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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35권, 선조 26년 2월 10일 을미 6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평양을 탈환한 데 대해 중국 조정에 올리는 주본

상이 신안관(新安館)에 행행하여 궐패(闕牌)를 설치하고, 백관을 거느리고 재배(再拜)한 다음 영하(寧夏) 평정을 하례한 표문(表文)과 평양(平壤)을 탈환한 데 대한 주본(奏本)을 사신 이조 판서 한준(韓準)에게 친히 전하였다. 그 대략은 다음과 같다.

"정월 9일에 배신(陪臣) 제도 체찰사(諸道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이 치계하였는데, 그 치계는 다음과 같습니다.

‘이달 6일에 흠차 제독 계요 보정 산동 등처 방해 어왜 군무 총병관 도독 동지(欽差提督葪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摠兵官都督同知) 이여송(李如松)이 대병력의 관군을 거느리고 곧바로 평양성 밖에 다다라 제장에게 부서를 나누어 본성(本城)을 포위하였습니다. 왜적 2천여 명이 성 북쪽의 모란봉(牡丹峯)으로 올라가 청기(靑旗)와 백기를 세우고 함성을 지르며 총포를 쏘았습니다. 한편 왜적 1만여 명이 성위에 벌여서서 앞에 녹각책(鹿角柵)을 세우고 방패로 가리고 칼을 휘둘러 기세가 심히 강성했습니다. 또 왜적 4∼5천 명이 대장기를 세우고 북을 울리고 나팔을 불고 성중을 순시하며 여러 적들을 지휘하는 데 본성 안팎에 장애물을 설치하여 갑자기 공격하기가 어려워 총병을 군사를 거두어 진영으로 되돌아 왔습니다. 이날 밤 인시(寅時)에 왜적 3천여 명이 함매(含枚)하고 몰래 나와 도독(都督) 양원(楊元), 도독 이여백(李如栢), 도지휘(都指揮) 장세작(張世爵) 등의 병영을 습격하자 본관 등이 군사를 이끌고 싸워 물리쳤습니다. 7일 저녁에도 왜적 약 8백여 명이 다시 도독 이여백의 진영을 습격했으나 또한 본관에게 격퇴당했습니다.

8일 동틀 무렵에, 총병이 향을 피우고 점을 쳤는데 길조(吉兆)를 얻었습니다. 아침밥을 먹은 뒤 3영의 장관과 함께 각각 해당 장령과 군인을 거느리고 칠성문(七星門)·함구문(含毬門)·보통문(普通門) 밖에 진을 치고, 총병은 친병 2백여 기(騎)를 거느리고 왔다갔다 하면서 지휘하니 장수와 사졸들은 용약하면서 모두들 진력할 마음을 먹었습니다. 진시(辰時)에 모든 군사가 비늘처럼 늘어서 전진하고 각종 화기를 일제히 발사하니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온 들판이 캄캄했습니다. 화전(火箭) 하나가 밀덕(密德) 토굴에 닿자 조금 뒤에 붉은 불꽃이 하늘로 치솟았으며 불길이 번져 거의 다 태웠습니다. 진을 지키던 왜적이 총을 난사하고 끓는 물과 돌덩이로 죽기로써 항거하며 긴 창과 큰 칼을 밖으로 일제히 내미니 빽빽한 것이 고슴도치 털 같았습니다. 총병이 겁내는 자 1명을 참하여 호령하면서 진중에 돌려 보이니 모든 군사가 북을 울리고 함성을 지르며 성에 접근했습니다. 등에는 마패(麻牌)를 지고 손에는 창을 잡고서 일제히 돌진하며 활·대포를 쏘기도 하고 방어하는 적을 올려 찌르기도 하니 적이 지탱하지 못하고 조금 물러나자 총병이 몸을 솟구쳐 먼저 성루에 올라 제장을 독려하여 진입하였습니다.

