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수복 전투의 전모를 기록한 기사
처음에 제독 이여송(李如松)이 군사 3만 명을 거느리고 부총병(副總兵) 양원(楊元)을 중협 대장(中協大將)으로, 부총병 이여백(李如栢)을 좌익 대장(左翼大將)으로, 부총병 장세작(張世爵)을 우익 대장(右翼大將)으로 삼고, 부총병 임자강(任自强)·조승훈(祖承勳)·손수렴(孫守廉)·사대수(査大受)와 참장(參將) 이여매(李如梅)·이여호(李如梧)·방시춘(方時春)·양소선(楊紹先)·이방춘(李芳春)·낙상지(駱尙志)·갈봉하(葛逢夏)·동양중(佟養中)과 유격(遊擊) 오유충(吳惟忠)·이영(李寧)·양심(梁心)·조문영(趙文明)·고철(高徹)·시조경(施朝卿)·척금(戚金)·심유(沈惟)·고승(高昇)·전세정(錢世禎)·누대우(婁大有)·주역(周易)·왕문(王問) 등 여러 장수를 소속하게 하였다. 임진년 12월 25일에 압록강을 건넜고 계사년 1월 5일에 순안현(順安縣)에 주차(駐箚)하여 먼저 부총병 사대수를 보내어 왜장과 부산원(斧山院)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게 하였는데, 평양성의 적장 평행장(平行長)이 그의 비장(裨將) 평후관(平後寬)을 시켜 가서 영접하게 하였다. 사대수가 사로잡아 제독의 군중(軍中)으로 보내었는데, 밤에 적 몇 명이 기회를 틈타 도망하자 여러 군사가 쫓아가 죽이고 인해서 평후관을 단단히 가두었다.
6일 새벽에 제독이 군사를 진격시켜 평양성 밑에 닿게 하고 여러 장수를 나누어 본성(本城)을 에워싸고 백기(白旗)에다가,
"조선 군민으로서 자진하여 기(旗) 아래로 투항하는 자는 죽이지 않겠다."
고 써서 세워 놓았다. 왜적이 1천여 명의 군사를 내어 성의 북쪽에 있는 모란봉(牧丹峯)에 웅거하여 청백기를 세우고 함성을 지르며 포를 쏘았다. 또 군사 약 5천여 명을 나누어 북성(北城)에서부터 보통문(普通門)까지 성위에 줄을 지어 서서 앞에는 녹각 책자(鹿角柵子)를 박았으며 방패로 가리고 칼을 번뜩였다. 그 가운데 대두아(大頭兒)가 강한 군사 수백여 명을 거느리고서 대장기(大將旗)를 세우고 나팔을 불며 북을 울리면서 성 위를 순시하고 여러 적을 지휘하였다. 제독이 한 지병(枝兵)을 내어 모란봉을 경유하여 올라가 쳐다보며 공격하는 것처럼 하도록 하자 적이 높은 지세를 이용하여 아래로 조총을 쏘므로 군사들이 물러났다. 적이 성을 나와서 추격하므로 명나라 군사가 쇠방패[鐵盾] 수십 개를 버리고 가자 적이 그것을 다투어 가지므로 명나라 군사가 되돌아서서 공격하니 적이 성으로 들어갔다. 포시(晡時)에 제독이 징을 울려 군사를 거두어 군영으로 돌아왔다. 이날 밤에 적 수백여 명이 재갈을 물고 몰래 나와 우영(右營)을 습격하였는데, 명나라 군사가 일시에 기(旗)를 거두고 등불을 끄며 거마목(拒馬木) 아래에서 일제히 화전(火箭)을 발사하니, 밝은 빛이 낮과 같았으므로 적이 도망하여 성으로 일제히 되돌아갔다.
7일 사시(巳時) 끝 무렵에 삼영(三營)이 함께 출동하여 보통문에 이르러 성을 공격한 다음 짐짓 물러나는 척하니 적이 문을 열고 나와서 추격하므로, 명나라 군사가 되돌아서서 싸워 30여 급을 베고 문입구까지 추격하였다가 되돌아왔다.
