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반사 이덕형 등을 인견하고 중국군의 동향, 왜적과의 강화 상황 등을 논의하다
상이 접반사 이덕형(李德馨), 조도사 윤승훈(尹承勳), 동부승지 이호민(李好閔)을 인견하였다. 상이 덕형에게 이르기를,
"경은 어떻게 왔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지금 듣기에 제독이 나온다고 하니, 중로에 마중을 나갈까 합니다. 그리고 이 사이에 중대한 기밀의 일이 있으므로 겸하여 청대(請對)하고자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중대한 기밀이란 무엇인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대군이 서로 버티고 있는 지 오래여서 군량이 벌써 다하여 앞으로 지탱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군중에 우리 나라에 이롭지 못한 말들이 많아 장세작(張世爵) 등은 철수하여 돌아갈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키지 않고 돌아가려 하는가?"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5천 병사로 개성을 지키고 5천 병사로 평양을 지키게 한 다음 돌아가려고 한다 합니다. 과연 그렇게 한다면 군량만 허비할 뿐이니, 적이 만약 대거 밀고 온다면 5천 병사가 어떻게 당해 낼 수 있겠습니까. 이는 벽제(碧蹄)에서 한번 패한 뒤에 사기(事機)를 그르친 것이 많았으므로 기세가 꺾여서 모두 철수하여 돌아가기를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일은 제독과 경략(經略)에서 빨리 알리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옳소. 내가 들으니 경략이 강화하고자 한다는데, 우리 나라라면 모르지만 명조(明朝)가 어찌 그럴 수 있겠는가."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벽제에서 불리하기 전에도 설계무(薛繼茂)의 상소가 있었는데 그 말이 참으로 민망하고 절박했습니다. 심유경(沈惟敬)의 말은 그래도 일리가 있는 듯합니다. 신이 일찍이 심유경을 만나보았더니 유경이 ‘나의 처음 생각은 평양의 적을 유인해 내어 형세를 보아 진격하려고 하였으나 제독이 나의 계획을 쓰지 않아 대적들을 도망가게 했고 천병(天兵)만 손상시켰으므로 나는 매번 한스럽게 여긴다. 지금이라도 제독이 나의 계략을 쓴다면 서울의 적은 아마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하기에, 신이 ‘전날 기성(箕城)052) 의 적으로 하여금 명령을 듣고 감히 나오지 못하게 하여 우리 임금과 신하가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노야(老爺)의 혜택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귀국의 토벌이 우레처럼 감행되어 적의 태반이 사살되었으나, 그들의 성품이 흉악하고 교활하니, 어찌 노야의 말이 그들에게 먹혀 들겠는가.’ 하니 ‘가슴속에 나름대로 천변 만화의 술법이 있는데 병가(兵家)의 일을 어찌 하나로 논할 수 있겠는가.’라고 답하였습니다. 그리고 낙상지(駱尙志)를 통하여 남군(南軍)의 말을 들었는데, 여러 장수들이 모두 적을 치지도 않고 또 회군(回軍)하지도 않으므로 불평하는 자가 많아 모두가 말하기를 ‘5천 명으로 급히 공격한다면 승리하지 못할 게 없다.’고 합니다. 신은 들으니 천진(天津)과 계양(薊陽) 등지에 수비하는 포수만도 1만 5천이라고 합니다. 속히 청하여 온다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호민(好閔)이 아뢰기를,
"경략의 말이 천진의 포수는 방수에 필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원(寧遠)에 주둔하였던 5백 군사는 어디로 갔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지금 근방의 여러 고을에 흩어져 있습니다. 옛말에 ‘군사가 지나간 곳에는 가시가 돋는다.’라고 하였으니, 군량이 떨어졌는데도 대주지 않아 군사가 지쳐 쓸 수 없게 되므로 우리 나라의 생령들은 저절로 미란(糜爛)에 이를 것입니다."