중국군의 일대(一隊)는 본국의 관군과 더불어 함구문으로 들어가고, 일대는 보통문으로 들어가고, 일대는 밀덕(密德)의 적성(赤城)에 올라 기병과 보병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사면으로 공격하며 쳐죽이니 많은 적이 무너졌습니다. 중국군이 당일 전투에서 참수한 것이 1천 2백 85급이고, 사로잡은 것은 왜적 2명과 통사(通事) 장대선(張大膳)이고, 빼앗은 말은 2천 5백 85필, 획득한 왜적의 기물(器物)은 4백 55건, 구출된 본국의 남녀 포로는 1천 15명이었습니다. 중국군이 승세를 타고 불을 놓아 건물을 모두 불태우니 많은 왜적이 숨어들었다가 타죽어 그 냄새가 10리에 뻗쳤습니다. 나머지 적들은 풍월루(風月樓)의 작은 성으로 숨어 들어가니 총병이 땔나무와 마른 풀을 운반하게 해서 사방에 쌓아놓고 화전을 쏘게 하니 일시에 타버려 모두 다 재가 되었습니다.

칠성문·보통문·모란봉 등지에 있던 여러 왜적들은 그대로 토굴에 웅거하니 견고하여 공략할 수 없었습니다. 총병은 군사를 철수하여 밥을 먹이고 ‘적들이 반드시 밤이 되면 도망갈 것이다.’ 하고, 즉시 부총병·참장(參將) 등의 장수를 보냈습니다. 이녕(李寧)·조승훈(祖承訓)·갈봉하(葛逢夏) 등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매복하고 총병은 양원(楊元)·이여백(李如栢)·장세작(張世爵) 등 세 부장(副將)과 함께 대로로 나아가니 왜적들은 사방으로 도망하다가 이녕 등 복병의 요격을 입었습니다. 참획한 수급이 3백 95과(顆), 사로잡은 왜적이 3명이었고 나머지 적들은 병기를 버리고 놀라 어지러이 달아나 절령(岊嶺)026) 서쪽이 모두 평정되었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평양부(平壤府)는 실로 본국의 옛 도읍지로서 성지(城池)가 험고한데 흉악한 적들이 저돌적으로 침입, 웅거하여 소굴로 만들었습니다. 당일 천병이 진격하여 토벌하자 북소리 한번에 탕평되어 악종의 남은 무리가 도망갈 곳이 없게 되었으니, 본국 재조(再造)의 기업(基業)이 실로 여기에 있습니다. 신이 이원익(李元翼) 등과 각 처의 군량과 마초의 운반을 독려하여 본부에 들여보내 제독부(提督府)에서 쓰도록 하였습니다.’