8일 이른 아침에 제독이 향을 피우고 좋은 날을 점쳐서 가린 다음 삼군(三軍)이 전식(傳食)하기를 마치자, 삼영의 장수와 함께 각 해당 군사들을 나누어 통솔하여 성밖 서북쪽을 포위하였다. 유격 장군(遊擊將軍) 오유충과 원임 부총병(原任副總兵) 사대수는 모란봉을 공격하고, 중군(中軍) 양원과 우협 도독(右協都督) 장세작은 칠성문(七星門)을 공격하고, 좌협 도독(左協都督) 이여백과 참장(參將) 이방춘은 보통문을 공격하고, 부총병 조승훈과 유격 낙상지는 본국(本國)의 병사(兵使) 이일(李鎰), 방어사(防禦使) 김응서(金應瑞) 등과 함구문(含毬門)을 공격하였다. 여러 군사가 비늘처럼 늘어서서 점차로 진격하였는데, 빙판길을 바라보니 말발굽에 날리는 얼음 조각과 잡다한 티끌이 흰 안개처럼 공중에 가득하였으며, 해가 떠올라 투구와 갑옷에 내려 비치자 은빛이 찬란하고 만상(萬狀)이 현란하게 빛나 매우 장관이었다. 적도 성가퀴 위에서 오색의 깃발을 많이 펼치고 긴 창과 큰 칼을 묶어 날을 가지런하게 하여 밖으로 향하게 하여 항거하며 지킬 계획을 하였다. 제독이 친병(親兵) 1백여 기(騎)를 거느리고 성 아래로 바싹 진격하여 장사(將士)들을 지휘하였다. 조금 있다가 대포 1호(號)를 발사하자 각진에서 잇따라 일제히 발사하니 소리가 우레와 같아 산악이 흔들리는 듯하였으며, 어지럽게 화전(火箭)을 발사하자 연기와 화염이 수십 리에 가득하여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으며, 단지 고함소리만 포(砲) 소리에 섞여 들리는 것이 수많은 벌이 윙윙대는 것 같았다. 잠시 후에 서풍이 갑자기 일어 포연(砲烟)을 거두어 곧바로 성안으로 몰려갔는데 세찬 바람에 불길이 몹시 거세었다. 먼저 밀덕 토굴(密德土窟)에 불이 붙으니 붉은 화염이 하늘에 뻗치고 부근으로 번져 모두 태웠으며 성위의 적의 깃발도 잠깐 사이에 바람에 쓰러졌다. 제독이 여러 군사들을 고무시켜 성에 다가가자 적이 성가퀴 안에 엎드려 있다가 어지럽게 연환(鉛丸)을 쏘며, 끓는 물을 붓고 큰 돌을 굴리며 저항하였다. 많은 군사들이 조금 퇴각하자 제독이 손수 겁을 먹고 퇴각하는 자 중 한 사람의 목을 베어 진(陣) 앞에서 돌려가며 보인 다음 제독이 앞장서서 진격하면서, ‘먼저 성에 오르는 자는 은 5천 냥을 상으로 주겠다.’고 소리쳤다. 오유충(吳惟忠)은 탄환을 맞아 가슴을 다쳤는데도 전투를 더욱 힘써 독려하였으며, 낙상지(駱尙志)는 함구문(含毬門) 쪽의 성을 따라 긴 창을 가지고 마패(麻牌)를 짊어지고 몸을 솟구쳐 성가퀴에 오르는데 적이 던진 큰 돌을 발에 맞아 다쳤지만 그것을 무릅쓰고 곧바로 올라갔다. 여러 군사들이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그를 따르니, 적이 감히 저항하지 못하였다. 절강(浙江)의 군사가 먼저 올라가 적의 깃발을 뽑아 버리고, 명나라 군사의 기를 세웠다. 제독이 좌협 도지휘(左協都指揮) 장세작(張世爵) 등과 칠성문을 공격하였으나 적이 문루(門樓)에 웅거하였으므로 쉽게 공격하여 빼앗지 못하자 대포를 쏘며 공격하도록 명하였다. 포(砲) 2지(枝)를 문루에 충돌시켜 부수자 무너져 모두 타버리니 제독이 군사를 정돈하여 들어갔다. 여러 군사들이 승세를 틈타 앞다투어 진격하니 기병과 보병이 구름같이 모여 사방으로 쳐죽였다. 적들이 형세가 위축되어 달아나 여러 막사(幕舍)로 들어가자 명나라 군사들이 차례로 태워 모두 죽이니 냄새가 십여 리까지 났다.
