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형 등을 인견하고 이 제독이 탄핵을 받은 일, 중국 남·북군의 갈등을 논의하다
접반사 지중추부사 이덕형(李德馨), 평안도 감사 이원익(李元翼), 좌승지 홍진(洪進)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뜻밖에 제독이 탄핵을 받아 우리 나라가 불행하게 되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천하의 대장으로서 이미 중임을 맡았는데 중원에서 어찌 경솔히 논할 리가 있겠으며, 제독 역시 천하의 중임을 맡았는데 어찌 중도에 버리고 갈 리가 있겠습니까? 대개 남병과 북병의 대립 문제가 가장 염려스러우니, 남쪽 사람들은 군세를 많이 부리고 북쪽 사람들은 형세가 외롭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인데, 이후로는 다시 다른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제독에게는 마땅히 적의 형세가 잔약하니 반드시 큰 공을 이룰 것이라는 뜻을 간절히 말해야 합니다. 또 송 시랑에게는 자문(咨文)을 보내 군사를 청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랑에게 청병하는 것은 옳거니와 조정에 청병하는 것은 불가하지 않겠는가? 용병(用兵)의 다소는 대장에게 달려 있고, 본국에서는 단지 군량과 마초의 지공만 염려할 뿐이다. 만약 부득이할 경우 시랑에게 청병하는 것은 마땅하겠지만 조정에 청병하는 것은 부당하다. 그렇게 되면 조정에서는 필시 대장은 어찌하여 청병을 안 하고 국왕이 청병하는가 의심할 것이다. 혹은 변무(辨誣)해야 한다고 하나 이 또한 온당하지 못하다. 그 사실이 현저하게 드러나지 않았는데 무엇을 근거로 변무하겠는가? 시랑에게 청병하는 일은 옳지만 건너뛰어 조정에 청병하는 일은 사체가 온당하지 않다. 경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중국 장수가 매양 시랑에게 청병하라고 말했으니 조정에 직접 청병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또 청병하는 일은 제독과 시랑과 주청해야지 본국이 청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형세가 매우 어렵게 된다면 이것을 고려하여 청병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덕형이 아뢰기를,
"전에 제독이 우리 나라 사람을 살려 낸 일을 주문(奏聞)했는데, 이렇게 진달한다면 ‘조선인의 머리를 참했다.’는 사실도 거의 발명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험삼아 이러한 뜻을 은근히 풍기기를 ‘대인의 뜻이 이와 같기 때문에 이미 시랑에게 사람을 보냈다. 대인께서 기필코 조정에 청려하신다면 직접 조정에 다시 청병하심이 옳다.’고 하여 변죽을 울려 봄이 가하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제독은 반드시 시랑에게 청하라 할 것입니다. 또 성중의 여러 장수들인 낙상지(駱尙志)·오유충(吳惟忠) 등은 매양 신에게 ‘모름지기 진격하는 일과 백성들에게 농사철을 잃지 않도록 하는 일로 급히 송 시랑에게 자문을 보내야 한다.’고 했습니다. 만일 적의 형세가 여러 날을 끌어서 외지에 있는 적이 경성으로 와서 합세한다면 대사는 틀려지게 됩니다. 또 얼음이 녹아 물길이 통하게 되면 양호(兩湖) 또한 염려가 됩니다. 만약 한강을 건너 일대(一帶)를 한계로 삼는다면 어찌할 방도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저들 왜적이 매양 도망간다고들 하나 양호로 내려가서 난을 꾸미려는 것은 아닌가? 왜적은 성질은 포악하고 간사해서 믿을 수가 없다. 어찌 한번 패했다고 허둥지둥 스스로 물러가겠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그 대군은 패하지도 않았으니 달아날 리 만무합니다."
하고, 덕형이 아뢰기를,
"소신이 제독에게 이르기를 ‘우리 나라 인민은 양주(楊州) 삼각산 근처에서 굶어 죽은 자들이 많은데 만약 군사를 돌린다면 잔약한 백성들이 의지할 곳이 없게 된다. 소방은 양호의 군량을 믿는데, 적이 만약 군사를 증원하여 양호로 내려간다면 어떻게 해볼 수도 없을 것이다.’ 하고, 이러한 뜻을 심 유격(沈遊擊)에게도 말하니 두 장수가 가슴을 치며 사례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격과 제독은 서로 화합하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어찌 화합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고, 원익이 아뢰기를,
"심이 계획하고 있는 바와 왜적의 정세를 제독이 물어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 서로 화합하지 않는 듯합니다."