하고, 승훈이 아뢰기를,
"평양의 군량이 벌써 다 떨어져 내일을 지낼 것 같으면 이어댈 대책이 없겠으니 참으로 민망합니다. 신이 매번 나아와 아뢰고자 하였으나 조도(調度)뿐만 아니라, 군량의 방출까지 겸하여 살피기 때문에 나아와 아뢸 겨를이 없었습니다. 대개 중국의 군량 도착은 개성에 온 것이 1만여 대(帒)이고, 평야에 온 것이 1천여 대이나, 이처럼 고갈된 때에는 함부로 쓸 수 없는 것이며 또한 중국에서 군량을 내보낸다는 소식이 있는데 어느 곳에서 싣고 오는지도 알 수 없고 도착의 지속(遲速)도 알 수 없습니다. 군량을 방출할 때에는 거듭 받는 사람이 많고 또 남은 수효의 요(料)를 덜어 내어 명주 필을 구매하기도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장이 금하지 않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대장이 모르는 듯합니다. 그리고 명장(明將)이 만일 급히 구원해 줄 마음이 있다면 군량이 다소를 물을 텐데, 그 뜻을 보니 모르는 체하는 것 같으니, 이는 군량이 다되면 회군(回軍)하려는 생각인 듯합니다. 근일 이래로 소나무를 베어 목책을 짓는 것은 왜적의 소행과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석성(石城) 밖에 목책을 짓는다는 말인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명장은 석성이 너무 넓다고 하며 석성 안에 목책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량쌓을 집을 크게 짓고 있으니 그 뜻을 알 수 없습니다. 이여백(李如栢)은 또 며칠전부터 환도(環刀) 등의 물건을 만들며 ‘내가 할 일은 이 한 가지뿐이다.’ 합니다."
하고, 승훈이 아뢰기를,
"남쪽 사람은 군량을 배급하는 데도 난잡하지 않으나, 요동과 계양의 군사는 달자(㺚子)나 다름없어 장관도 마음대로 가져 가도록 내버려두므로 금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고 명장이 말하기를 ‘만약 군량이 끊어진다면 반드시 인신 문자(印信文字)로 진정(進呈)하겠다’ 하니, 그의 뜻은 이것을 트집잡아 군사를 돌이키려는 계획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개 절제(節制)는 경략에게 있는데, 경략이 만약 진병하게 한다면 될 수도 있겠지만, 유 원외(劉員外)053) 가 처음부터 화의(和議)가 있었다 하니 염려스럽다. 경략이 만약 강화하고자 했다면 그가 나온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비록 강화를 하고자 하더라도 그 형세로 보아 반드시 와야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강화한다면 적이 군사를 이끌고 물러가겠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강화를 한다면 반드시 물러갈 것입니다. 국내의 백성이 전쟁에 시달리고 군량 운반에 지친 데다 농사철이 벌써 다하여 영농을 전부 놓치게 되었으니, 오늘날의 형세는 점점 초란(焦爛)에 이르고 있습니다. 강화의 일에 대해 우리 나라에서는 비록 말할 수 없으나 만약 강화로 인하여 지금이라도 물러간다면 영농은 시기에 댈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주본(奏本)을 보았는데 벽제의 싸움을 이긴 것으로 말한 것은 지극히 미안하니 피차 살상이 반이라고 하면 가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명병이 일제히 진격을 한다면 일은 쉽게 해결될 수 있으나 한 번의 실패에 겁을 먹고 나아가 싸우려 하지 않습니다. 때문에 남군(南軍)들이 제독을 질타하는 자는 반드시 ‘송달자(鬆㺚子)가 저들을 두려워하여 싸우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어떤 단자(單子)를 이호민에게 주며 이르기를,
"이것이 무슨 문서인가?"
하니, 호민이 아뢰기를,
"이것이 풍 상공(馮相公)054) 이 수급(首級)을 청한 체문(帖文)입니다. 이 사람이 심희수(沈喜壽)를 만나보고 수급을 얻고자 하는 것이 매우 간절하였고, 송 시랑(宋侍郞)도 얻으려 한다고 말하자, 희수가 ‘이것이 무슨 말인가. 시랑은 명조의 대장으로서 어찌 이러한 요구를 할 수 있는가.’ 하니 ‘네 말은 어찌 그리 어리석은가. 시랑이 두 아들을 두었는데 문재(文才)도 없고 무재도 없으니, 그 아들을 벼슬시키려는 것이 매우 절박한데 시랑이 어찌 그 뜻이 없겠는가.’ 하고 답하였습니다."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송 시랑이 봉황성(鳳凰城)에 있을 때 그의 수하로 군공(軍功)에 참여된 자가 많았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시랑이 봉황성에 있을 적에도 이런 일이 있었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제독은 경략의 이런 소행에 노하여 ‘이러고도 도리어 나에게 논공(論功)이 고르지 못하다고 하는가?’ 하며 매도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양성 안에 남아 있는 중국 병사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현재 있는 수효는 2만 6천여 명에 지나지 않는데, 심유경의 말에 의하면 북군으로서 돌아간 자가 6천이나 된다고 합니다."