적장 행장(行長)이 도망하여 연광정(練光亭) 토굴로 들어갔는데 제독이 땔감을 운반하도록 하여 사방에 쌓아두게 명하고 장차 불로 공격할 계획을 하였으나 칠성문과 보통문 등 여러 굴(窟)의 적이 굳게 지키므로 쉽게 함락시킬 수 없었다. 그러자 제독이 여러 군사를 모아 쳐다보며 공격하게 하니, 적이 안에서 탄환을 쏘았는데 맞아 죽은 명나라 군사의 시체가 서로 잇따랐고 제독이 탄 말도 탄환에 맞았으므로, 여러 장수들이 제독에게 조금 후퇴하여 군사들을 휴식시키기를 청하였다. 포시(晡時)에 제독이 적의 굴을 함락시키기 어렵고 많은 군사들이 주리고 피곤하다고 하여 군사를 물려 병영으로 돌아와 장대선(張大膳)을 시켜 행장 등에게 유시하기를,
"우리 병력으로 한번 거사하여 충분히 섬멸시킬 수 있지만 차마 인명을 모두 죽일 수 없어 우선 물러나 너희들의 살길을 열어주니, 속히 여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원문(轅門)에 나와서 나의 분부를 듣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용서하여 줄 뿐만 아니라 후한 상을 주겠다."
하니, 행장 등이 회보하기를,
"우리들이 퇴군하고자 하니 후면을 차단하지 말기 바란다."
하므로, 제독이 허락하였다. 그날 저녁에 통관(通官)으로 하여금 평안 병사(平安兵使) 이일(李鎰)에게 분부하여 중화(中和) 일로의 우리 나라 복병(伏兵)을 철수하게 하였다. 밤중에 행장(行長)·현소(玄蘇)·의지(義智)·조신(調信) 등이 남은 적을 거느리고 얼음을 타고 대동강을 건너 탈출하였다. 중화와 황주 일로에 연이어 주둔하여 있던 적들이 평양의 포성을 듣고 먼저 철수하였다.
황주 판관 정엽(鄭曄)이 행장의 후미(後尾)를 끓어 90여 급을 베었다. 적은 굶주리고 군색함이 심하여 인가에 들어가기도 하고, 사찰에 묵기도 하였다가 참살당한 자가 또 30여 급이었다. 봉산(鳳山)의 동선현(洞仙峴)에 이르러서는 적들이 더욱 피곤했지만 황해(黃海)의 직로(直路)를 차단하는 자가 전혀 없어 저 괴수들이 온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 이번에 명나라 군사가 전투에서 참획(斬獲)한 것이 1천 2백 85급이며, 사로잡은 자가 두 명이고, 아울러 절강인(浙江人) 장대선을 사로잡았고 빼앗은 말이 2천 9백 85필이고, 본국의 사로잡혔던 남녀를 구출한 것이 1천 2백 25명이었다.
9일에 제독이 여러 군사들을 거느리고 성에 들어가 먼저 전진에서 죽은 장졸에게 제사를 지내고 몸소 통곡하였으며 고아와 과부들을 위문하였다. 이튿날에는 기자묘(箕子廟)에 제사를 지낸 다음 비로소 선봉(先鋒)의 여러 장수를 보내어 성언(聲言)하면서 적을 추격하여 황주까지 갔다가 돌아왔다.
