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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37권, 선조 26년 4월 1일 을유 3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홍진이 의주에서 돌아와 송 경략이 왜적이 조공하는 대가로 강화하기로 했다고 아뢰다

좌승지 홍진(洪進)의주(義州)에서 돌아와 아뢰었다.

"신이 송 경략(宋經略)에게 나아가 문안하고 ‘국왕이 노야(老爺)께서 병이 있다는 말을 듣고 즉시 좌승지 홍진과 내의(內醫) 남응명(南應命)을 보내어 문안하게 하고 아울러 약물(藥物)과 음식을 보냈다.’ 하니, 후의(厚意)에 매우 감사한다고 하였습니다. 이튿날 신을 불러 ‘요즘 왜노(倭奴)가 죄를 뉘우치고 조공하기를 요구하고 있는데 말이 매우 애절하고 2∼3차에 걸쳐 청하여 왔으므로 내가 우선 이를 허락하고 대의(大義)로써 그들을 꾸짖었다. 오는 4월 8일 왕자(王子)와 배신(陪臣) 등을 모두 돌려보내고 그들은 즉시 자기 나라로 돌아가기로 약속하였다. 이렇게 되면 나는 관원을 파견하여 왜노들을 거느리고 관백(關白)에게 가게 해서 관백의 항서(降書)를 받아 가지고 돌아오게 할 것이다. 지금 곧바로 천자에게 제본(題本)을 올려 관백을 일본 국왕으로 봉하고 영파(寧波)를 통해 입공하게 하려 한다. 왜적들은 이미 평양의 패전에서 겁을 먹고 있으니, 지금 잘못을 뉘우치고 복죄(服罪)하는 것은 진심에서 나온 듯하다. 힘으로 남을 복종시키는 것이 마음을 복종시키는 것만 못한 법이다.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지금 우리 병사 중에 먼저 파견된 자들은 이미 지치고 숫자도 적으며 뒤에 징발된 자들은 멀리 떨어져 있으니, 진격하려고 해도 형편이 그렇게 할 수가 없다.’ 하였습니다. 신이 ‘우리 나라가 오늘날 보존되고 있는 것은 망극한 황은(皇恩)의 덕이다. 그러나 이 왜적들은 속임수가 많으니 지금 항복을 애걸하는 것은 반드시 전쟁을 지연시키려는 술책일 것이다. 저들의 간계에 떨어질까 걱정이다. 저들은 우리 선왕의 능묘(陵墓)를 파헤쳤으니,083) 우리로서는 만세토록 기어이 보복하여야 할 원수로써 이 세상에서는 함께 살 수 없는 의(義)가 있다. 맹세코 한 번 죽기로써 결전하여 이 원수를 갚기만을 바랄 뿐, 적과 함께 살기를 원치 않는다. 부디 노야는 끝내 구제해 주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경략이 ‘왜노가 그대 나라에 있어서는 참으로 백세(百世)의 원수이지만 중국에 있어서는 다만 벌레같은 존재에 불과한데 이제 저들이 이미 항복을 빌고 복죄(服罪)하였으니 내가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저들의 간계가 다시 드러나기를 기다렸다가 초멸시킨다면 우리에게 명분이 있는 것이니 그대 나라에서는 우리가 그들의 술수에 빠진다고 걱정하지 말라. 관백을 왕으로 봉해 주고 조공을 허락하는 일로 말하면, 저들이 완전히 돌아간 다음 진정(眞情)을 확인한 뒤에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조정의 뜻이 어떠한지를 모르겠다. 그대 나라에서 원병을 요청하던 초기에는 조정의 의논이 분분해서 대부분 압록강을 지키는 것을 상책이라 하였다. 평양까지 내려오자 평양만을 지키려 하고 개성까지 내려오자 개성만을 지키려 하면서 「이미 속국(屬國)을 구원하여 태반을 평정 회복하였으니 바로 철병하는 것이 옳다. 」고 하였으나, 나와 석 상서(石尙書)의 의견은 그렇지 않아서 적들을 깨끗이 소탕하기 로 기약하였다. 이것은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조정에서 그대 나라가 2백 년 동안 충순(忠順)하게 사대(事大)하여 지성으로 게을리하지 않은 것을 가상하게 여긴 때문이니, 금일의 일은 천자의 홍은(鴻恩)에서 나온 것이다. 내가 온갖 생각을 다하는 것은 모두 그대 나라의 후속 조처에 만전을 기하려는 계책인 것이다. 후일 그대 나라가 평정되었을 때에도 5천 혹은 1만 명의 군사를 유치시켜 요해처(要害處)를 지키게 할 것이다. 이는 모두가 내 진심에서 우러나온 말이다. 배신은 돌아가서 국왕에게 염려하시지 말라고 보고하라.’ 하였습니다.

