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응인이 장 도사를 만나 군량의 수송을 논의하였다고 아뢰다
접반사(接伴使) 한응인(韓應寅)이 아뢰었다.
"어제 저녁에 장 도사(張都司)076) 가 차비 역관(差備譯官)을 시켜 신을 부르기에 신이 곧장 달려갔더니, 장 도사가 방 밖에 나와 서서 신을 보고 말하기를 ‘내가 너희 나라의 일을 위하여 강을 건너 와서 체류한 지 지금 4개월이 되도록 노고를 싫어하여 피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들으니 애 주사(艾主事)077) 가 경략에게 나를 헐뜯기를 「장 아무개가 운량의 일을 전담하면서 의주(義州)에게 발송한 천조의 군량이 거의 2만 6천여 대(帒)에 이르는데도 조선을 비호하느라 운송을 독촉하지 않는가 하면, 연로의 주현으로 하여금 산골짜기에 쌓아두게 하고 제때에 군영으로 운송하지 않았으므로, 평양에 도착된 수효는 이제 겨우 3천여 대이고 그 나머지는 처치한 데가 없다. 이 때문에 대군이 굶주림을 면치 못하여 죽은 자가 서로 잇달으니 지극히 통분하다. 」 하였는데, 경략이 이 말을 듣고 나에게 행문(行文)하여 그 사실 여부를 물어 왔다. 나는 나대로 발명할 길이 있으니 무엇이 두렵겠는가마는, 당초 조정이 은(銀) 수만 냥을 풀어 강서(江西)·요동(遼東) 등지에서 쌀을 사들였는데, 지금 그것이 다 의주로 반입되어 의주에서 평양으로 운반된 수효가 1만 4천∼5천 대가 될 것이고 바야흐로 수륙으로 운송하고 있어 꾸려갈 수 있을 것인데, 애공이 이처럼 사람을 모함하려고 하는 것이 몹시 가증스렵다. 내가 연로에서 너희 나라의 군량 운반하는 사람을 보니 남자는 지고 여자는 이고 가는데, 고생이 말이 아니어서 몹시 불쌍하여 가슴이 찢어지려는 듯하므로 독촉하지 않고 또 벌도 내리지 않았다. 그런데 너희 나라의 수령 등은 몸달아하는 마음이 전혀 없이 곧장 운반하지 않고 나에게 거짓으로 보고하기를, 모두 운반을 끝냈다고 하였으니, 이것은 나의 죄가 아니다. 내가 평양에 도착한 지 이미 수일이 지났다. 천병들이 모두 먹다 남은 쌀을 가지고 길거리에서 물건과 바꾸면서 이것 저것 여러 가지를 바꾸어 마음대로 매매하는 것을 보았는데, 굶주린 자가 과연 이러하겠는가. 이것은 말할 것도 못 된다. 그러나 내가 일찍이 의주에서 너희 나라 관원을 차출하여 2백 냥 및 청람포(靑藍布) 등을 싸가지고 해변에 가서 소금을 사오라고 하였는데 감감 무소식이었기 때문에 전날 임세록(林世祿)을 영유(永柔)에 보내어 국왕에게 이 내용을 개진하게 하였다. 그런데도 여태 한 포(包)도 도착된 것이 없으니 이것은 무엇 때문인가.
너희 나라의 배신은 문장에 종사할 줄만 알고 일을 제대로 수행하는 사람이 전혀 없어서 모든 호령이 봉행(奉行)되지 않고 있다. 이번 일은 역시 시랑이 분부한 것인데 이처럼 하고 있으니 내가 반드시 문책을 받을 것이다. 어떻게 하여야 되겠는가. 지난날 봉황성(鳳凰城)에 소금을 사러 보낸 사람은 어제 벌써 도착하여 군인에게 나눠 주었는데 너희 나라의 해변이 봉황성보다 더 먼가? 이번에 조도사(調度使)로 하여금 한 통의 문서를 만들되 도착된 수효가 몇 석, 현재 남아 있는 수효가 몇 석이라고 적고 도장을 찍어서 보내게 한다면 나의 심사를 경략이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그러니 조도사를 불러 분부하게 하라.’ 하기에, 신이 답하기를 ‘노야가 우리 나라에 오래 머무르며 운량의 일을 자신의 임무로 여겨 많은 심력을 소비하였으므로 우리가 매우 감사하게 여긴다. 이제 비록 사실과 어긋난 비방이 있기는 하나 이는 삼척동자라도 분간할 수 있는 것이니, 개의할 것이 못된다. 내일 국왕께서 여기에 오면 제독과 서로 만나게 될 것이니, 이 사정을 제독에게 개진한다면 시랑에게 이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더니, 도사가 ‘비록 이자하지 않더라도 저절로 발명은 될 것이다. 내가 이처럼 말하는 것은 다만 나의 뜻을 밝히는 것일 뿐이다.’ 하였습니다."