이 전투에서 남쪽의 군사들이 날래고 용감하게 싸웠기 때문에 이들을 힘입어 승리할 수 있었으나, 명나라 군사의 사상자도 많았으며 굶주려 부르짖으며 피를 흘리는 자가 길에 잇따랐다. 뒤에 산동 도어사(山東都御史) 주유한(周維翰)과 이과 급사중(吏科給事中) 양정란(楊廷蘭) 등이 올린 주본(奏本)에 이여송이 평양의 전투에서 벤 수급 중 절반이 조선 백성이며, 불에 타 죽거나 물에 빠져 죽은 1만여 명도 모두 조선 백성이라고 하였다. 중국 조정에서는 이를 인하여 포정(布政) 한취선(韓就善)과 순안(巡按) 주유한 (周維翰) 등으로 하여금 직접 평양에 가서 진위를 조사하게 하고, 또 본국도 사실에 의거하여 아뢰게 하였는데 본국에서도 변명을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7책 34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01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初, 李提督如松領兵三萬, 以副摠兵楊元爲中協大將, 副摠兵李如栢爲左翼大將, 副摠兵張世爵爲右翼大將, 副摠兵任自强、祖承勳、孫守廉、査大受, 參將李如梅、李如梧、方時春、楊紹先、李芳春、駱尙志、葛逢夏、佟養中, 遊擊吳惟忠、李寧、梁心、趙文明、高徹、施朝卿、戚金、沈惟、高昇、錢世禎、婁大有、(周昜)〔周易〕 、王問等諸將屬焉。 壬辰十二月二十五日, 渡鴨綠江, 癸巳正月初五日, 駐箚于順安縣。 先遣副摠兵査大受, 約會倭將於斧山院, 平壤賊將平行長, 令其裨將平後寬往迎之。 大受拿致于提督軍中, 夜, 賊數名見機而逃, 衆軍追殺之, 仍堅鎖平後寬。 初六日曉, 提督進諸軍, 扺平壤城下, 部分諸將, 圍住本城, 竪白旗書曰:
朝鮮軍民, 自投旗下者免死。
倭賊出一千餘兵, 據城北牧丹峯, 建靑白旗, 發喊放砲。 又分軍約五千餘名, 自北城至普通門, 擺立城上, 前植鹿角柵子, 擁楯揚劍。 其中大頭兒, 領勁兵數百餘名, 立大將旗, 吹螺鳴皷, 巡視城上, 指麾諸賊。 提督出一枝兵, 由牧丹峯上, 佯若仰攻者然, 賊乘高下放鳥銃, 衆軍引却。 賊踰城出追, 天兵棄鐵盾數十面而去, 賊爭取之。 天兵回擊之, 賊入城。 晡時, 提督鳴金, 收軍還營。 是夜, 賊數百餘名, 含枚潛出, 來襲右營, 天兵, 一時撲滅旗燈, 從拒馬木下, 齊放火箭, 光明如晝。 賊遁還入城。 初七日巳末, 三營俱出, 抵普通門攻城, 佯退。 賊開門出追, 天兵還戰, 斬三十餘級, 逐之及門口而回。 初八日早朝, 提督焚香卜日, 傳食三軍訖, 與三營將領, 分統各該軍兵, 環城外西北面。 遊擊將軍吳惟忠, 原任副摠兵査大受攻牧丹峯, 中軍楊元, 右協都督張世爵攻七星門, 左協都督李如栢, 參將李芳春攻普通門, 副摠兵祖承勳, 遊擊駱尙志, 與本國兵使李鎰, 防禦使金應瑞等攻(舍毬門)〔含毬門〕 。 諸軍鱗次漸進, 望見氷路, 馬跑飛屑, 雜塵如白霧漲空, 初日下射盔鎧, 銀光燦爛, 眩曜萬狀, 奇怪奪目。 