또 ‘내가 듣기로는 세자(世子)의 나이가 차서 바로 학문을 하여야 할 때가 되었다 한다. 열 가구가 사는 작은 마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한 사람은 있는 법이다. 그대 나라는 땅도 크고 사람도 많으니, 필시 정심(正心)·독행(篤行)하는 선비로서 세자의 사우(師友)로 삼을 만한 자가 많을 것이다. 모름지기 때를 놓치지 말고 강학하도록 하라.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의 도는 전모(典謨)084) 에 있고 공맹(孔孟)이 마음을 전한 묘법은 경전(經傳)에 있다. 한 권의 《중용(中庸)》이나 《대학(大學)》만으로도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에 충분하니 모름지기 경학(經學)에 유념할 것이요, 주자(朱子)의 집주(輯註)에 너무 빠질 필요가 없다. 사람의 마음은 본래 선하지만 도심(道心)은 은미하고 인심(人心)은 위태로운 것이니, 진실로 그 중도(中道)를 실행한다면 자연 자신을 수양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천지 사이에 천자가 가장 위대하다. 국왕이 그 다음이고 공(公)·후(侯)·백(伯)이 또 그 다음인 바, 세자는 후일의 국왕이 될 사람이니 보도(輔導)를 어찌 늦출 수 있겠는가. 제왕의 도리와 성리(性理)의 학문을 강구(講究)하여 본원(本源)이 맑아져 정대 광명하게 되면, 수신(修身)과 치국(治國)이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진(秦)·한(漢) 이후의 문장(文章)과 사부(詞賦)는 사람의 마음을 어지럽힐 뿐이니 마음을 둘 것이 못 된다. 배신은 돌아가서 국왕에게 아뢰어 교양(敎養)에 법도가 있게 하고 문장과 술을 일삼지 말게 하라. 또 세자의 시강관(侍講官)과 두세 명의 배신으로 하여금 성경 현전(聖經賢傳)을 가지고 나에게 오게 하면 내가 한가한 시간에 의리를 강론하고 구두(句讀)를 알려주어 그들로 하여금 다시 세자를 가르치도록 하겠다. 이 모든 것은 내가 그대 나라를 위하여 극진하게 마음을 쓰는 것이니 배신은 모름지기 잊지 말고 이것도 아울러 돌아가 아뢰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신이 또 홍수언(洪秀彦)·남호정(南好正)의 말을 듣건대, 벽제관(碧蹄館)에서 패전한 이후로 중국 장수들은 싸울 의욕이 없고 제독(提督) 이여송이 전일 온 것은 오로지 철군하여 돌아가고자 함이었는데, 송 경략이 그를 심하게 꾸짖고 독려해서 돌아오게 하였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불리하게 되면 경략이 그 잘못을 책임져야 하므로 그에게 억지로 싸우게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24일 밤 심유경이 돌아왔는데 25일에 송 경략이 그를 불러 유시하기를 ‘그동안의 화의(和議)는 네가 이미 혼자서 주관하였다. 나는 조선을 속일 수도 없고 또한 우리 조정을 속일 수도 없다. 너는 모름지기 책사(策士) 5명을 데리고 왜군들을 인솔하여 일본에 가서 관백의 항서(降書)를 받아가지고 오라. 나는 항서를 얻은 뒤에야 다시 천자에게 아뢰어 관백을 봉하여 왕으로 삼고 그로 하여금 조공하게 할 것이니 그대는 일을 그르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고, 이어 은(銀) 2백 냥을 주어 노비(路費)로 쓰게 하였는데, 심유경은 명을 받고는 근심스런 모습으로 떨면서 나왔다고 합니다. 홍수언 등에게 들은 내용이 반드시 모두 사실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미 들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37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78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왕실-종친(宗親)

  • [註 083]
    선왕의 능묘(陵墓)를 파헤쳤으니, : 임진 왜란이 발발하던 1592년 12월 16일, 왜군이 당시 양주군에 있던 명종(明宗)의 능인 강릉(康陵)과 중종(中宗)의 계비(繼妃) 문정 왕후(文定王后)의 능인 태릉(泰陵)을 파헤친 사건을 가리킴.
  • [註 084]
    전모(典謨) : 《서경(書經)》의 요전(堯典)·대우모(大禹謨)·고요모(皐陶謨)·익직(益稷) 등의 편을 가리키는 총칭.

