합니다. 신이 또 부총병 유정(劉綎)을 문안하였는데 그의 사기(辭氣)는 강개하였으며 ‘왜인의 속셈이 간사하여 결코 강화하기가 어렵다.’는 뜻을 강력히 진술하였습니다. 이어 사용하는 각종 군기를 꺼내 보여주고 거느리고 있는 섬라(暹羅)·도만(都蠻)·소서 천축(小西天竺)·육번득능국 묘자(六番得楞國苗子)·서번 삼색(西番三塞)·면국(緬國)·파주(播州)·당파(鏜鈀) 등 투화(投化)한 사람들을 좌우에 도열해 서게 하고 차례로 각각 자신의 묘기를 자랑하도록 하여 종일 구경시켰습니다. 그리고 왕 통판이 소첩(小帖) 두 통을 입계(入啓)했는데, 그중 하나는 ‘중국에서 전에 왔던 사신은 단지 6∼7품 관원으로서 원래 대신과는 만나보는 체례(體禮)가 없으니 앞으로도 만나지 않음으로써 각자의 체면을 온전히 하는 것이 낫다.’는 것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왕과 만나려면 반드시 교제하는 의문(儀文)이 있어야 혐의를 피할 수 있으니 역시 만나지 않는 것이 낫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우선 만나는 것을 피하려는 것이고 원래 다른 뜻이 없으니 일이 끝난 다음 혹 한번 만나보고 가는 것도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37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84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외교-동남아(東南亞) / 군사-전쟁(戰爭)

○兵曹判書李恒福啓曰: "臣到林畔館, 呈咨於宋經略, 且言國王伺候傍郡, 不敢請見之意, 則經略招通事及王通判, 極陳不欲相會之意, 辭極婉順。 且曰: ‘傳語之際, 萬一失實, 使國王心內不安, 則豈不大未安? 我千萬無他意, 可善達國王, 令車駕, 速還當駐處, 策應軍務可也。’ 仍令王通判, 招臣相對, 書其不可相會之意, 令臣啓達。 大槪, 察其辭氣, 前此咨文及拒絶之辭, 極其無理, 今則似是恥其前言之失, 而开以他故, 以遂前非也。 且問安于劉副摠綎, 聽其辭氣慷慨, 極陳: ‘情詐諼, 決難講和。’ 之意。 仍出示所用各樣軍器, 又令所率暹羅都蠻小西 天竺六番, 得楞國苗子西番 三塞緬國播州鏜鈀等投順人, 列立于左右, 次次各呈其技, 終日閱視。 王通判小帖二道, 竝爲入啓, 一則以爲: ‘天朝向來使臣, 只是六七品官, 原無大臣相見之體, 不若且不相見, 各全體面。’ 一則爲: ‘與王相見, 必有交際儀文, 嫌疑可避, 亦不若不相見。’ 以此二者, 姑且免會, 原無他意, 待事完之後, 或一相見, 卽行可也云。"


  • 【태백산사고본】 20책 37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84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외교-동남아(東南亞) / 군사-전쟁(戰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