하고, 호민이 아뢰기를,
"군량을 이어대기가 어려울 뿐만 아니라, 중국의 군량을 수송하는 것에 이르러서도 좋은 계책이 없어서 중간의 침체가 많으니 민망스럽습니다."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개성부의 화차(火車)를 평양으로 옮겨온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다 군사를 후퇴시키려는 뜻인가? 목책을 많이 설치하였다고 하는데 어느 곳에 설치하였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장경문(長慶門)에서 칠성문(七星門)까지 가로질러 설치하였습니다. 평양성을 공격할 때 신의 군관(軍官)이 보았는데 왜병 5인이 칼을 휘두르며 나오는 것을 요병(遼兵)이 추격하다가 상해를 입게 되자 남병 5인이 분격하여 다 섬멸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쪽 사람의 말이 ‘남쪽에도 논이 많은데 아무리 여름철이지만 어찌 싸우지 않겠는가.’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병이 머물러 있는 수는 얼마인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오유충(吳惟忠)이 거느린 군사가 3천이고 낙상지(駱尙志)가 거느린 군사는 1천인데, 낙상지는 ‘군병이 반드시 1만 명에 찬 뒤라야 싸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합니다. 대개 낙상지의 사람됨은 표리가 한결 같으나 심유경은 모든 일에 기밀이 많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서 빨리 자문(咨文)을 지어 대신을 보내어 진병한 것을 간곡하게 빌어야 하겠다."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중국 장수가 ‘그대 나라는 대소 신료들이 범연히 이럭저럭 지내고 있다. 신하가 이와 같으니 상망(喪亡)하게 되는 것이 괴이할 것 없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이 옛 습관은 그러하였다. 지금부터는 중국 사람의 일을 본받아 그 옛 습관을 고쳐 아랫 관리에게만 맡기는 일이 없이 친히 일을 집행해야 되겠다. 그러나 친히 일을 집행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으면 사람들이 반드시 체통을 잃었다고 비웃을 것이다. 내가 의주에 있을 때 들으니 낙 참장(駱參將)055) 은 수레를 만들 적에 직접 그 일을 하면서 조금도 진중한 기색이 없었다 하더라."
하고, 또 이르기를,
"어떤 이는 장수를 바꾼다는 의논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장수를 바꾼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나, 남쪽 사람의 말이 반드시 원수(元帥)가 나와야 된다고 합니다. 제독은 중신(重臣)으로서 나왔는데 어찌 하루아침에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중원(中原)으로 돌아간다면 보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호민이 아뢰기를,
"어떤 이는 ‘제독은 자신을 구제하기에도 겨를이 없는데 무슨 뜻으로 진취(進取)하겠는가’ 하니, 참으로 불행스런 말입니다."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낙상지는 ‘나는 황제만이 두려울 뿐 그외에는 두려울 것이 없다. 황제의 명이 있다면 나는 군사를 거느리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진격할 것이다.’ 합니다. 낙상지는 체구가 매우 비대하여 평양성에 오르던 날 적들이 던진 돌에 눌리기까지 하였으나 끝내 큰 상처는 입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기운이 세고 용감한 사람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돌에 상처를 입었다니 무슨 말인가?"
하매, 덕형이 아뢰기를,
"성에 오를 때 왜적들이 돌을 던졌기 때문에 상처를 입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개 제독은 진격한다는 말이 없는가? 황제의 명을 받고 왜적을 치러 와서 어찌 무단히 후퇴하여 돌아갈 수 있겠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군량이 다하면 비록 황제의 명이더라도 어찌 진군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호민이 아뢰기를,
"혹시 덕형이 말과 같이 적을 성밖으로 유인하고서 대군을 성밑에 진주시킨다면 괜찮지만 그렇지 않다면 도리어 빠져들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비록 강화하자고 해도 우리의 도리에 있어서는 강화할 수 없다는 뜻으로 말해야 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36권 3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52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군사-병참(兵站)
- [註 052]기성(箕城) : 평양을 말함.