이상과 같은 장계에 의거하여 027) 은 자세히 알았습니다. 소방은 군병이 취약하여 날이 갈수록 국토가 줄어 들고 평양성은 험고하여 쉽게 수복하지 못하여 신은 밤낮 근심하고 속이 달아 죽을 곳을 알지 못했는데 황공하게도 성명(聖明)의 천지 부모와 같은 은혜를 입게 되었습니다. 선왕조의 옛일을 굽어 살피어 신의 잘못을 죄주지 않고 남북의 정병을 뽑아 소방을 도탄에서 구하도록 명하시었습니다. 군량이 부족할 것을 염려하시어 먼저 은냥(銀兩)을 하사하시었고 군량과 마초가 모자랄 것을 걱정하시어 계속하여 군수를 수송하여 주었습니다. 사졸들이 들판에서 노숙하고 노새와 나귀가 길에서 나뒹구는 등 신의 허물로써 중국 조정에 근심을 끼쳐 드림이 이렇게까지 되었으니 신은 감격하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왕사(王師)028) 에는 정벌이 있고 천리(天吏)029) 에게는 대적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금년 정월 8일에 평양을 공격하여 아침이 끝나기도 전에 이미 성이 격파되어 타 죽고 빠져 죽고 참살당한 자를 제외한 나머지 적들은 혼이 빠져 도망갔으니 그 성대한 군사의 위엄과 신속한 승전은 옛 역사에 없는 일입니다. 신과 대소 배신(陪臣)들은 처음 첩보(捷報)를 듣자 알지 못하는 사이에 마구 눈물이 흘렀습니다. 이는 대개 성천자(聖天子)의 융성한 덕이 널리 퍼지고 신령스런 무(武)가 멀리 뻗친데다 명공(名公)들이 계책을 돕고, 본 병부에서 전략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송 시랑(宋侍郞)은 기무(機務)에 전심하여 방략을 지휘하자 계책이 부합하여 특별한 공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이 총병(李摠兵)은 군사들에 대한 맹서가 강개(慷慨)하고 의기(義氣)가 사람들을 감동시켜 군사들이 지나는 길에는 털끝만큼의 범함도 없었고 싸움에 임해선 독전하며 여러 장교에 솔선하였습니다. 심지어는 총알이 말을 맞추고 불길이 몸을 에워싸도 두려운 기색이 없이 오히려 엄정하였습니다. 성을 함락시키던 날에 기자(箕子)에게 제사를 지내고 먼저 그 무덤을 봉(封)했으며 전상자를 어루만지고 전망자(戰亡者)의 영혼을 두루 위로하여 덕의(德意)를 선포하고 환과 고독(鱞寡孤獨)을 위문했으니, 비록 배도(裵度)회서(淮西) 평정이나 조빈(曹彬)의 강남(江南) 함락도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030) 부장(副將)이나 참장(參將), 유격(遊擊)이나 도사(都司) 이하의 각 해당 장령들도 용감하기가 범이 포효하는 듯 신이 도와 주는 듯하였습니다. 심지어는 큰 돌이 쏟아지는데도 이를 무릅쓰고 성 위로 올라간 자가 있으며 가슴에 탄환을 맞고서도 죽이기를 마지않는 자까지 있었습니다.

소방은 팔짱만 끼고 놀라 움츠리고 감히 돕지도 못하고, 한갓 철기(鐵騎)의 말발굽에 날리는 먼지는 들판에 가득하고 화전(火箭)이 미치는 곳마다 붉은 불꽃이 하늘을 찌르는 것만을 바라보았을 뿐이었습니다. 포탄이 방책에 맞자 깃털이 날리듯 산산이 부서지고, 적진을 찌르는데 민첩하기가 날쌘 송골매 같았으며, 노린내나는 연기는 공중에 가득하고 흐르는 피는 강물을 이루었으며 천지는 갈라지고 산과 물이 뒤바뀌었습니다. 적들의 조총과 끊는 물이나 돌맹이는 바로 버마재미가 수레바퀴를 맞서는 것 같아 감히 상대가 못 되었습니다.

신이 생각하건대 평양성은 실로 정병과 기계가 있는 곳으로 신이 한 도의 힘을 다하였으나 해가 지나도록 엿보지 못했는데 적을 이긴 뒤에 그들이 설치한 방비를 들으니 결코 소방의 병력으로는 공함(攻陷)할 수 있는 바가 아니었습니다. 천자의 위엄이 한번 떨쳐지자 여러 적진이 소문만 듣고도 파죽의 형세가 이루어져 황해 이동은 싸우지도 않고 퇴각하였으니, 구도를 수복할 날도 얼마 남지 않았고 종묘 사직도 차례로 회복할 수 있습니다. 신은 선조의 영혼이 지하에서 감격할 것과 남은 백성들이 소생될 희망을 생각하니 슬픔과 기쁨이 가슴에 교차하여 어리둥절할 뿐입니다. 비록 되살려주신 은혜를 보답하려 해도 실로 도모할 길이 없습니다.

신이 크게 유쾌하게 생각하는 것은 작은 도적들이 제멋대로 날뛰면서 저들 스스로 조개같은 나라에서 자대(自大)하고, 천자의 위엄에는 어두워서 여러번 미친 소리를 퍼뜨리는 것을 신은 항상 통탄했는데, 이번에 귀신이 그 본심을 열어 천벌을 스스로 받아 바다와 섬이 두려워서 벌벌 떨며 감히 숨도 제대로 못 쉬고 거의 살아가지도 못하게 된 것이니 이것이 어찌 소방의 수치만 씻는 것이겠습니까? 실로 천자의 위엄을 드러내 보이는 것입니다. 신은 또 들으니 소원이 있으매 곡진히 이루어주는 것은 천지의 대덕이요, 품은 바를 반드시 진달하는 것은 신자의 지정이라고 했습니다. 신은 생각하건대 지금 흉악한 적이 소탕된 것은 오로지 왕사(王師)에 의함이요 소방은 털끝만큼도 한 일이 없습니다.