하고, 덕형이 아뢰기를,
"유격은 곧 남쪽 장수입니다. 매양 편지로 나에게 보내면서 하는 말이 ‘내가 그대 나라를 위하여 감히 사력을 다하지 않으랴마는 제독이 이렇게 하니 어쩌겠는가?’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에 귀순한 달자(㺚子)들은 간혹 우리 나라 사람을 만나면 머리를 베어 머리털을 깎는다고 하는데 그런가? 이와 같은 일들을 제독이 어찌 다 알 수 있겠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만나면 반드시 참하여 바칩니다. 이민(吏民) 및 성중의 남녀로 왕래하던 사람들이 머리를 잘리고 머리털을 깎인 자가 또한 많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은 일에 대해 남쪽 장수들도 그 사유를 아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북군이 참획한 것을 남군은 반드시 조선인의 머리를 참획했다고 지목합니다. 원 주사(袁主事)가 제독과 상대하여 ‘노야(老爺)께서는 어찌하여 이같은 일을 하는가?’ 하니, 제독이 노하여 ‘가증할 노화상(老和尙)이 어디서 그런 말을 들었는가?’ 하면서 팔을 걷어 붙이고 크게 꾸짖으니, 원황(袁潢)이 ‘이것은 바로 공론(公論)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뒤에 원황이 잘못 들었음을 사과하니, 북쪽 장수 역시 머리를 조아려 사죄했다고 합니다. 원황의 하인이 ‘주사의 동년(同年)038) 2백여 인이 대각(臺閣)에 벌여 있으니 필시 이 소문을 들을 것이고 소문을 듣게 되면 반드시 큰일이 생길 것이다. 또 주사가 낙상지(駱尙志)에게 글을 보내기를 「논공한 모든 사실을 갖추 써서 보냈는데 공들을 수공(首功)으로 하여 조종에 보고하였으니 공들은 큰 공을 누릴 것이오, 송 시랑 역시 이미 알고 있소. 」라고 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들이 공을 다투는 사실은 우선 덮어두고 보자. 이러한 일은 옛날에도 그러했다. 공정하게 논한다면 남병의 공이 앞서는가 아니면 북병의 공이 앞서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남병 중 오색의(五色衣)를 입은 자들이 먼저 성에 올라 뛰어 들어갔으니 그 공이 가장 중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에 오를 때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던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이여백(李如栢)이 이르기를 ‘이미 사교(沙橋)를 만들어 놓았고, 또 빈섬[空石]을 많이 모아 모래를 채워 쌓아 놓았다.’고 했는데 남쪽 장수들은 대답도 하지 않았으며 끝내 그 다리는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성벽의 돌을 붙들고 오르는데 적이 위에서 목을 베면 남병은 손으로 그 시체를 내려놓고 계속해서 올라갔습니다. 적군의 머리 하나를 베는 데 남병의 사망자는 5∼6인이나 되는데도 앞다투어 들어가서 무수히 성에 올랐습니다. 북병은 문을 연 뒤에야 말을 타고 달려들어가서 죽은 왜적의 머리를 벨 뿐이었습니다. 전일 조 총병(祖總兵)의 처소에서 자세히 물어보니 ‘기병은 단도만 사용하고 보병은 긴 창으로 찌른다. 적이 물가나 산골짜기로 흩어져 달아나며 싸우면 기병은 길이 험해 추격하지 못하고 보병이 뒤따라가서 그들을 친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덕형이 아뢰기를,
"제독은 매양 남병의 공을 말하는데, 이여백·장세작(張世爵) 등은 성품이 모두 순하지 못하여 매양 헐뜯고, 또 왕필적(王必迪)의 사람됨을 헐뜯으니 남군이 이 때문에 원망합니다. 제독이 개성에 이르니, 여러 장수와 유격(遊擊) 이하는 모두 꿇어앉아 명령을 듣는데 왕필적만은 홀로 서서 말하기를 ‘노야는 지혜롭지도 않고 신의도 없으며, 어질지도 않기가 이와 같은데 제대로 용병할 수 있겠는가?’ 하니, 제독이 노하여 ‘무슨 말이냐?’ 하니, 필적이 ‘평양성을 공격하던 날 미리 영을 내리지도 않고 싸웠기 때문에 군사들은 미처 밥을 지어 먹을 시간이 없었다. 장수된 사람으로서 군사들의 배고픈 것을 생각하지 않고 급하게 성을 공격하게 하였으니 바로 어질지 못한 것이다. 성을 포위하던 날 내가 군사들의 뒤에서 들으니 노야께서 성밖에서 말을 달리며 독전(督戰)하기를, 먼저 성에 오르는 자에게는 은 3백 냥을 주거나 도지휘 첨사(都指揮僉使)를 제수한다 해놓고 지금 먼저 성에 오른 자가 많은데 3백 냥의 은은 어디에 있으며, 지휘첨사는 또 어디에 있는가? 이것이 신의가 없다는 것이다. 대군은 전진도 하지 않고 단지 선봉만을 이끌고 가서 공격하다가 한번 차질이 있자 기세가 꺾여 물러났으니 이로써 말한다면 지혜롭지 못함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이같이 하고도 성을 공격할 수 있겠는가?’ 하니, 제독이 그 말을 듣고 즉시 은을 내어 남병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말 영을 내리지 않고 군사를 출동시켰는가?"
하지, 원익이 아뢰기를,
"전일에 날짜를 정하여 명일 전쟁을 하기로 한다고 했으나 그 시간을 말하지 않았다가 갑자기 거사했으므로 군사들이 미처 식사를 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고, 덕형이 아뢰기를,
"왕필적의 말을 들으니 ‘한번 차질이 있었다고 급하게 군사를 후퇴시키는 것은 불가하다. 어찌 이와 같이 하고서도 대장이 되겠는가?’ 하였습니다. 필적 등이 임진(臨津)에 머물게 되자 이기수(李麒壽)에게 이르기를 ‘우리들은 병마를 믿는데 지금 이와 같으니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라고 했다 합니다."
하고, 원익이 아뢰기를,
"남병은 반드시 기병으로 성원(聲援)을 삼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제독이 혼자 개성으로 돌아와서 즉시 왕필적을 달래기를 ‘남병은 공로가 많지만 홀로 노고가 많다. 속히 돌아오라.’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왕은 그뒤 어떻게 되었는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그뒤에 제독이 패(牌)를 보내 노숙(露宿)하는 괴로움을 위로하고 모두 퇴군하도록 명하여 척(戚)·왕 등 여러 장수들이 각기 군마를 거느리고 왔습니다. 제독이 또 친필로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자는 그곳에 머물라.’고 하였습니다. 대개 파주(坡州)의 일은 장세작과 이여백이 한 것입니다."