- [註 053]
○上引見接伴使李德馨, 調度使尹承勳, 同副承旨李好閔。 上謂德馨曰: "卿何以來?" 德馨曰: "今聞提督出來, 將往(逆)〔迎〕 于中路。 此間且有機關所係之事, 故兼欲請對。" 上曰: "所謂機關者, 何事?" 德馨曰: "大軍相持日久, 糧餉已竭, 將不能支吾。 且軍中, 多有不利我國之言, 張世爵等, 多有撤歸之計。" 上曰: "欲不守而歸耶?" 德馨曰: "欲以五千兵守開城, 五千兵守平壤, 而還歸云。 果如是, 徒費糧餉而已, 賊若大擧長驅, 則五千兵, 何可當也? 蓋碧蹄一敗之後, 事機多誤, 氣勢摧挫, 皆思撤歸。 今日之事, 莫如告急於提督經略。" 上曰: "卿言是也。 予聞, 經略欲與講和云, 我國則已矣, 天朝豈有此理?" 德馨曰: "碧蹄不利之前, 尙有薛繼茂之疏, 其言誠爲悶迫矣。 若如沈惟敬之所謂, 則似亦有理。 臣曾見沈惟敬, 惟敬曰: ‘俺之初計, 欲誘出平壤之賊, 觀勢進擊, 而提督不用吾計, 使大賊逃去, 天兵折損, 俺每以爲恨。 提督, 今若聽用我謀, 則京城之賊, 庶可圖也。’ 臣謂曰: ‘前日使箕城之賊, 聽命不敢出, 小邦君臣, 賴以得全者, 無非老爺之賜也。 至於今日, 則天討雷行, 太半厮殺, 賊性兇狡, 豈可以口舌, 行於其間乎?’ 答曰: ‘胸中, 自有千變萬化之術。 兵家之事, 豈可以一槪論也?’ 且因駱尙志聞南軍之言, 諸將皆言旣不擊賊, 又不回軍, 怏怏者多, 皆言: ‘若以五千人急擊, 則蔑不濟矣。’ 臣聞天津、薊陽等地, 有防戌砲手一萬五千云, 汲汲請來, 則可用也。" 好閔曰: "經略云: ‘天津砲手, 切於防戊, 必不許也。’" 上曰: "寧遠五百屯駐之兵, 何處去耶?" 德馨曰: "時方散處于傍近諸邑。 古語曰: ‘師之所過, 荊棘生焉。’ 糧盡不繼, 師老不用, 我國生靈, 自至縻爛〔糜爛〕 。" 承勳曰: "平壤之糧, 已爲匱乏, 若過明日, 則繼用無策, 誠爲悶迫。 臣每欲來啓, 而不但調度也, 兼察放糧, 故無暇來啓。 大槪天朝糧餉之到開城者萬餘帒, 在平壤者千餘帒, 而當此匱竭, 不得擅用, 且天朝軍糧有出來消息, 而不知何地裝載, 且不知到泊遲速矣。 放糧之際, 人多疊受, 且除出餘數之料, 換貿紬疋。" 上曰: "大將不禁耶?" 德馨曰: "似非大將所知也。 且天將倘有急救之心, 則當問糧餉多小, 而觀其意, 有若不知者然, 蓋糧餉盡, 則欲爲回軍之意也。 自近日來, 斫伐松材作木柵, 如倭賊所爲矣。" 上曰: "石城之外, 爲木柵耶?" 德馨曰: "天將, 以石城爲太闊, 爲木柵於石城之內。 且廣營儲糧之家, 其意未可知也。 李如栢. 又自頃日打造環刀等物曰: ‘吾之所爲, 只是一事。’" 承勳曰: "南人, 則給糧之際, 亦不雜亂, 而遼、薊之卒, 與㺚子無異, 將官亦任其恣取, 難於禁斷。 且天將云: ‘若糧絶, 必將印信文字進呈。’ 云, 其意欲執此, 爲班師之計也。" 上曰: "大槪節制在經略, 經略若令進兵, 則可爲也, 而劉員外自初有和議, 可慮也。 經略若欲講和, 其所以出來者何意?" 德馨曰: "雖欲和, 其勢必來也。" 上曰: "賊若和, 則必(卷)〔捲〕 兵而退耶?" 德馨曰: "和則必退。 域中之民, 困於師旅, 疲於運糧, 農月已盡, 耕農專失, 今日之勢, 漸至焦爛。 和之一事, 在我國雖不可言, 若因天將講和, 及今退歸, 則耕農可以及時矣。" 