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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35권, 선조 26년 2월 16일 신축 11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접반사 윤근수가 중국군의 진퇴 상황을 아뢰다

접반사 윤근수가 아뢰었다.

"신은 ‘부장(副將) 양원(楊元)이 봉황성(鳳凰城)에 가서 경략(經略)과 병사(兵事)를 의논하고, 왕래할 적에 퉁 총병(佟摠兵)을 다 만나보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서일관(徐一貫)은 곧 퉁 장군의 찬획(贊畫)이라 필시 그 내용을 참여해서 알 것이므로 신이 어제 구련성(九聯城)에 가서 서일관을 보고 물었더니 ‘양 장군은 함경도의 왜적이 서쪽으로 향하여 중도에서 양도(糧道)를 끊을까 우려되기 때문에 그 수하 군사들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돌아와 지키고, 이 제독 및 부장(副將) 이여백(李如栢), 부장 장세작(張世爵) 이하는 모두 그대로 개성에 머문다.’ 하고, 또 말하기를 ‘지난 25∼26일에 사(査)·이(李) 두 장수가 연일 적을 토벌하여 참획한 것이 매우 많았다. 27일에 또 진군하다가 왜적의 복병을 만나 중국군 3백여 명이 손실되었으나 죽인 왜적 또한 3백으로 살상이 엇비슷하다. 또 금 투구에 금 갑옷을 입은 왜장 하나를 죽였다고 하는데 그 자가 대장이라서 왜적이 시체를 가지고 달아났으므로 목을 베지 못했다. 그리고 개원위(開原衛)·심양위(瀋陽衛)·해주위(海州衛) 등지의 병마 3천을 뽑아 함경도의 왜적을 막을 것이다. 양원의 말이 「저번에 계속 비가 와서 도로가 진흙탕으로 무릎까지 빠져 말을 타고 돌격할 수가 없었다. 지금 만약 곧장 진격한다면 반드시 마군이 많이 상할 것이니 당분간은 평양 등지의 마초가 있는 곳에서 먹이면서 쉬게 하고, 보병은 개성·파주(坡州) 등지를 방어하다가 군량과 마초가 비축되고 도로 또한 마르며, 또 후속 병마를 기다려서야 진격하여 소탕할 수 있을 것이다. 」 하니, 제독도 「평양에 돌아가 머무는 것이 마땅할 듯하다. 」 하였다. 경성의 왜적은 8∼9천 명에 불과할 뿐이고 그 나머지 1만여 명은 모두 그대 나라 사람으로 왜적에게 투속(投屬)한 자들이다. 접전할 때 화살 맞은 우리 가정(家丁) 및 마필을 보니 모두 그대 나라 화살이었고, 싸움터에서 벤 수급(首級)도 태반은 두발(頭髮)이 있었다.’ 했습니다. 또 말하기를 ‘애양(靉陽)·청하(靑河)·광녕(廣寧)·요동(遼東) 등지의 보병 1만 2천 명이 올 것이다. 그대 나라에는 마초가 없으니 기병은 뽑아 올 수가 없다. 유정(劉綎)의 군대 역시 보병이다. 그리고 들으니 왜적은 경성 남쪽에 웅거하고 그대 나라 사람들은 북변에 있는데 지금 북쪽의 인가를 모두다 불태우고 남쪽의 가옥은 그대로 있다고 한다.’ 하였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34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接伴使尹根壽啓曰: "臣聞:, ‘楊副將 鳳凰城, 與經略議兵事往還, 皆歷見佟摠兵。’ 而徐一貫佟將贊畫, 必與知其意, 故臣昨日還到九聯城, 見徐一貫問之, 則: ‘楊將咸鏡道 倭賊西向, 中絶餉道, 故當領其手下兵, 還守平壤城, 李提督李副將 如栢, 張副將 世爵以下, 皆仍駐開城。’ 且言: ‘去二十五六日, 兩將, 連日剿賊, 斬獲甚多。 二十七日又進兵, 被伏發, 折損天兵三百, 而殺倭賊亦三百, 殺傷相當。 又殺一將, 着金盔金甲者。’ 云, 是大將, 而倭賊持屍而遁, 不得斬首。 且開原瀋陽海州衛等處兵馬, 又調三千, 當防咸鏡之賊。’ 曰: ‘頃者連日下雨, 道路泥濘, 其深沒膝, 馬不得馳突。 今若直進, 則必多折傷馬軍, 當分喂於平壤等有糧草各處, 步兵則防守開城坡州等地, 待糧草積峙, 道路亦乾, 又待後頭兵馬, 方可進勦。’ 提督曰: ‘似當還駐平壤。’ 京城之賊, 不過八九千, 而其餘萬餘, 皆是爾國之投者。 拒戰之時, 射傷我之家丁及馬匹, 俱是爾國之箭。 臨陣斬級, 太半有頭髮。 又曰: ‘靉陽靑河廣寧遼東等處步兵, 一萬二千當來。 爾國無草料, 馬軍不可調來。 劉綎之軍, 亦是步兵。 且聞倭賊據京城南邊, 爾國人在北邊, 而今則盡燒北邊人家, 南邊房屋仍存。’ 云矣。"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34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