賊亦於陴上, 多張五色旗幟, 束長槍大刀, 齊刃向外, 爲拒守計。 提督領親兵百餘騎, 進薄城下, 指揮將士。 俄而發大砲一號, 各陣繼而齊發, 響如萬雷, 山嶽震搖, 亂放火箭, 烟焰瀰數十里, 咫尺不分, 但聞吶喊聲, 雜於砲響, 如萬蜂鬨鬧。 少選, 西風忽起, 捲砲烟直衝城裏, 火烈風急。 先着密德土窟, 赤焰亘天, 延殆盡, 城上賊幟, 須曳風靡。 提督鼓諸軍薄城, 賊伏於陴中, 亂用鉛丸, 湯水大石, 滾下拒之。 衆軍稍却, 提督手斬怯退者一人, 巡示陣前, 提督挺身直前, 呼曰: "先登城者, 賞銀五千兩。" 吳惟忠中丸傷胸, 策戰益力, 駱尙志從含毬門城, 持長戟負麻牌, 聳身攀堞, 賊投巨石, 撞傷其足, 尙志冒而直上。 諸軍皷噪隨之, 賊不敢抵當。 浙兵先登, 拔賊幟, 立天兵旗麾。 提督與左協都指揮張世爵等, 攻七星門, 賊據門樓, 未易拔, 提督命發大砲攻之。 砲二枝着門樓, 撞碎倒地燒盡, 提督整軍而入。 諸軍乘勝爭前, 騎步雲集, 四面砍死。 賊勢縮, 逬入諸幕, 天兵次第燒殺幾盡, 臭聞十餘里。 賊將行長逃入練光亭土窟, 提督命運柴草, 四面堆積, 將爲火攻計, 已而七星、普通等諸窟之賊堅守, 不可猝下。 提督會諸軍, 仰攻之。 賊從中放丸, 天兵僵屍相續, 提督所騎馬中丸, 諸將請提督少退休兵。 晡時, 提督以賊窟難拔, 衆軍飢疲, 退師還營, 使張大膳, 諭行長等曰: "以我兵力, 足以一擧殲滅, 而不忍盡殺人命, 姑爲退舍, 開爾生路, 速領諸將, 來詣轅門, 聽我分付。 不但饒命, 當有厚賞。" 行長等回報曰: "俺等情願退軍, 請無攔截後面。" 提督許諾。 其夕, 令通官, 分付于平安兵使李鎰, 撤回中和一路我國伏兵。 夜半, 行長、玄蘇、義智、調信等, 率餘賊, 乘氷渡大同江脫去。 中和、黃州一路連營之賊, 聞平壤砲聲, 先已捲遁。 黃州判官鄭曄, 截行長之後, 斬九十餘級。 賊飢窘甚, 或入人家, 或投寺刹而被斬者, 又三十餘級。 至鳳山之洞仙峴, 賊益疲倦, 而黃海直路絶無堵截者, 渠魁俱得全還。 是日天兵當陣斬獲一千二百八十五級, 生擒二名, 竝擄浙江人張大膳, 奪馬二千九百八十五匹, 救出本國被擄男婦一千二百二十五名。 初九日, 提督率諸軍入城, 先酹陣亡將卒, 身自痛哭, 慰問孤寡。 翌日祭箕子廟, 始遣先鋒諸將, 聲言追賊, 至黃州而還。 是戰也, 南兵輕勇敢戰, 故得捷賴此輩, 而天兵死傷者亦多, 呼飢流血, 相繼於道。 後山東都御史周維韓, 吏科給事中楊廷蘭等, 上本以爲: "李如松 平壤之役, 所斬首級, 半皆朝鮮之民, 焚溺萬餘, 盡皆朝鮮之民。" 中朝, 因此令布政韓就善, 巡按周維翰等, 親至平壤, 杳覈眞僞, 且令本國, 據實以聞。 本國亦爲辨明。
- 【태백산사고본】 17책 34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60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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