사신은 논한다. 사방에서 군사를 일으켜 천리에 군량을 운반하자니 관서 지방의 몇 고을은 실로 감당하기 어렵다. 황제의 은혜가 크게 미치어 멀리 군량을 대어주고 있으니 마땅히 제때에 운반하여 군병이 양식을 찾는 부르짖음이 없게 해야 한다. 그런데도 일을 맡은 신하는 나라에 봉사하는 성의를 보이지 않아 조달을 제대로 못하여 운반하는 데 많이 지체되며 주고받는 데 증빙할 것이 없어서 수효도 밝히기 어려웠다. 도사의 힐책이 비록 준엄하였지만 조정의 명령이 시행되지 않았다. 해를 넘기며 적과 대치하고 있는데도 세월만 보내며 편하려고만 하니, 상란(喪亂)을 당해서도 이러한데 평시에 있어서야 알 만하다. 오늘날 국가가 이렇게 된 것도 그 유래가 있는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36권 40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670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군사-병참(兵站) / 역사-사학(史學)
○接伴使韓應寅啓曰: "昨夕, 張都司令差備譯官招臣, 臣卽馳詣, 則都司出立房外, 見臣謂曰: ‘我爲爾國之事, 過江留滯, 今至四箇月, 多少苦勞, 不曾厭避。 而聞艾主事毁我於經略曰: 「張某專管運糧之事, 自義州發送天朝糧餉, 幾至二萬六千餘帒, 而庇護朝鮮, 不爲督運, 使沿路州縣, 塡積於山谷, 趁不運到軍前, 到平壤之數, 今僅三千餘帒, 其餘無置處。 以此大軍不免飢餓, 死者相望, 極爲痛憤。」 云, 經略聞此言, 行文於我, 問其虛實。 我自有發明之路, 何懼爲, 當初朝廷發銀數萬兩, 貿米於江西、遼東等地, 今皆輸入於義州, 自義州運到平壤之數, 可至一萬四五千帒, 且今方水陸運來, 自可接濟, 而艾公必欲害人, 構陷如此, 甚可惡也。 我於沿路, 見爾國運糧之人, 男負女戴, 辛苦萬狀, 十分矜惻, 心腸欲裂, 不加催督, 且不行罰。 爾國守令等, 恬不動念, 不卽輸運, 瞞報於我, 皆曰畢運, 此則非我之罪也。 我今到平壤, 已過數日。 見天兵皆持食餘之米, 貿物於街上, 換東換西, 恣行買賣, 飢餓者, 果如是乎? 此則不須言也。 但我曾在義州, 委差爾國官, 齎持二百兩及靑藍布等, 貿鹽於海邊, 而久無消息, 故前日委送林世祿于永柔, 陳此意於國王。 而尙無一包來到, 是何故耶? 爾國陪臣, 但知從事文章, 而了無幹事之人, 凡號令慢不奉行。 此亦侍郞分付之事, 而如是爲之, 我必受責, 奈何奈何? 前者送鳳凰城貿鹽者, 昨已輸到, 散給軍人, 爾國海邊遠於鳳凰城乎? 今者令調度使, 作一文字, 運到之數幾石, 已放之數幾石, 見在之數幾石, 如是開錄踏印而送, 則我之心事, 經略自然知之。 仍招調度使分付。’ 臣答曰: ‘老爺久在小邦, 以糧餉一事爲己任, 多費心力, 小邦不勝感戴。 今雖有情外之謗, 三尺童子所能辨, 不足介懷。 明日國王來此, 當與提督相會, 將此事情可陳於提督, 亦可移咨於侍郞矣。’ 都司曰: ‘雖不移咨, 自當發明。 我之所以如是言之者, 只明我意而已。’"
【史臣曰: "興師四方, 轉餉千里, 關西數州, 實難爲力。 皇恩覃被, 軍食遠資, 所當搬運登時, 無致庚癸有號。 而任事之臣, 不見奉國之誠, 料理失宜, 飛輓多滯, 受授無憑, 數目難詳。 都司之詰責雖嚴, 朝家之命令莫伸。 經年對賊, 玩月偸安, 當喪亂而尙然, 在平日其可想。 國家之有今日, 有自來矣。"】
- 【태백산사고본】 19책 36권 40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670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군사-병참(兵站) / 역사-사학(史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