하고, 원익이 아뢰기를,
"근거없는 말이기 때문에 장계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들으니 ‘송 시랑이 즉시 조정에 주본(奏本)을 올렸기 때문에 논핵했다.’ 하였습니다. 제독이 시랑에게 자문을 보냈는데 시랑이 자문을 가지고 간 사람을 곤장 30대를 때렸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원익이 또 아뢰기를,
"조정이, 남군으로 하여금 북군 장수의 절제를 받게 했기 때문에 이러한 것이라고 합니다. 또 남군에게 따로 원수(元帥)를 보내서 그 군대를 거느리게 한다고 합니다. 이 말들은 구전(口傳)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원수는 이미 차출되었다고 하던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그들의 말로는 ‘나이 60여 세인 사람이 원수가 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은 중국 사람이 한 말인가? 설사 남군 장수가 온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제독의 절제를 받을 것이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만약 원수를 내보낸다면 남북의 두 장수가 각자 절제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필시 분심에서 나온 말일 것입니다."
하였다. 홍진(洪進)이 아뢰기를,
"양원(楊元)의 5천 병력은 실로 다 정병입니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3천 명은 여기에 온 병력이고, 5천 명은 요서(遼西)를 방위하는 병력이라 합니다. 만약 시랑에게 청한다면 혹시 보내 줄는지도 모릅니다."
하고, 덕형이 아뢰기를,
"그 수하인들과 서로 이야기를 했는데, 제독이 집에서 온 편지를 보고 기뻐하지 않는 기색이 많이 있더니, 말하기를 ‘나의 일은 공이 될지 죄가 될지 알 수 없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보산(普山)에 왔을 때 가슴을 만지며 수심을 띠고 즐거워하지 않는 기색이 있었다 하는데 이 또한 그 까닭을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유충(吳惟忠)은 명장인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낙상지(駱尙志)와 명성이 나란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유충이 성에 먼저 올라갔다는 말이 사실인가?"
하니, 원이기 아뢰기를,
"두 장수가 모두 먼저 올라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들 장수는 개성에 있는 군대인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개성에 만약 이들 두 군대가 있었다면 벽제(碧蹄)의 전투에서 어찌 차질이 있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적이 매양 절강(浙江)의 소주(蘇州)·항주(杭州) 등지를 침구하였을 때 이들 군대가 없지 않았을 터인데 여러 차례 함락된 변이 있었던 까닭은 무엇인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중원(中原) 본토인(本土人) 여응주(呂應周)란 자가 글로 써서 보이기를 ‘가정(嘉靖)039) 연간에 왜적이 소주·항주를 함락했었으나 그뒤에 방비를 잘했기 때문에 지금은 걱정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신의 소매를 잡고 ‘이런 넓은 소매로 전쟁터에서 싸울 수 있겠는가?’ 하고, 갓을 가리키면서 ‘이런 싸맨 머리로 전쟁터에서 싸울 수 있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시를 지어 보이기를,
시부는 진나라의 유풍이요,
병서에 대해 온 나라가 모른다.
높다란 관이 무인의 고깔이요,
넓은 소매 옷의 군복일세.
무딘 창은 섶나무와 같이 썩고,
성을 쌓은 높이는 어깨와 가지런하네.
왜구가 이르렀다는 소문을 듣자,
팔도가 조각 구름처럼 흩어졌네.
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원익이 아뢰기를,
"소신이 김명원(金命元)과 같이 앉아 있을 때 신들의 갓과 소매를 가리키고 웃으면서 ‘이렇게 하고서 왜적을 제압할 수 있겠는가?’고 하였습니다."
하고, 원익이 또 아뢰기를,
"이후로는 군사들을 먹이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양남(兩南)에는 곡식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으나 개성·평안(平安) 일로는 물력이 탕갈되어 지공 또한 어려워 어떻게 조처할 방도가 없습니다. 만일 양호(兩湖)에서 조운한 곡식을 개성과 평양에 쌓아 두고 사용한 뒤에 삼현(三縣)의 곡식을 황해도 등지에 운반케 한다면 거의 보충해 쓸 수 있을 것입니다. 13일 동안에 1만 8천 석의 양식이 소비되었는데 평양에 현재 있는 곡식은 수천 석 뿐이니 이것은 4∼5일 양식에 불과합니다. 의주의 곡식을 근근히 운반한다 해도 어찌 용도에 넉넉하겠습니까. 양호의 군량을 준비하는 일과 보병을 더 청하는 일은 늦출 수 없습니다."
