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룡이 이 제독이 동파로 물러나 주둔하고 있다고 치계하다
도체찰사 풍원 부원군 유성룡이 치계하였다.
"26일 제독이 개성부를 경유, 임진의 얕은 나루를 건너 파주(坡州)에 군사를 주둔시켰습니다. 27일 제독은 이 도독(李都督)과 같이 가정(家丁) 1백여 명을 거느리고 벽제를 향해 달려갔는데 이는 몸소 경성(京城)을 정탐하려는 것이고 모든 군사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날 새벽 사 총병(査總兵)이 방어사 고언백(高彦伯)과 말을 달려 창릉(昌陵) 근처에 이르렀는데 적이 산골짜기에 많이 매복해있고 먼저 수백여 명이 나와 유인하였습니다. 총병이 군사를 거느리고 엄습하자 적들은 당하지 못하고 흩어져 달아나다 거의 다 참획되었고, 고언백의 군대도 사살한 것이 많았습니다. 군사를 이끌고 후퇴하려고 할 때에 적의 후군 대부대가 이어 이르렀습니다. 제독이 혜음령(惠陰嶺)에 이르렀을 때 적병이 있다는 말을 듣고 말을 달려 돌진하다가 중로에 말이 넘어지면서 추락하여 왼쪽 뺨에 약간 상처를 입었습니다. 한참 만에 일어나 적진으로 돌진하였는데 적의 무리는 중국군의 선봉보다 몇 배나 많고 중국군의 후속 부대는 미처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중국군이 적에 쫓기자 제독이 뒤를 막으며 후퇴했는데 대군이 점차로 후퇴하여 파주에 주둔했습니다. 중국군의 사상자는 수십 명이고 제독의 가정 중 아주 신임하는 자 1명도 죽었는데 제독이 말 위에서 통곡하였습니다.
28일 이른 아침에 동파(東坡)로 물러나 주둔하려 하므로 신이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접대사(接待使) 이덕형(李德馨), 호조 판서 이성중(李誠中), 도순찰사 권징(權徵) 등과 함께 나아가 군사를 후퇴시키는 것은 불가하다는 사유를 극력 진달했습니다. 제독은 뜰의 중앙에 나와 서고 여러 장수들은 좌우에 둘려선 뒤 신들을 불러 말하기를, ‘우리 군사는 어제 왜적을 이겼을 뿐 별달리 패배한 것이 없다. 지금 동파에 가 머물려고 하는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만 이곳에는 마초가 부족하고 뒤에는 강물이 있어 화포와 기계, 남방 포수 역시 쉽게 도착할 수 없기 때문에 동파로 돌아가 머물면서 군사들을 며칠간 쉬게 했다가 다시 전열을 정비하여 진격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일제히 꿇어앉아 ‘중국군이 이미 전진했는데 만약 한발짝이라도 물러나면 적의 기세는 승세를 탈 것이고 민심은 동요할 것이니 이번 기회가 매우 중요하다. 또 남쪽의 의병(義兵)과 각처의 장수들이 중국군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이미 한강에 도착했고, 군량도 지금 한창 계속해서 수송되고 있는데 노야(老爺)는 어찌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급급히 도로 물러나려 하는가? 이곳에 남아 있는 백성들은 왕사(王師)가 온다는 말을 듣고 각자 서로 가속(家屬)을 이끌고 옛집을 찾아드는데 지금 또 버리고 가면 반드시 모두 적에게 해를 입을 것이니 이러한 일을 어찌 차마 하겠는가.’라고 했더니, 제독이 말하기를, ‘나의 애당초 생각은 본래 정탐하려고 온 것이다. 지금 돌아가 주둔하는 것은 다른 계책이 있어서가 아니고 다만 군사들을 휴식시켰다가 다시 오려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힘껏 간쟁하여 마지않자 제독이 손에 들고 있던 병부(兵部)에 보고하는 글을 보여주었는데, 대개 ‘경성에 있는 적병은 거의 20만이나 되지만 아군은 단지 몇 만뿐이고 또 사상자가 많다.’고 하고 인하여 증원과 군량 운반을 청한 다음 말단에는 또 몸에 병이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신이 손가락으로 지적하면서 고하기를, ‘성중에 있는 왜적은 많아야 1만여 명을 넘지 않는데 어찌 20만에 이른다고 하는가?’ 하니, 제독이 ‘당신네 나라 문서 중에 말한 것이 그와 같다.’ 하기에, 신이 또 고하기를, ‘어떻게 적병이 20만이나 될 리가 있겠으며, 본국 문서에 어찌 이러한 말이 있겠는가?’ 하니, 제독이 ‘문서에 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어찌 알겠는가?’ 하였습니다.
