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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 2월 30일 을묘 3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황기가 송 경략이 평양으로 후퇴한 이유 등 경략의 의견을 아뢰다

공조 정랑 황기(黃沂)송 경략(宋經略)의 문례관(問禮官)으로 의주에서 돌아와 아뢰기를,

"경략이 지난 달 24일에 강을 건너오자 신이 원접사(遠接使) 윤근수(尹根壽), 영위사(迎慰使) 정곤수(鄭崐壽) 및 목사 황진(黃璡) 등과 예를 행하였습니다. 경략이 말하기를 ‘국왕의 위로연은 베풀 필요가 없고 평양에 도착하여 국왕과 만날 때에도 역시 잔치를 열 것 없다. 먼저 개성에 가서 회복되기를 기다려 돌아올 때에 잔치를 받겠다. 대군이 개성에 있을 때 폐사(斃死)한 말이 1만여 필이나 되므로 부득이 잠시 평양으로 되돌아가 말을 먹이며 쉬게 하다가 다시 전진하려는 것이지 어찌 철병할 리가 있겠는가? 지금 내가 직접 개성에 독전(督戰)하려는 것이니 내가 있는 한 다시 염려하지 말라. 또 내가 이미 이러한 뜻으로 제독에게 자문을 보냈으니 오래지 않아 전진하여 적을 소탕할 것이다. 또 양경(兩京)은 이미 회복되었고 평정되지 않은 것은 경성에 있는 적인데 이 왜적들을 진격하여 소탕하기는 어렵지 않다. 다만 그대 나라 사람들이 적진에 투항했다고 하는데 어찌 이것이 본의였겠는가? 죽고 사는 이해에 쫓겨 부득이 이런 계책을 냈을 것이다. 만약 함부로 이들을 죽인다면 저 백성들은 필시 죽을까 두려워서 내부(來附)하지 않고 모두 도망하여 적을 따라갈 것이다. 만약 즐겨 반역하여 적을 도와 악을 행한 자들이야 죄를 주지 않을 수 없겠지만 그 나머지 조무래기들은 모두 관대히 용서하여 안집(安集)시키는 데 힘쓰라. 이러한 뜻을 마땅히 국왕에게 아뢰어 알게 하라. 그리고 초무(招撫)하는 패문(牌文)을 쓰고, 국왕의 인신(印信)을 찍어 여러 곳에 게시하여 초무하는 뜻으로 효유(曉諭)한다면 살기를 구하는 저 백성들이 먼저 나의 효유하는 패문을 보고 다시 국왕의 고시(告示)를 보게 된다면 반드시 다투어 가면서 믿고 태도를 바꿀 것이다. 만약 이것을 힘쓰지 않아 백성들을 모두 잃는다면 비록 회복한들 누구와 더불어 지킬 것인가? 즉시 거행함이 마땅하다.’고 하였습니다. 경략의 전진할 의사를 비록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장 기고(張旗鼓)047) 의 말을 들으니 ‘동쪽으로 갈 것이니, 속히 인부 2백 명과 말 1백 필을 주달하라.’고 했으니 그가 의주에 머무는 기간은 수삼 일에 불과할 듯합니다."

하였다. 예조가 이에 따라 초유(招誘)하는 방문을 각처에 내걸었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59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50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註 047]
    장 기고(張旗鼓) : 이름은 장구경(張九經).

○工曹正郞黃沂, 以宋經略問禮官, 還自義州, 啓曰: "經略, 前月二十四日過江, 臣與遠接使尹根壽, 迎慰使鄭崑壽及牧使黃璡等行禮。 經略曰: ‘國王慰宴, 不必設行, 到平壤, 與國王相會, 亦不擺宴。 前往開城, 待恢復, 回來之時, 當受宴。 大軍在開城, 馬之顚斃者, 萬餘匹, 玆不獲已, 暫回平壤, 喂養休息, 欲爲更進, 豈有退師之理? 今我親往開城, 將欲督戰, 有我在, 不復爲念。 且我已以此意, 送咨提督, 不久當進勦。 且兩京旣復, 所未平者, 京城之賊也, 此賊不難進勦。 但爾國之人, 投入賊中, 豈其情哉? 迫於死生利害, 而出此不得已之計也。 若從而殺之, 彼民必畏死而不爲之來附, 盡逃而隨賊矣。 若樂爲叛附, 助賊爲惡者, 固不可不罪, 其餘脅從者, 幷爲寬貸, 唯務安集。 此意, 宜啓知國王。 書招撫牌文, 踏國王印信, 廣榜于諸處, 曉諭招來之意, 則彼求活之民, 先見我牌諭, 又見國王示告, 則必爭信而革面矣。 若不務此, 而盡失其民, 則雖爲恢復, 誰與爲守? 宜劃卽擧行。’ 經略前進之意, 雖不能的知, 而聞張旗鼓之言, 則: ‘當東行, 須速調人夫二百名, 馬一百匹。’ 云。 其留義州者, 似不過數三日也。" 禮曹因此, 以招誘搒文, 張掛各處。"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59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50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