又曰: "臣見奏本中碧蹄之戰, 以勝捷爲言, 極爲未安, 如曰殺傷相半, 則庶乎其可也。" 上曰: "是也。" 德馨曰: "天兵齊進, 則事可易濟, 而怯於一跌, 不欲進戰。 故南軍叱提督者必曰: ‘鬆㺚怕予, 他不戰。’ 云矣。" 上以一單子與李好閔曰: "此何樣文書耶?" 好閔曰: "此憑相公請首級帖也。 此人要見沈喜壽, 欲得首級甚切, 且言宋侍郞亦欲得之。 喜壽答曰: ‘是何言也? 侍郞, 以天朝大將, 豈有如是求索耶?’ 答曰: ‘爾言一何愚也。 侍郞有二子, 而非文非武, 欲官其子甚切, 侍郞豈無其意也?’ 云矣。" 德馨曰: "宋侍郞在鳳凰城. 而其手下多預軍功云矣。" 上曰: "侍郞在鳳凰城. 亦爲此事耶?" 德馨曰: "提督怒經略所爲如此, 憤罵曰: ‘如是而反謂我論功不均乎?’" 上曰: "平壤城中. 天兵留在者幾許耶?" 德馨曰: "時在之數. 不過二萬六千餘, 沈惟敬言, 北軍之退還者六千云。" 好閔曰: "非但難措繼糧, 至於輸運天糧, 亦失善策, 中間多滯可悶。" 德馨曰: "開城府火車, 移來于平壤云。" 上曰: "此皆退師之意耶? 木柵多設云, 設於何處耶?" 德馨曰: "自長慶門, 至七星門. 橫截設柵。 平壤攻城時, 臣之軍官見之, 倭兵五人揮刃出來, 遼兵則追之被害, 南兵五人奮擊盡勦云。 且南人之言曰: ‘南方, 亦多水田, 雖夏月, 亦豈不戰乎?’ 云。" 上曰: "南兵留在者幾何?" 德馨曰: "吳惟忠所領三千, 駱尙志所率一千。 駱言: ‘軍兵不必滿萬, 然後可戰。’ 蓋駱之爲人, 表裏如一, 沈則凡事多機密。" 上曰: "急急爲咨, 遣大臣懇乞進兵, 可也。" 德馨曰: "天將言: ‘爾國大小之臣, 泛然悠然。 有臣如此, 無怪乎喪亡之歸也。’" 上曰: "我國之人, 舊習則然矣。 自今, 學中朝人之事, 變其舊習, 親自執役, 無委下吏, 可也。 然如有親執之人, 則人必笑其失體矣。 予在義州時, 聞駱叅將造車之時. 親持其役, 少無持重云矣。" 上曰: "或云有易將之議云, 然耶?" 德馨曰: "易將之說, 未之聞也, 但南人言, 當出元帥云。 提督, 以重臣出來, 豈可一朝遞易? 然入歸中原, 則恐難保也。" 好閔曰: "或云: ‘提督自救不暇, 何意進取?’ 甚不幸之言也。" 德馨曰: "駱尙志言: ‘俺只畏皇帝, 其餘不足畏。 若有皇上之命, 則我率我軍, 雖死必擊。’ 駱之爲人, 體甚肥大, 而於平壤登城之日, 爲投石所壓, 終無大傷, 眞壯勇之人也。" 上曰: "所謂傷於石者, 何也?" 德馨曰: "登城之時, 倭賊以石投之, 故被傷云矣。" 上曰: "大槪, 提督無進勦之言乎? 奉皇上之命, 來討倭賊, 豈可無端退歸乎?" 德馨曰: "糧餉盡, 則雖有皇上之命, 豈能進兵乎?" 好閔曰: "脫或如德馨所言, 誘賊出城, 以大兵進駐于城下, 則可矣。 不然, 或反見陷也。" 上曰: "彼雖言和, 在我之道, 當言不可和之意, 可也。"
- 【태백산사고본】 19책 36권 3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52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군사-병참(兵站)
- [註 0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