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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36권, 선조 26년 3월 9일 갑자 8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유성룡이 서울의 적세가 많이 늘었다고 보고하다

도체찰사 풍원 부원군 유성룡이 치계하였다.

"성 안의 적세(賊勢)에 대해 각처에서 정탐하여 올리는 보고가 날마다 들어 오고 있으나 그 말이 일치하지 않습니다. 오직 고언백(高彦伯)의 군병은 모두 서울과 양주(楊州)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가 정탐하여 보고한 내용은 실정을 파악한 내용이 가끔 있으며 또 도망쳐 돌아온 사람들의 공사에 의하면 서울의 적세는 요사이 많은 수가 모였다고 합니다. 당초 명병이 처음 도착하던 날에는 적세가 매우 작아서 숙청문(肅淸門)·장의문(莊義門)·동소문(東小門)까지는 모두 성을 지키는 적이 없어 북쪽은 텅 비었고 남쪽 일대에만 산위에까지 적이 있었는데 그 수가 매우 적었으며, 또한 행주(幸州)의 패전으로 죽은 자가 태반이었으나 지금은 북쪽의 적이 모두 서울로 돌아왔고 원주(原州)의 적도 또한 서울의 흥덕동(興德洞) 백자정(栢子亭) 근처에 와 모이는 등 적병이 모두 모였으며, 남대문 안에서 모화관(慕華館) 근처까지 진을 쳐서 용산창(龍山倉)을 잇는가 하면, 평양에서 도망온 적이 또 성을 쌓고 둔을 쳤으며, 한강에도 적진이 있어 부교(浮橋)를 걸쳐놓고 서로 통행하며 사평원(沙平院)·천현(穿峴) 일로에 적병이 또 많이 출몰하여 수원(水原)·금천(衿川)·청회(菁回) 일대에서 날이면 날마다 분탕질한다고 합니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36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59면
  •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군사-통신(通信)

○都體察使豊原府院君 柳成龍馳啓曰: "城中賊勢, 各處體探所報, 逐日來告, 而所言不一。 唯高彦伯之軍, 皆是京城楊州之民, 故其所哨探之辭, 往往頗得其實, 又據逃回人供稱, 京城賊勢, 近日多數聚會。 當初天兵始到之日, 賊勢甚少, 自肅淸門莊義門東小門, 皆無守城之賊, 北邊蕩然空虛, 只有南邊一帶, 以及山頭有賊, 而甚爲稀踈。 又於幸州之敗, 死者太半, 今則北賊盡入京城, 原州之賊, 亦爲來聚于京城興德洞栢子亭近處, 賊兵皆屯聚, 自南大門內, 以及慕華館近處設陣, 連絡龍山倉. 平壤逃遁之賊, 設城屯據, 漢江亦有賊陣, 橫結浮橋, 以相通行, 而沙平院穿峴一路賊兵, 亦多出沒, 焚蕩於水原衿川菁回之境, 無日無之云。"


  • 【태백산사고본】 19책 36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59면
  •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군사-통신(通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