하고, 덕형이 아뢰기를,
"원래 조금씩 흐르는 물줄기는 중간에서 막히어 시원스레 흐르지를 않습니다. 이곳 곡식은 평양으로 운반하고, 양호의 곡식은 개성으로 수송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사를 철수하여 물러난 것은 그 본의가 요동을 지키는 데 있고 우리 나라는 구하지 않으려는 게 아닌가? 중국 조정의 의도를 알 수가 없다. 이는 우리 나라의 근심일뿐만 아니라 중원의 근심으로도 작은 일이 아니다."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북병이 말하기를 ‘조선은 수전(水田)이 많아 달릴 수가 없기 때문에 요서(遼西)에 군사를 나누어 두었다가 추동절을 기다려 땅이 언 뒤에 정벌하고 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기병을 제외하고 남병 단독으로 적을 대적할 수 있겠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남병은 단지 3천 명 뿐인데 만약 1만 명을 더한다면 성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유충은 매양 ‘2만 병력만 더 있다면 국왕이 군진 뒤에 있더라도 걱정할 것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병은 씩씩한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신이 모란봉(牧丹峰)에서 토굴을 철거할 때에 늘 접촉하여 보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왜의 토굴 제도를 모르겠으나 생각건대 땅을 파서 집을 만들기를 마치 토실(土室)과 같이 한 유의 것이라 여겼었다. 지금 들으니 흙으로 담을 쌓은 것이 마치 바른 벽 같다고 하는데 이런데도 토굴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것이 완전하고 장구한 계책인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그 제도는 넓은 것도 있고 좁은 것도 있는데 넓은 것은 1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으며 매우 튼튼합니다. 오유충의 군대가 토담 앞에서 많이 죽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토담은 뛰어넘을 수도 허물어 버릴 수도 없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땅을 파서 만들어 놓았기 때문에 뛰어넘기도 어렵고 부수기 또한 어렵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돌로도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런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돌이 생긴 모양대로 쌓았기 때문에 붙들고 기어오를 곳이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 위의 보(堡)는 우선 허물지 않는 것이 가하다."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중국인들이 재물 감춘 것을 훔치느라 모두 헐어 버렸는데 일일이 중국 장수에게 고할 수도 없고 심지어는 주민들까지 상하게 했으나 감히 고하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군의 화포 제도는 어떠한가? 우리 나라의 대장군포(大將軍炮)와 같은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그 제도는 여러 가지여서 용이하게 배울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발포할 때에 소리마다 순서가 있는 것 같으나 일제히 방포하게 되면 천지가 무너지는 듯 말로 형용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에서도 방포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놀라는데 그때에 인마(人馬)가 놀라지 않던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북군은 그 때문에 이 소리를 싫어하고, 많은 말들이 놀라 뛰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원은 달자(㺚子)들의 침략을 많이 당하는데 북군이 그 포를 익히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달자들 역시 기병전에 능하다고 합니다. 방포하는 법을 익히지 않는 것은 그 본의를 모르겠습니다. 국가가 회복된 뒤에는 화포 등의 일을 반드시 항상 익혀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제도를 어떤 경로로 배울 수 있겠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중국군에게 배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홍진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은 기강이 없어서 비록 기계가 있더라도 방포하는 법을 익히지 않으니 어찌하겠습니까?"
하고, 원익이 아뢰기를,
"우리 군사들의 화살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도 철환은 가기 때문에 백성들이 먼저 궤멸됩니다. 이 때문에 유성룡(柳成龍) 역시 첫째는 민심을 위무하고, 그 다음에 병기를 완전히 갖추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병들 중에 총통(銃筒)을 가지고 온 자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수백 명 중에 총통을 가진 자는 1백여 명에 불과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호준포(虎蹲炮)는 어떠한가? 철환을 쏘게 되어 있는가? 마치 장군석(將軍石) 같은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은 형상인데 철환을 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중에 방포하면 곳곳에서 불이 일어난다고 하는데 그런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석환(石丸)으로 쏘기도 하고 철환으로 쏘기도 하는데, 화약 위를 진흙으로 채우고 불을 꽂으면 돌이 나아가 흩어지면서 불이 따라서 일어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진천뢰(震天雷) 같은 것인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신은 그 요령은 모릅니다. 다만 철정(鐵釘)으로 만드는데 초[燭]를 만드는 방식과 같아서 철정을 없애면 속이 텅비어 채울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총의 구멍은 어떻게 만들었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불로 녹여 철정을 둥글게 감쌌다가 빼내면 구멍이 생긴다고 했는데 다만 의심스러운 것은 그 사람이 그 제도를 모르고서 말하는지 혹은 숨기면서 말하는지 정확하게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그렇다면 어떤 장인(匠人)인들 만들지 못하겠는가. 그런데 중국 사람들이 반드시 귀하게 여기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염초(焰硝) 만드는 제도는 또 어떻게 하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바닷물의 흰 거품을 많이 모아다가 굽는다고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소금을 굽는 것이지 어찌 염초를 굽는 것이겠는가?"
하였다. 덕형이 아뢰기를,
"진신(陳信)이 제독의 군중에서 나와 신에게 말하기를 ‘그대 나라에는 부국 강병의 방책이 있다. 이곳에 와서 보니, 은이 산출되지 않는 산이 없으니 이것을 채굴하여 제련한다면 충분히 부유해질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전일 무고(誣告)한 사실을 물으니, 답하기를 ‘내가 유구(琉球)에 갔다가 아주 후한 대접을 받았는데 일본 사신을 보고 그런 줄을 알았다. 이른바 관백(關白)이란 자는 절강(浙江) 사람으로 죄를 짓고 들어갔다고도 하고, 혹은 남방 사람으로 일본에 장가 들어 성을 평씨(平氏)라고 하였다고도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관백이 일본을 통합하고, 대국을 범하려고 한다는 말은 진실이라고 하던가? 유구의 일 또한 어떠한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모두 옳다고 하였습니다. 유구는 이미 항복했기 때문에 병화를 당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는 상인(常人)이던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그 용모가 추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상인은 아닌 듯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문자를 이해하던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문자를 약간 알기 때문에 글로써 보이면서 의사를 통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일로에 은산(銀山)이 많이 있다고 한 것은 그가 직접 본 것인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낭전(狼戰)의 제도 역시 배워야 합니다."