절도사(節度使) 이빈(李薲)이 바로 그들 앞에서 꿇어 엎드려 청하였으나 장수 이하가 모두 물리쳤고, 그 중에서 총병(摠兵) 장세작(張世爵)이 더욱 물러나 주둔해야 한다는 설을 주장하며 심지어는 얼굴과 어조에 노기까지 띠면서 속히 물러가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제독은 온화한 말로 깨우치기를 되풀이하여 마지않으므로 신들은 부득이 도로 물러났는데, 이날 즉시 행군하여 동파로 물러나 머물렀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29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都體察使豐原府院君 柳成龍馳啓曰: "二十六日, 提督由開城府, 渡臨津淺灘, 駐兵于坡州。 二十七日後, 提督與李都督率家丁百餘, 馳向碧蹄, 將欲親自體探于京城, 諸軍不動。 是日曉, 査緫兵與防禦使高彦伯, 馳到昌陵近處, 賊多設伏于山谷間, 先出數百餘人誘引。 總兵揮軍掩擊, 賊坡靡散走, 斬獲殆盡, 彦伯軍, 亦多射殺。 欲引退之際, 賊後隊大兵繼至。 提督行到惠陰嶺, 聞有賊兵, 馳馬突進, 路中馬蹶墜落, 左頰微傷。 良久而起, 因前突賊陣, 賊衆多於天兵先鋒數倍, 而天兵之繼進者未及到焉。 (○) 天兵因爲賊所逐, 提督殿後而退, 大軍鱗次退來, 還住坡州。 (○) 天兵死傷者數十餘人, 提督家丁之親信者一人亦死, 提督馬上痛哭。 二十八日早朝, 欲退駐東坡, 臣與都元帥金命元接待使李德馨, 戶曹判書李誠中, 都巡察使權徵等同進, 極陳不可退軍之事。 提督出立庭中, 諸將官環列左右, 招臣等, 語之曰: ‘吾軍, 昨日勝捷倭賊, 別無敗北之事。 今之欲駐東坡, 非有他意, 只緣此處馬草乏絶, 後有江水, 火炮器械, 南方砲手, 亦未易到, 以此欲還駐東坡, 休兵數日, 更爲整齊以進。’ 臣等齊跪, 極陳: ‘天兵已進, 若退一步, 賊氣乘勝, 民心動捶, 此機甚關。 且南方義兵及各處將官, 聞天兵之到, 皆已到漢江, 軍糧亦方車續輸到, 老爺豈不念此而遽爲還退乎? 此處遺民, 聞王師之來, 各自扶携, 來尋舊基, 今又棄去, 必盡爲賊所害, 何可忍此?’ 提督云: ‘吾之初意, 本欲體探以來。 今之還駐, 非有他計, 只欲休兵更來。’ 臣等力爭不已, 提督手持報兵部文以示, 大槪以爲: ‘賊兵之在京城者, 幾二十萬, 而天兵只數萬。 且多死傷。’ 因請添兵運糧, 末端又言, 身有病患之事。 臣以手指點告曰: ‘倭賊之在城中者, 多不過萬餘, 緣何得至二十萬?’ 提督曰: ‘爾國文書中, 所言如此矣。’ 臣又告曰: ‘賊兵豈有二十萬之理? 本國文書, 安有此語?’ 提督曰: ‘文書有之。 不然, 吾豈知之?’ 節度使李薲又直前跪請, 將官以下皆揮斥, 而其中張摠兵 世爵, 尤主退駐之說, 至於聲色俱癘, 使之速退。 而提督則溫言譬曉之, 反覆不已, 臣等不得已還退, 是日卽爲行軍, 還駐東坡矣。"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29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