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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35권, 선조 26년 2월 5일 경인 8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이 제독이 파주에 진주했다가 벽제에서 왜적에게 대패한 상황에 대한 기록

앞서 이 제독은 평양(平壤)을 탈환하고는 승승 장구하여 정월 초열흘날 밤에 개성부에 들어왔다. 본부의 사족(士族)과 백성들이 굶주리는 것을 보고 은(銀) 1백 냥과 쌀 1백 석을 내어 장세작(張世爵)을 시켜 나누어 주어 진휼하게 하고, 패(牌)로써 유정(劉綎)의 군대를 재촉하여 군대를 전진시킬 계책을 하였다. 26일 임진강(臨津江) 하류로부터 여울을 건너가서 파주(坡州)에 진주(進駐)하였다. 27일 이른아침에 직접 경성(京城)의 도로 형세를 살피기 위해 단기(單騎)로 벽제를 향해 달려갔다.

당시 경성에는 아직 수만의 적이 있었는데, 제독이 먼저 보낸 사대수(査大受)·조승훈(祖承訓) 등이 정기(精騎) 3천여 명을 거느리고 우리 나라의 방어사 고언백과 함께 가다가 영서역(迎曙驛) 앞에서 적을 만났다. 사대수고언백과 함께 군사를 풀어 급습하여 적의 수급 6백여 급을 베었는데, 여러 장수들은 이로 인하여 더욱 적을 가볍게 여겼다. 적장은 그 선봉이 사대수에게 격파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군을 거느리고 숫돌고개[礪石峴]에 와서 진을 쳤다. 사대수는 적병의 형세가 큰 것을 보고 벽제로 물러나 진을 쳤는데 적병은 산과 들에 흩어져서 어느덧 점점 압축해 왔다.

제독은 때마침 노상에서 고언백의 군관을 만나 적군을 형세를 자세히 듣고 벽제로 달려가다가 노상에서 말이 거꾸러지면서 떨어져 얼굴을 다쳤다. 이때 남절 포병(南浙砲兵)은 모두 도착하지 않았고 휘하의 정기(精騎) 1천여 기만 있었는데 제독은 즉시 이미 도착한 군사들만 지휘, 들판에 진을 치고 적과 대진(對陣)하였다. 먼저 신기전(神機箭)을 발하여 처음 1차 교전하니 적이 약간 물러갔으나 중국군의 숫자가 적다는 것을 안 뒤에는 좌우로 흩어져서 죽음을 무릅쓰고 돌격하며 곧바로 중앙을 향해 공격해 왔다. 중국군은 병기와 갑주(甲胄)도 전혀 없이 맨손으로 육박전을 하였다. 제독이 휘하의 날랜 장수 수십 인과 직접 달리면서 쏘았으나 지탱할 수 없는 형세였다. 병사들을 사방으로 물러나게 하고 제독이 뒤에서 대응하며 귀환하는데, 적군 3천여 명이 곧바로 제독에게로 압축해 오니 제독이 쏘면서 퇴각하였다. 적군이 마침내 예기(銳氣)를 타고 마구 살상하니, 중국군이 전사자가 수백 명이었다. 이 비어(李備禦)와 마 천총(馬千摠)이 모두 적에게 죽음을 당하자 제독은 말에서 내려 통곡하였다. 벽제에 있던 우리 나라의 양곡은 거의 다 산실되었다.

이에 앞서 제독은 군량이 부족하므로 군사를 반으로 나누어 그 반은 동파(東坡)에 머물러 두고 반만 강을 건너게 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형세가 위급하게 되자 황급히 사람을 보내 후군을 재촉을 불렀으나 후군이 겨우 옹암(甕巖)을 지났을 때 전군(前軍)이 이미 패전해 돌아왔다. 적이 추격하여 혜임령(惠任嶺)에 이르러 대군을 바라보고는 감히 고개를 넘지 못하고 달아나 도성으로 되돌아갔다. 당시 중국군은 멀리 와서 피로하고 또 말에 역질(疫疾)이 있어 죽은 군마(軍馬)가 1만 2천여 필에 이르렀고, 벽제에서 패하게 되자 사상한 말이 매우 많았다. 얼마 있다가 청정(淸正)함경도로부터 되돌아와 경성에 와서 진을 합치자 적세가 더욱 성해지니 제독은 이 때문에 감히 재차 군사를 일으킬 계획을 하지 못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6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24면
  • 【분류】
    군사-전쟁(戰爭) / 외교-명(明) / 외교-왜(倭)

    ○初, 李提督旣拔平壤, 乘勝長驅, 正月初十日, 夜入開城府。 見本府士民飢饉, 發銀一百兩, 米一百石, 令張世爵俵散賑救, 牌催劉綎兵馬, 以爲進兵之計。 二十六日, 自臨津下流涉灘以過, 進次坡州。 七日早朝, 欲親審京城道路形勢, 單騎馳向碧蹄。 時京城之賊, 尙有數萬, 提督先遣査大受祖承訓等, 領精騎三千, 與本國防禦使高彦伯, 遇賊於迎曙驛前。 大受彦伯, 縱兵急擊, 斬獲六百餘級, 諸將, 因此益輕敵。 賊將聞其前鋒爲大受所破, 悉象而來陣於礪石峴大受見賊騎勢大, 退屯碧蹄, 賊分布山野, 看看漸逼。 提督方行路上, 見彦伯軍官, 詳聞賊勢, 遂馳往碧蹄, 路上馬蹶, 墜落傷臉。 時, 南浙砲兵俱未及到, 只有手下精騎千餘, 提督卽麾已到之兵, 進陣于野, 與賊對陣。 先放神機箭, 初一交戰, 賊少却, 而已見天兵小, 左右散出, 冒死突出, 直衝中堅。 天兵全無器械甲胄, 徒手搏戰。 提督與手下驍將數十人, 親自馳射, 勢不能支。 麾兵四退, 提督殿後而還, 賊三千餘人, 直逼提督, 提督且射且退。 賊遂乘銳, 亂斫天兵, 死者數百。 李備禦馬千揔, 皆死於賊, 提督下馬痛哭。 本國糧餉在碧蹄者, 散失殆盡。 先是, 提督以糧不敷, 中分, 其一半留鎭東坡, 一半渡江, 至是勢急, 急遣人促召後軍, 纔過瓮巖前, 軍已罷還矣。 賊追至惠任嶺, 望見大軍, 不敢踰嶺, 奔還京城。 時天兵遠來疲弊, 又有馬疾, 戰馬死者至一萬二千餘匹。 及碧蹄之敗, 死傷甚衆, 已而淸正還自咸鏡道, 合陣於京城, 賊勢益盛, 提督因此, 不敢爲再擧之計。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6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24면
    • 【분류】
      군사-전쟁(戰爭) / 외교-명(明)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