저들이 중국 장수가 군사를 돌려 국내가 외롭고 미약하다는 것을 보고 재차 침략할 계책을 드러낸다면 그 화는 더욱 심하고 더욱 막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면 신은 성상께 다시 동국(東國)을 돌보시는 걱정을 끼치고 미신(微臣)은 거듭 왜적 방어를 못한 죄를 질까 두렵습니다. 바라옵건대 성상의 자애로우심으로 바다 귀퉁이의 잔약한 백성을 불쌍히 여기시고 중국 조정의 은혜로우신 인정(仁政)을 끝까지 마무리지으시어 제독부(提督府)에 명을 내리셔서 절강(浙江) 포수 5천 명을 적절히 선발, 한두 장수에서 붙여서 연해의 요해처(要害處)인 부산(釜山) 등지에 몇 달 동안 나누어 주둔하게 하고 한편으로는 소방의 군민을 가르치고, 한편으로는 흉악한 적들의 음모를 소멸시키소서. 그러면 신은 거의 천자의 위엄을 영원토록 의지하여 전후를 수습하여 후일을 대비할 수 있겠습니다. 신이 이미 국토를 회복하였고 또 선후책(善後策)을 바라는 것은 지극히 참람하고 외람되어 죄가 실로 용서받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조정이 이미 소방을 국내로 여겨 구휼하였으니, 소방이 하소연하는데 어찌 감히 외국으로 자처하겠습니까. 신은 더욱 황공스럽습니다. 신이 한편으로는 인력과 가축을 징발하여 군량과 마초의 운반을 독려하고, 한편으로는 병사와 군마를 징발하여 왕사(王師)와 힘을 합쳐 진격하여 경성을 취할 것을 도모하겠으며, 또 함경도에서 서쪽으로 향하는 적에 대비할 것입니다. 신은 수복하여 경성에 환도, 관군을 맞이하여 위로한 뒤에 전후에 은혜받은 연유를 갖추어 다시 사례를 행하려 합니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28면
  • 【분류】
    외교-명(明) / 군사-군기(軍器) / 군사-전쟁(戰爭)

  • [註 026]
    절령(岊嶺) : 황해도 서흥군(瑞興郡)에 있는 재. 자비령(慈悲嶺).
  • [註 027]
    신 : 선조를 말함.
  • [註 028]
    왕사(王師) : 천자의 군대.
  • [註 029]
    천리(天吏) : 하늘의 간리. 곧 천자.
  • [註 030]
    배도(裵度)의 회서(淮西) 평정이나 조빈(曹彬)의 강남(江南) 함락도 이보다 더할 수 없습니다. : 평정이 아주 신속히 이루어진 것을 비유한 말. 배도는 당 헌종 때의 재상. 헌종 10년(815)에 당시 채주 자사(蔡州刺使:채주는 곧 회서 지방이다. )로 있던 오원제(吳元濟)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3년이 되도록 평정되지 않았다. 이에 헌종 12년 7월, 조정에서는 배도를 회서 초토사(淮西招討使)로 삼아 토벌케 하였더니 이해 10월에 절도사 이소(李愬)가 오원제를 사로잡아 난이 평정되었다. 그 공으로 배도는 진국공(普國公)에 봉해졌다. 《신당서(新唐書)》 권173 배도전(裵度傳). 조빈(曹彬)은 오대(五代) 말기 사람. 후주(後周)에 벼슬했다가 조송(趙宋)에 귀부, 건륭(建隆) 1년(960) 10월부터 강남을 토벌하러 출정하여 이듬해 11월에 이욱(李煜)의 오(吳)를 항복받았다. 《송사(宋史)》 권 258 조빈전(曹彬傳).