하고, 원익이 아뢰기를,
"삼기병(三技兵) 역시 배워야 합니다. 절강 지방은 시서(詩書) 문물(文物)을 일삼고 무비(武備)를 익히지 않았기 때문에 여러 차례 왜구의 침략을 당했었는데, 가정(嘉靖) 연간에 살해와 약탈을 당한 뒤 무비를 항상 익혔기 때문에 이렇게 능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덕형이 아뢰기를,
"군사를 10년 동안 가르치게 되면 천하를 횡행할 수 있습니다. 익히게 한다면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직접 왜적의 용병(用兵)하는 것을 보았다. 징과 북 그리고 도양과 명칭이 있던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기치가 있었는데, 대장의 뒤에 행용(行用)하는 기가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북도 있던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뿔피리를 불던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뿔피리를 불지 않아 군중이 고요하고, 다만 적진의 행동을 보아 군사를 움직입니다. 용병을 잘하는 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가 그들의 갑옷을 보니 제도가 가소로왔다."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이 적을 보면 곧바로 도망해서 그렇지 만약 쏘기만 한다면 뚫기가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내달아 돌격할 때에 총 쏘는 것은 어떻게 하던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가장 먼 데서는 총을 쏘고, 그 다음에는 창으로 찌르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는 칼로 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총통의 소리는 중국군의 화포와 같지 않은가?"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왜총의 소리는 사방에서 일시에 발사하더라도 소리마다 따로 들립니다. 중국군의 화포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것 같이 산과 들이 진동하여 말로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성벽의 돌도 맞아 부서지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부딪치면 파괴되지 않는 것이 없고, 닿으면 타버리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하고, 홍진이 아뢰기를,
"여기서 평양까지의 거리가 가깝지 않은 듯한데 여기에서도 그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사의 형세가 이와 같으니 싸우지 않고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이번에 군사를 후퇴시킨 일은 매우 우려할 만합니다. 만약 일제히 분기하여 진격한다면 승리하기가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강화 부사(江華府使) 윤담(尹湛), 통진 현감(通津縣監) 이수준(李壽俊)이 서로 약속하고 남병 20여 인과 야경(夜驚)을 치고 총을 쏘면서 습격하자고 했는데 남병이 힘껏 거부하고 하지 않았다니 실로 통탄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망한 중국군은 매장(埋葬)을 했는가? 화장을 했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관곽(棺槨)으로 매장하기도 하고 화장하기도 했습니다. 신이 순안(順安)에서 올 때에 보니 병든 중국군들이 중로에서 발이 부르터서 걷지도 못하고 이틀 동안 음식을 먹지 못하고 숨이 끊어지려 했습니다. 만약 중국 장수가 이 소문을 들었다면 어찌 노하지 않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가 도중에서 보니 중국 군인 중에 다친 자가 많이 있었다. 우리 나라 일로 이같이 되었으니 매우 미안하다. 각 고을에 신칙하여 특별히 구호하도록 했으나 일로의 고을이 성심을 다하지 않으니 매우 가증스럽다."
하였다. 원익이 아뢰기를,
"평양의 곡식은 남은 것이 3천여 석인데 다시 준비할 길이 없습니다."
하고, 덕형이 아뢰기를,
"이제 신이 물러갈 것인데 제독이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습니다. ?"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제독이 만나고 싶어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 의도를 안 뒤에 결정해야 한다. 만나려고 하면 만난들 뭐가 방해롭겠는가? 무단히 나아간다면 사체에 방해가 될 것이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평양의 군량은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날짜가 오래되었으니, 군량과 마초가 갑자기 떨어진다면 반드시 요동으로 가겠다는 말이 나올 것입니다. 이것이 염려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제독에게 그러한 뜻도 말해야 한다."
하니, 덕형이 아뢰기를,
"북적에 대한 사실을 신이 개성에 있을 때 여러번 말했는데, 그때마다 ‘그대는 서생이니 함께 의논할 것이 못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원익이 아뢰기를,
"진영(陣營)을 버리고 뒷일을 생각치 않은 채, 갑자기 군사를 후퇴시킨 것을 신은 매우 통분하게 여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옳다. 나는 그것을 온당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고, 상이 또 이르기를,
"평양을 공격하여 빼앗은 것은 지혜로와서인가, 용감해서인가?"
하니, 원익이 아뢰기를,
"공을 탐한 것에 불과할 뿐입니다. 유인해내려고 사 유격(査遊擊)을 시켜 왕래하며 서로 통하게 했습니다. 유격이 현소(玄蘇)를 만나 시를 지어 주자 현소는 거기에 화답했습니다. 신이 군중의 지휘를 들으려고 달려 나아가니 사 유격이 왜적 23인을 거느리고 왔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영문도 모르고 있는데 갑자기 제독이 선도하여 왔습니다. 날이 이미 어두어 남문 안에서 밥을 먹이고 거짓으로 그들의 칼을 보자고 했으나 주지 않았습니다. 적들이 해치려는 의도를 알고 다투어 달아나자 즉시 쫓아가 거의 다 참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원익에게 이르기를,
"경은 오래도록 외방에 있으면서 고생이 많았다. 모름지기 힘을 다하라."