○左承旨洪進還自義州, 啓曰: "臣進宋經略前問安, 告曰: ‘國王聞老爺有恙, 卽差左承旨洪進, 內醫南應命, 委來問安, 兼致藥物及膳。’ 答曰: ‘多謝厚意。’ 翌日, 呼臣語之曰: ‘近者奴悔罪求貢, 其辭極哀, 至於再三, 我姑許之, 且以義責之。 約於四月初八日, 盡還王子陪臣等, 渠卽回巢。 我當差官, 勒領衆, 捲還于關白處, 受關白降書以回。 方題本請旨, 封關白爲日本王, 使之由寧波入貢。 此賊已懾於平壤之敗, 今日之悔過服罪, 似出於眞誠。 蓋以力服人, 不如服人之心也。 且有一說。 今我之兵先去者, 已老而數寡, 後調者在遠而未齊, 雖欲便進, 勢亦未可也。’ 臣告曰: ‘小邦保有今日, 皇恩罔極。 但此賊, 變詐百出, 今之乞降, 未必非緩兵之計, 恐中奸計。 先墓見掘, 萬世必報之讎, 有不共戴天之義。 誓欲決一死戰, 以復此讐, 不願與賊俱生。 惟望老爺終始拯濟。’ 經略曰: ‘奴在爾國, 則固爲百世之讐, 在中國則亦是蠢蠢中一物, 彼旣乞降服罪, 我不可不從。 待彼奸謀更露, 我之勦殺有名, 爾國勿以我墮其術中爲慮。 若其封王許貢, 當待(卷)〔捲〕 還, 得其眞情而爲之。 第未知朝廷之意何如也。 當爾國請兵之初, 廷議紛紜, 多以防守鴨綠爲得。 及下平壤則欲守平壤, 及下開城, 則欲守開城, 謂已救援屬國, 平復大半, 便可撤兵云。 而我與石尙書之意不然, 期於蕩滌淸淨。 此無他, 朝廷嘉爾國二百年忠順事大, 至誠不怠。 今日之事, 出於聖天子鴻恩。 我百爾所思, 莫非爲爾國善後之策, 萬全之計也。 他日爾國平定之時, 亦當留兵或滿萬, 或五六千, 使守要害。 此皆我肺腑之言。 陪臣回報國王勿慮。’ 又曰: ‘我聞世子年富, 正當學問之時。 十室之邑, 必有忠信。 爾國地大人衆, 必多正心篤行之士, 可爲師友者。 須及時講學。 二帝三王之道, 在於典謨, 傳心之妙, 在於經傳。 一部《庸》 《學》, 足以治國安民, 須留心經學, 不必泥看輯註。 人心本善, 道心惟微, 人心惟危, 允執厥中, 則自然修己以安百姓。 天地之間, 天子爲大, 國王次之, 公侯伯又其次也, 世子, 他日之國王, 輔導其可緩乎? 講究帝王之道, 性理之學, 本源澄澈, 正大光明, 則修身治國, 都不外此。 以下, 文章詞賦, 只亂人意, 不足留意。 陪臣歸啓國王, 敎養有法, 勿事文酒。 且令世子講官二三陪臣, 齎聖經賢傳以來, 我於閑日, 當講論義理, 點其句讀, 使之轉敎此世子。 此皆我爲爾國盡情處, 陪臣須記取勿忘, 幷此歸啓。’ 臣且聞洪秀彦南好正之言, 則碧蹄蹉跌之後, 將官無意於戰, 提督前日之來, 專欲撤兵而回, 經略深責之, 督令還去。 而若或不利, 則經略當任其咎, 不得强之使戰也。 二十四日夜, 沈惟敬回還, 二十五日, 經略招見, 諭之曰: ‘此間和議, 汝旣專主。 我不當欺朝鮮, 亦不敢誣朝廷。 爾須率策士五人, 領衆歸日本, 受關白降書以來。 我得此然後轉奏請旨, 封關白爲王, 使之進貢, 勿令誤事。’ 仍給銀二百兩, 使爲路費, 惟敬受命, 憂怖以出云。 秀彦等所聞, 未必皆實, 而旣有所聞, 不敢不啓。"


  • 【태백산사고본】 20책 37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78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왕실-종친(宗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