〔○〕 上幸新安館, 設闕牌, 率百官再拜, 親傳賀平(靈夏)〔寧夏〕 表文, 及拔平壤奏本于使臣吏曹判書韓準。 略曰: "正月初九日, 陪臣諸道體察使柳成龍馳啓云: ‘本月初六日, 有欽差提督薊遼保定山東等處防海禦倭軍務摠兵官都督同知李如松, 統率大勢官軍, 直抵平壤城外, 部分諸將, 圍抱本城。 有倭賊二千餘名, 登城北牡丹峰, 建靑白旗, 發喊放砲。 又有倭賊一萬餘名, 擺立城上, 前植鹿角柵子, 擁楯揚劍, 勢甚猖獗。 又有倭賊四五千名, 建大將旗, 鳴鼓吹螺, 巡視城中, 指揮諸賊, 本城裏外設險, 勢難遽攻, 總兵收軍廻營。 本日寅夜, 有倭賊三千餘名, 含枚潛出, 襲都督楊元, 都督李如栢, 都指揮張世爵等營, 被本官等統兵殺退。 初七日夜, 倭賊約八百餘名, 復斫都督李如栢營, 又被本官殺退。 初八日黎明, 總兵焚香, 卜曰得吉。 喫飯訖, 與三營將官, 分統各該將領官軍人等, 擺陣於七星含毬善通等門外, 總兵領親兵二百餘騎, 往來指揮, 將士踴躡, 咸思盡力。 辰時, 諸軍鱗次漸進, 各樣火器, 一時齊發, 聲震天地, 大野晦冥。 火箭一枝, 着密德土窟, 俄而赤焰亘天, 延(藝)〔爇〕 殆盡。 守陣倭賊, 亂用鉛丸, 湯水石塊, 以死拒守, 又用長搶大刀, 向外齊刃, 森如蝟毛。 總兵手斬畏怯者一名, 號示陣前, 諸軍鼓噪簿城。 負麻牌持矛戟, 相雜齊進, 或發射放砲, 或仰剌守陣之賊, 賊不能支吾, 稍自引退。 總兵挺身先登, 督諸將進入。 天兵一把, 與本國官軍, 入含毬門, 一把入普通門, 一把登密德赤城, 騎步雲集, 四面砍殺, 衆賊崩潰。 天兵當陣斬獲首級, 一千二百八十五顆, 生擒倭賊二名, 幷通事張大膳, 奪獲馬二千五百八十五匹, 得獲器四百五十五件, 救出本國被擄男婦一千一十五名。 天兵乘勝, 縱火悉燒房屋, 衆賊投竄被燒死者, 臭聞一十餘里。 餘賊躱入風月樓小城, 總兵督運柴草, 四面堆積, 仍用火箭飛射, 一時焚燒, 俱成灰燼。 七星普通牡丹等處諸賊, 仍據土窟, 堅固難拔。 總兵收兵, 傳食曰: ‘賊必夜遁。’ 就遣副總兵ㆍ參將等官。 李寧祖承訓葛逢夏等, 領兵埋伏, 總兵同三副將, 由大路進赶, 本賊四散遁去, 被李寧等伏路邀截, 斬獲首級三百五十九顆, 生擒倭賊三名, 餘賊棄甲抛戈, 驚亂遁走, 岊嶺迤西, 悉底蕩平。 臣竊念, 平壤一府, 實本國舊都, 城池險固, 而兇賊豨突, 據爲窟穴。 卽日天兵進討, 一鼓蕩破, 梟獍餘孽, 逃命無所, 本國再造之基, 實在於此。 臣與李元翼等, 督運各處芻糧, 進入本城, (聽侯)〔聽候〕 督府調用云。 臣據此參詳。 小邦軍兵脆弱, 日久愈削, 兼且平壤城險, 未易收復, 臣日夜憂煎, 不知死所, 欽蒙聖明天地父母。 曲念先故, 不以臣失職, 而加罪命, 調南北精兵, 以拯濟小邦塗炭。 慮軍犒之乏, 則先賜銀兩, 憂糧草之缺, 則陸續飛輓。 士卒暴露於野, 驢騾顚損於道, 以臣之故, 貽戚天朝, 至於如此, 臣感激怔營, 若無所措。 