하고, 덕형에게 이르기를,
"경은 가서 힘써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639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군사-병참(兵站) / 군사-군기(軍器) / 의생활(衣生活)
○引見接伴使知中樞府事李德馨, 平安道監司李元翼, 左承旨洪進。 上曰: "意外, 提督被參, 我國不幸。 事適如此, 奈何?" 德馨曰: "以天下大將, 旣受重任, 中原豈有輕論之理? 提督亦受天下之重任, 又豈有中途棄歸之理乎? 大槪南北之事, 最爲可慮, 南人多用權, 北人勢孤, 故如此也。 此後更無他事。 但當於提督前, 以賊勢殘弱, 必須終成大功之意, 懇言之。 又於宋侍郞前, 移咨請兵爲當。" 上曰: "侍郞前請兵, 則然矣。 不可請兵於朝廷耶? 用兵多少, 大將在焉, 本國但慮支供芻糧而已。 如不得已, 當請于侍郞, 不當請于朝廷。 朝廷必疑其大將何不請兵, 而國王請兵乎? 或以辨誣爲言, 此亦未便。 其事時未顯發, 何據而辨之哉? 侍郞前請兵事則然矣。 越而請之於朝廷, 則事體未穩。 卿等之意如何?" 元翼曰: "唐將, 每言請兵于侍郞, 不當直請于朝廷。 且請兵之事, 提督與侍郞, 當爲奏請, 而本國則不可請也。 若至於勢之甚難, 則亦不可料此而不爲請也。" 德馨曰: "前奏聞, 以提督活出我國人之事, 陳之。 若是則斬朝鮮人頭之事, 庶可發明矣。" 上曰: "試以此意微諷曰: ‘大人之意如是, 故旣送人于侍郞矣。 大人若必請於朝廷, 則加請兵于朝廷可也。’ 試爲諷之。" 元翼曰: "提督, 必謂侍郞前請之云。 且城中諸將駱尙志、吳惟忠等, 每言于臣曰: ‘須以進兵及使民耕種勿失事, 急急咨文于宋處。’ 云矣。 萬一賊勢持久曠日, 而在外之賊, 來與京城合勢, 則大事去矣。 且至氷泮水通, 則兩湖亦可憂。 若渡漢江, 以一帶爲限, 則事無可爲。" 上曰: "斯言是矣。 彼賊每以遁去云云, 無乃欲下兩湖而作亂耶? 其賊之性, 暴悍巧黠, 甚不可信也。 豈以一敗, 蹶然自退乎?" 元翼曰: "其大軍不敗, 萬無遁走之理。" 德馨曰: "小臣謂提督曰: ‘我國人民, 楊州 三角山近處, 餓莩者多矣, 若而回軍, 則孑遺之民, 將無賴矣。 小邦以兩湖軍糧爲恃, 賊若添兵, 或下兩湖, 則將無以爲計。’ 此意亦與沈遊擊言之, 二將叩膺謝之。" 上曰: "遊擊與提督相得乎?" 德馨曰: "豈有相得之理乎?" 元翼曰: "沈之所謀畫及賊倭之情, 提督雖問不言。 以是觀之, 兩情似不相好。" 德馨曰: "遊擊乃南將也。 每以筆札, 示臣曰: ‘俺爲爾國, 敢不盡死力爲之, 而提督若此, 奈何?’" 上曰: "向義㺚子, 或見我國之人, 必斬首削髮云, 然耶? 如此之事, 提督豈能盡知之?" 元翼曰: "然。 無人處見之, 則必斬而獻之。 吏民及城中男女往來之人, 斬頭斷髮者亦多矣。" 上曰: "如此之事, 南將亦知其由乎?" 元翼曰: "北軍之所斬, 南軍必指而爲斬朝鮮人之頭也。 袁主事與提督相對而言曰: ‘老爺何爲如此之事乎?’ 提督怒曰: ‘可惡老和尙, 何處得聞此語?’ 攘臂大叱, 袁潢曰: ‘此是公論。’ 其後潢謝以所聞之誤, 則北將亦叩頭謝罪云耳。 潢之下人曰: ‘主事同年二百餘人, 布在臺閣, 此言必聞之, 聞之, 則大事必生。 且主事, 以書遺駱尙志曰: 「凡論功之事, 俱書而送之, 皆以公等爲首功, 以報朝廷, 公等將有大功。 宋侍郞亦已知之。」 云云。 上曰: ‘此等爭功之事, 姑舍之。 如此之事, 古亦然矣。 以公言之, 南兵之功爲首耶? 抑北兵爲首耶?" 元翼曰: "南兵着五色衣者, 先爲登城闌入, 其功最重。" 上曰: "登城時, 緣階而登耶?" 元翼曰: "李如栢謂曰: ‘旣造沙橋, 又多聚空石, 盛沙而積之。’ 云, 則南將不答, 終不用其橋。 扶其城石而上之, 賊越而斬之, 南兵又以手下其屍, 相繼而登。 斬一賊頭, 軍之死者五六人, 爭先闌入, 無數以登。 開門之後, 北兵追後騎馬馳入, 但斬死賊之頭而已。 前於祖總兵處, 細問之, 則騎馬只用短刀, 步者以長搶觸之。 賊於水澤山谷間, 亂走以戰, 騎兵路險, 不能追戰, 步軍隨後擊之’ 云矣。 德馨曰: "提督每言南兵之功, 而李如栢、張世爵等, 性皆不順, 每毁短之, 且毁王必迪之爲人, 南軍以此怨之。 提督至開城, 諸將遊擊以下, 皆跪而聽令, 王必迪獨立而言曰: ‘老爺不智、不信、不仁如此, 而可能用兵乎?’ 提督怒曰: ‘何謂也?’ 必迪曰: ‘平壤攻城之日, 不令而戰, 故軍士不及炊食。 爲將者不念軍士之饑, 而遽使攻城, 是謂不仁也。 圍城之日, 俺在軍後聞之, 老爺馳馬城外, 督戰曰: 「先上城者, 與銀三百兩, 或授以都指揮僉使。」 今者先登者衆, 而三百兩銀何在? 指揮僉使, 又何在焉? 是謂不信也。 大軍不爲前進, 只率先鋒往擊, 一有蹉跌, 大軍挫氣而退, 以是言之, 非不智而何? 如此而可以攻城耶?’ 提督聞其言, 卽出銀給南兵云。" 