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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35권, 선조 26년 2월 2일 정해 1번째기사 1593년 명 만력(萬曆) 21년

영의정 최흥원 등이 동궁을 해주로 진주하라는 전교를 다시 생각하라고 청하다

영의정 최흥원(崔興源), 청천군(淸川君) 한준(韓準), 아천군(鵝川君) 이증(李增), 병조 판서 이항복(李恒福), 이조 판서 이산보(李山甫), 행 이조 참판(行吏曹參判) 구사맹(具思孟), 행 호조 참판 윤자신(尹自新), 우참찬(右參贊) 성혼(成渾), 형조 참판 이희득(李希得), 한성부 좌윤(漢城府左尹) 정언지(鄭彦智), 행 호군(行護軍) 이윤덕(李潤德), 공조 참판 박응복(朴應福), 행 이조 참의 심충겸(沈忠謙), 예조 참판 이충원(李忠元),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유자신(柳自新)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보니, 간원이 아뢴 바에 따라 동궁(東宮)이 해주(海州)에 진주할 일을 전교하셨습니다. 신들의 생각에는 양궁(兩宮)께서 나누어 머무시는 거조(擧措)가 성충(聖衷)에 차마 견디시기 어려운 점이 계시겠지만 이와 같이 애써 하시는 것은 필시 국토 수복에 유익함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이러한 부득이한 계책을 낸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신들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특히 미안한 점이 있습니다. 작년 영변(寧邊)에서 나누어 머무시던 때는 사세가 황급하여 머리털 하나로 천근을 끄는 것 같은 중임을 저궁(儲宮)에게 부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 후에 난여(鑾輿)가 오래도록 의주(義州)에 머물러 학가(鶴駕)016) 와 회합하기 어려웠던 것은 어렵고 위태한 시기라 양궁께서 실로 한 곳에서 함께 계실 수 없었기에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난번에 중국 장수가 평양에 군대를 주둔하였을 때 우리 나라에서 접대를 소홀히 했다 하여 자못 노여워하는 뜻이 있었습니다. 이때 대가(大駕)는 아직 의주에 있었는데 동궁은 마침 가까운 곳에 있었으므로 전진하여 책응(策應)하는 것이 기의(機宜)에 맞을 듯하여 조정 신하들은 과연 무방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시세(時勢)의 기의가 달라졌습니다. 지금은 적이 이미 퇴각하고 삼경(三京)이 수복되어 대가가 점진하시는 일을 실로 늦출 수가 없습니다. 비록 동궁이 먼저 해주(海州)에 간다고 하더라도 중국 장수는 이미 돌아왔으므로 별로 주간할 일이 없으니, 매우 무익하고 불편하기만 할 뿐입니다.

대저 분조(分朝)의 거사는 바로 국가가 비운(否運)이 극도에 달한 시기를 당하여 부득이 이러한 비상 조치를 하는 것이니, 한 번은 할 수 있으나 두 번 할 수는 없으며 잠시는 할 수 있으나 오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날 세자의 직임은 오직 문안을 드리고 찬선(饌膳)을 보살피고 학문을 강론하고 선(善)을 기르는 것일 뿐입니다. 전후의 형세가 다르고 경중의 차이가 있습니다. 국가가 위급한 시기를 당해서는 비록 무군(撫軍)과 감국(監國)을 급선무로 삼지만 사변이 조금 진정된 뒤에는 마땅히 부왕을 기쁘게 해드리고 문안 올리는 일을 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요점은 때에 따라 조처하되 각각 마땅함을 다하는 데 있습니다. 이 밖에 사세의 어려움과 지공(支供)의 폐단은 일이 번거롭고 자질구레하므로 상세히 아뢰지 못하겠습니다. 바라옵건대 다시 더 생각하시어 성명(成命)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21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종친(宗親) / 군사-전쟁(戰爭) / 외교-명(明) / 외교-왜(倭)

  • [註 016]
    학가(鶴駕) : 세자를 말함.

○丁亥/領議政崔興源, 淸川君 韓準, 鵝川君 李增, 兵曹判書李恒福, 吏曹判書李山甫, 行吏曹參判具思孟, 行戶曹參判尹自新, 右參贊成渾, 刑曹參判李希得, 漢城府左尹鄭彦智, 行護軍李潤德, 工曹參判朴應福, 行吏曹參議沈忠謙, 禮曹參判李忠元, 同知敦寧府事柳自新啓曰: "臣等伏見, 因諫院所啓, 東宮進駐海州事, 傳敎矣。 臣等仰惟, 兩宮分駐之擧, 想有所不忍於聖裹, 而如是勉副者, 必以爲有益於收復, 而出此不得已之計也。 抑臣等愚意, 殊有所未安者。 上年寧邊分住之日, 事勢蒼黃, 一髮千斤之托, 不得不付於儲宮。 而厥後鑾興久駐義州, 鶴駕難於會合者, 艱危之日, 兩宮固不可處一隅, 事勢不得不如是。 而頃者天將駐師平壤, 以我國接應欠闕, 頗有嗔怪之意。 此時大駕尙駐義州, 東宮適在近地, 前進策應, 似合機宜。 廷臣之意, 果以爲無妨。 轉移之間, 時勢異宜。 今則賊已退遁, 三京收復, 大駕漸進, 固不可緩。 東宮雖先往海州, 天將已還, 別無所幹, 事甚無益, 徒爲未安耳。 大抵分朝之擧, 乃當國家否極之日, 不得已爲此非常之擧, 可一而不可再, 可暫而不可久。 今日儲宮之職, 則惟在於問安、視膳、講學、資善而已。 前後異勢, 輕重有在。 當國家危亂之日, 雖以撫軍監國爲急, 而及事變稍定之後, 則當以承歡問寢爲重。 要在隨時處置, 各盡其當矣。 此外事勢之難, 支供之弊, 事涉煩屑, 不敢縷瀆。 伏乞更加三思, 還寢成命。"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18책 35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21면
  •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종친(宗親) / 군사-전쟁(戰爭) / 외교-명(明)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