竊恐, 王師有征, 天吏無敵。 乃於本年正月初八日壬戌, 進攻平壤, 不崇朝而城破, 除焚溺斬殺之外, 餘賊喪魄逃遁, 其軍威之盛, 戰勝之速, 委前史所未有。 臣與大小陪臣, 初聞捷音, 不覺涕淚之交下。 玆蓋聖天子盛德誕敷, 神武遠暢, 而名公贊謨, 本兵運籌。 侍郞專心機務, 指授方略, 謀猷克合, 用集殊功。 總兵誓師慷慨, 義氣動人, 軍行所過, 秋毫無犯, 臨陣督戰, 身先列校。 至於鉛丸擊馬, 火毒熏身, 色不怖而愈厲。 克城之日, 祭箕子而先封其墓, 恤瘡痍而遍釂陣亡, 宣布德意, 慰問孤寡, 雖裵度之平淮西, 曹彬之下江南, 無以過此。 副參遊擊都司以下, 各該將領等官, 闞如虓虎, 如神助勢。 至有巨石滾下而拒之直上者, 丸入胸膛而鏖殺未已者。 小邦袖手駭縮, 莫敢助力, 徒觀其鐵騎所蹴, 飛塵驀野, 火箭所及, 赤焰彌天, 礮觸列柵, 則決若吹毛, 搶剌守陣, 則捷若飛鶻, 腥烟漫空, 流血渾江, 天地爲之擺裂, 山淵爲之反覆。 彼賊之鳥銃湯石, 政猶螗臂拒轍, 無敢抵敵。 臣竊念, 平壤一城, 實伊精兵器械之處, 臣竭一道之力, 方經年莫窺, 而克復之後, 聞其所設守備, 則決非小邦兵力, 所可攻陷。 天威一震, 列屯望風, 已成破竹之勢, 黃海以東, 不戰自却, 舊都指日可復, 宗社次第汛掃。 臣思先靈地下之感, 念遺黎其蘇之望, 悲哀喜幸, 惝怳難雙。 雖欲報答生成, 實難爲圖。 抑臣之所大快者, 念惟小醜跳梁, 自大於鱗介之鄕, 昧天之威, 屢肆狂言, 臣常痛之, 今者鬼啓其裹, 自取天誅, 其海讋島慄, 惴惴然不敢喘息者, 殆終其遺育, 是豈徒雪小邦之羞? 實亦彰百王之烈矣。 臣又聞之, 有願曲遂, 天地之大德, 所懷必達, 臣子之至情。 臣念, 今兇賊被勦, 專在王師, 而於小邦, 則未始有一毫創也。 渠見天將旋師, 國內孤弱, 再逞反噬之計, 則其禍益甚, 而益難防矣。 臣恐復勤聖上東顧之憂, 而重微臣失禦之罪也。 伏乞聖慈, 憐海隅孑遺之民, 終天朝字惠之仁, 著令督府, 量抽浙江砲手五千名, 仍付一二將官, 分屯沿海要害釜山等處若干月, 一以敎訓小邦軍民, 一以消戢梟獍兇謀。 則臣庶可永仗天威, 收拾餘燼, 以備其後矣。 臣旣復邦土, 又望善後, 極知僭猥, 罪固難貰, 而天朝俯恤, 旣有加於內服, 下邦控訴, 敢自外於一家, 臣益增隕越焉。 臣一面泒發人畜, 督運糧草, 一面調集兵馬, 協同王師, 以圖進取京城。 又備咸鏡向西之賊, 臣擬待收復, 訖還京城, 迎勞官軍, 仍將前後受恩緣由, 別行稱謝。"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28면
  • 【분류】
    외교-명(明) / 군사-군기(軍器) / 군사-전쟁(戰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