上曰: "定爲不令而發軍耶?" 元翼曰: "前日卜之, 雖曰明日約戰, 而不言其時, 猝然擧事, 故軍不及食云。" 德馨曰: "聞王必迪之言, 則不可一有蹉跌, 而遽爲退師, 豈有如此, 而爲大將乎? 必迪等留之於臨津, 謂李麒壽曰: ‘吾們, 以兵馬爲恃, 而今如是, 那有此事?’" 元翼曰: "南兵必以馬兵爲聲援, 故如是言之。 提督獨還開城, 卽諭王必迪曰: ‘南兵功多, 而獨爲勞苦, 宜速還來。" 上曰: "王也終如何?" 德馨曰: "其後提督出牌, 慰以露處之苦, 皆令退兵, 戚、王諸將, 各率軍馬而來。 提督又手書曰: ‘有願留者, 留彼。’ 云。 大槪坡州之事, 張世爵、李如栢爲之。" 元翼曰: "無據之言, 故不爲狀啓矣。 似聞宋侍郞卽奏本于朝廷, 故論劾云。 提督移咨于侍郞, 其持咨之人, 侍郞, 以棍杖打下三十云。" 元翼又曰: "朝廷, 以南軍受節制於北將, 故如是云。 且於南軍, 別出元帥, 以領其軍云。 此言出於口傳矣。" 上曰: "元帥已爲差出云耶?" 元翼曰: "渠之言內, 年六十餘之人, 爲之云矣。" 上曰: "此說唐人言之耶? 設使南將來, 必聽提督之節制。" 元翼曰: "若出元帥, 則南北兩將, 各自節制。 然必是憤言也。" 洪進曰: "楊元五千兵, 實皆精兵也。" 元翼曰: "三千兵, 則來此之兵也。 五千, 則以爲遼右捍衛之兵也。 若請於侍郞, 則容或有出送之理。" 德馨曰: "與其手下人相語, 則提督見家書, 多有不喜之色云, 謂曰: ‘吾之事, 爲功爲罪, 未可知也。’ 及來普山時, 撫膺愀然不樂, 此亦未知其故也。" 上曰: "吳惟忠, 名將耶?" 元翼曰: "與駱尙志齊名矣。" 上曰: "吳惟忠先登之說, 然耶?" 元翼曰: "二將皆先登焉。" 上曰: "此將在開城之軍耶?" 元翼曰: "開城若有此二軍, 碧蹄之戰, 寧有蹉跌之理乎?" 上曰: "倭賊, 每寇浙江、蘇、杭等處, 此等軍, 非不在矣, 而有累陷之患, 何也?" 德馨曰: "有中原土人呂應周者, 以書示之曰: ‘嘉靖年間, 倭賊陷蘇、杭, 其後措備有方, 故今則無患。’ 云矣。 且把臣袖曰: ‘以此闊袖, 而用於戰場乎?’ 指苙子曰: ‘以此裹頭, 而用於戰場乎?’ 遂作詩以示曰: ‘詩賦晉人遺, 兵書擧國迷, 高冠爲武弁, 大袖作戎衣, 鈍戟薪同腐, 堆城肩與齊, 傳聞倭寇至, 八道片雲飛。’ 云云。" 元翼曰: "小臣與金命元同坐時, 指臣等之冠袖而笑曰: ‘如此而可以制倭乎?’ 元翼又曰: ‘此後犒軍甚難。 兩南則不知其栗之有無也。 開城、平安一路, 物力竭盡, 支供亦難, 但自途上奔走而已。 如使兩湖漕運之穀, 積置開城、平壤, 旣用之後, 三縣之穀, 亦使輸運於黃海等地, 庶可補用。 十三日內, 一萬八千石, 餉之已盡, 則平壤見在之穀, 只有數千餘石, 是不過四五日糧。 義州糧帒, 雖僅僅運轉, 何足於用? 兩湖軍糧措備事, 步兵加請事, 不可緩也。" 德馨曰: "元來小流, 中壅不快流。 此處之米, 運於平壤, 兩湖之穀, 輸於開城。" 上曰: "撤兵而退, 其志欲守遼東, 而不欲救我國耶? 天朝之意, 未可知也。 此非但我國之憂, 中原之憂, 亦不少矣。" 德馨曰: "北兵謂: ‘朝鮮多水田, 不可馳突, 故欲分兵遼右, 以待秋冬, 地凍然後征之。’" 上曰: "舍騎軍, 而南兵可能獨當耶?" 元翼曰: "南兵只有三千, 若加一萬, 則可以成事。 吳惟忠每言若加二萬兵, 則使國王在陣後, 亦無患矣。" 上曰: "南兵, 壯耶?" 元翼曰: "臣於牧丹峰撤毁土窟時, 常目見之矣。" 上曰: "倭之土窟, 未知其制, 意謂堀土而爲屋, 如土室之類也。 今聞之, 則以土爲墻如塗壁云, 如是而謂之土窟, 何也? 是豈完久之計哉?" 元翼曰: "其制或寬或窄, 寬者可容萬餘人, 至爲堅實。 吳惟忠之軍, 多死於土墻之前。" 上曰: "土墻不可越, 亦不可毁耶?" 元翼曰: "全地堀成, 踰亦難毁亦難。" 上曰: "以石爲之云, 然耶?" 元翼曰: "從石勢而築之, 無攀附之處矣。" 上曰: "城上之堡, 姑勿毁可也。" 元翼曰: "唐人偸其財物所莊, 皆爲撤毁, 不可一一告于唐將, 至於居民亦傷打, 而不敢告耳。" 上曰: "天兵火炮之制, 如何? 如我國大將軍炮耶?" 元翼曰: "其制百般, 不可容易學得也。 其放之, 聲聲似有倫理, 及其齊放也, 天地裂破, 不可形言。" 上曰: "我國放砲之時, 人多驚動, 其時人馬, 不爲驚動耶?" 元翼曰: "北軍, 以是厭之, 馬多驚躍。" 上曰: "中原多被㺚子之患, 而北軍不習其炮, 何耶?" 元翼曰: "㺚子亦能騎戰云。 而不習放炮, 未知其意也。 國家恢復之後, 火炮等事, 必常時閑習至當。" 上曰: "其制, 何由學得?" 元翼曰: "可於唐兵處, 學習也。" 洪進曰: "我國之人, 紀綱掃地, 雖有器具, 人不習放, 奈何?" 元翼曰: "我軍矢力未及之處, 鐵丸能制, 故民先潰散。 是以柳成龍亦曰, 其一, 慰撫民心, 其次, 器械不可不盡也。" 上曰: ‘賊兵持銃筒而來者, 幾許?’ 元翼曰: "數百人中, 持銃筒者, 不過百餘人矣。" 上曰: "虎蹲炮何如? 其制放鐵丸耶? 如將軍石耶?" 德馨曰: "如虎之蹲踞, 而放鐵丸矣。" 上曰: "城中放炮, 隨處起火云, 然耶?" 元翼曰: "以石丸爲之, 或以鐵爲之, 火藥之上, 以泥土充之, 揷火則石出而飛散, 火隨以熾烈。" 上曰: "如我國震天之類耶?" 元翼曰: "臣未知其要領也。 但以鐵釘爲之, 如造燭之制, 而去其釘, 則其中洞然, 可以塡築。" 上曰: "銃之穴, 何以爲之?" 元翼曰: "鐵釘以火合而圜之, 出之, 則成穴云矣。 但疑其人不知其制而言之, 或秘而言之, 未可的知也。" 上曰: "若然, 則爲匠者, 孰不爲之。 而唐人必貴之, 何也? 焰硝之制, 亦何以爲之?" 元翼曰: "海潮白漚, 多聚而煮之。" 上曰: "此煮鹽之事也, 豈曰焰硝乎?" 德馨曰: "陳信出來于提督軍中, 謂臣曰: ‘爾國有富國强兵之術。 來此見之, 山無無銀之山, 採而煉之, 足致豐富。’ 臣問其前日誣告之事, 則答曰: ‘俺往琉球, 待之極厚, 得見日本使臣, 知其然矣。 所謂關白, 浙江之人, 有罪而逃入, 或言南方之人, 娶于日本, 托姓於平氏云矣。" 上曰: "關白統合犯順之言, 信云耶? 琉球之事, 亦如何?" 德馨曰: "皆是云矣。 琉球已降, 故不爲被兵云矣。" 上曰: "常人耶?" 元翼曰: "其容貌不爲麤陋, 似非常人矣。" 上曰: "解文字耶?" 德馨曰: "文字則稍知之, 故以書相示通情矣。" 上曰: "一路多有銀山云, 渠親見之耶?" 德馨曰: "然。 狼戰之制, 亦可學矣。" 元翼曰: "三技兵, 亦可學。 浙江, 以詩書文物爲事, 而不習武備, 故累爲倭寇所侵, 嘉靖殺掠之後, 武備一事, 常常爲習, 故如是之能耳。" 德馨曰: "敎士十年, 橫行天下。 苟爲習之, 則何事不爲之乎?" 上曰: "卿等親見倭之用兵。 其有鉦鼓形名耶?" 元翼曰: "有旗識。 大將之後, 有行用之旗矣。" 上曰: "有鼓耶?" 元翼曰: "無矣。" 上曰: "吹角耶?" 元翼曰: "不吹角, 軍中寂然, 但視其敵陣所爲, 而行師。 其爲用兵, 善矣。" 上曰: "予見其匣衣, 其制可笑。" 德馨曰: "我國之人, 見敵輒走, 若能射之, 則穿〔之〕 何難?" 上曰: "馳突之際, 放銃, 何以爲之耶?" 德馨曰: "最遠處放丸, 其次以搶觸之, 最近處, 以刀斫之。" 上曰: "銃筒之聲, 不與天兵之火炮同耶?" 德馨曰: "倭銃之聲, 雖四面俱發, 而聲聲各聞。 天兵之炮, 如天崩地裂, 山原震蕩, 不可狀言。" 上曰: "城石, 亦可觸破耶?" 元翼曰: "觸之無不裂破, 犯之無不焦爛。" 洪進曰: "此地距平壤, 似不近矣, 而於此亦聞其聲云矣。" 上曰: "軍勢如此, 則可不戰而勝矣。" 德馨曰: "今此退兵, 事極可憂。 若齊奮進擊, 則勝之何難? 江華府使尹湛 通津縣監李壽俊, 相約與南兵二十餘人, 夜驚放銃, 因以襲擊, 則力拒不爲, 誠爲可痛。" 上曰: "天兵死亡者, 皆已埋瘞耶? 以火燒之耶?" 元翼曰: "或爲棺槨而埋之, 或以火而燒之。 臣自順安來時, 見天兵患病者, 中路足蠒, 不能行步。 二日不得食, 氣息將盡。 天將若聞之, 豈不怒乎?" 上曰: "予於途中見天兵多有破傷者。 以我國事如是, 未安甚矣。 申勑各邑, 別加救護, 而一路之官, 不爲盡心, 極爲可惡。" 元翼曰: "平壤之穀, 所餘數三千石, 而更無措備之路矣。" 德馨曰: "臣今退歸, 提督若問之, 則將何以答?" 上曰: "提督不欲相見云, 知其意然後當決之。 如欲見之, 見之何妨? 若無端進去, 則有礙事體矣。" 上曰: "平壤糧餉, 何以爲之?" 元翼曰: "爲日已久, 芻糧遽絶, 則亦必有向遼之言。 此爲憫慮。" 上曰: "提督處, 其意亦言之。" 德馨曰: "北賊之事, 臣在開城累言之, 必曰: ‘汝書生, 不足與議。’" 元翼曰: "棄陣忘後, 而遽退其師, 臣意極爲痛憫。" 上曰: "其說然矣。 予以是爲未穩。" 上曰: "攻拔平壤, 智耶? 勇耶?" 元翼曰: "不過貪功也。 引而出之, 使査遊擊往來相通。 遊擊見玄蘇, 作詩遺之, 玄蘇和之。 臣欲聞軍中指揮而馳進, 則査遊擊率倭賊二十三人來到云矣。 臣不知何由, 忽見提督先導而來。 日已昏黑, 食于南門之內, 佯爲欲見其劍, 而不授矣。 賊知其將害之意, 爭自潰散, 卽爲進斬殆盡矣。" 上謂元翼曰: "卿久在于外, 辛苦多矣。 須勉力。" 謂德馨曰: "卿其往哉! 勉之!"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36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63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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