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군의 동향과 출병 시기 등에 대해 이산보가 올린 보고문
이조 판서 이산보(李山甫)가 치계하였다.
"신이 8일 배사(拜辭)한 후에 중강(中江)을 건넜는데 중국 군졸이 관문(關門)을 닫고 완강하게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누구든지 마음대로 지나가지 못한다. 이는 바로 금약(禁約)이다. 동 참장(佟參將)이 송 시랑(宋侍郞)을 영접하는 일로 떠난 지 이미 며칠이 되어 구련성(九連城)에는 단지 중군(中軍)만이 있다. 만일 그대가 기어이 지나가고자 한다면 마땅히 역관(譯官)을 보내 나와 함께 가서 품(稟)해야 한다.’ 하므로 신은 역관 남호정(南好正)으로 하여금 함께 가도록 하였습니다. 왕복하는 사이에 날이 이미 저물어 부득이 적강(狄江) 서촌(西村)에서 유숙하였습니다. 9일 새벽에 출발하여 봉황성(鳳凰城) 남쪽 교외에서 장 도사(張都司)를 만났는데, 도사가 말하기를 ‘나는 추량(芻糧)을 검찰하는 일 때문에 순안(順安)으로 간다. 대군(大軍)은 13일 사이에 꼭 출발할 것이니 갈 필요가 없다.’ 하였으나, 신은 자문(咨文)을 받들었으니 정지할 수 없다는 뜻으로 사양했습니다.
탕참(湯站)에 도착하여 유격 전세정(錢世禎)이 선봉(先鋒) 1천여 명을 거느리고 탕참에 들어왔다는 말을 들었는데 신이 성밖을 지나다가 흩어져 가는 걸 보니 3백 명에 불과했습니다. 참에서 1식(息)쯤 지나가 서고산(西孤山) 민가에서 숙박했는데 마침 파발(擺撥) 2명이 있었습니다. 남호정이 묻기를 ‘전 유격의 군사가 1천 명이라 하던데 지금 보니 3백 명뿐이다. 왜 그런가’ 했더니, 답하기를 ‘한 명도 덜하지 않다. 50명으로 1대(隊)를 만들었는데 모두 20대이다. 반드시 모두 성안으로 들어갔기 때문에 성을 지날 때 미처 보지 못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후로 노상에서 목견(目見)하는 대로 속으로 세어 보았는데 남방(南方) 포수(砲手), 보병(步兵) 1천여 명은 착용한 겉옷 색깔이 다 같지 않았고, 방패차(防牌車)·화차(火車)가 각 30여 량(輛)이었으며, 군기(軍器)와 군량(軍糧)을 운반하는 것들이 길에 잇따랐습니다. 연산(連山) 촌가에 유숙할 때 남호정이 남쪽으로 오는 중국 사람을 만나 묻기를 ‘포수가 5천 명이라 했는데, 길에서 본 것은 겨우 1천여 명뿐이니 왜 그런가?’ 하니, 답하기를 ‘어찌 그렇겠는가. 5천 인을 5대(隊)로 나누어서 5방(方)의 색을 상징하는 옷을 입혔는데 두건(頭巾)이 흰 것은 서방(西方) 숙살(肅殺)의 색이다.’ 하였습니다.
12일에 가다가 동 참장(佟參將)을 첨수참(甛水站)에서 찾아보니, 동 참장이 말하기를 ‘제독(提督) 이여송(李如松)이 8일에 이미 요양(遼陽)에 도착하여 호군(犒軍)한 후 13일 사이에 꼭 출발하기로 되어 있으니, 청병(請兵)하는 걸음은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다.’ 하였습니다. 신은 역시 자문을 받들었다는 것으로 사양했습니다. 13일 오후에 요양에 들어가 도사(都司)를 찾으니, 현재 동정(東征)하는 군졸을 호군하고 있어 번거롭다 하여 상견하지 못했습니다. 진무(鎭撫) 계연방(桂聯芳)이 말하기를 ‘모든 자문은 도사에게 바쳐 전보(轉報)하는 것이 격례(格例)이다. 이번에는 왜 곧바로 시랑에게 이자(移咨)하려 하는가?’ 하므로, 남호정에게 답하게 하기를 ‘송야(宋爺)의 행차가 8일로 정해졌다고 들었기 때문에 반드시 중로(中路)에서 만날 것으로 생각되어 전보(轉報)하지 못할 것 같아 임시 조치로 곧바로 이자하려 한 것이지 어찌 지금 요양에 들어올 것을 생각이나 했겠는가.’ 하니, 계연방 역시 그렇겠다고 하였습니다.
14일 새벽에 먼저 송 시랑의 부(府)로 가야 했으나 늦게 나온다는 말을 듣고 이 제독(李提督)의 부로 먼저 갔습니다. 제독이 처마 아래로 나와 서서 예(禮)를 받고는 잠시 정문(呈文)을 보더니, 말하기를 ‘나에게도 마땅히 이자(移咨)해야지 이제 어찌 송야(宋爺)에게만 이자하는가?’ 하므로, 남호정을 시켜 답하기를 ‘우리들이 8일 의주(義州)를 출발할 당시에는 전혀 노야의 기별을 듣지 못하였다. 설혹 들어서 알았다면 감히 노야 존위(尊位)에게 자문을 받들지 않겠는가.’ 하니, 이 제독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겠다.’ 하고는 송 시랑에게 보내는 자문을 가져오게 하여 잠시 보고는 묻기를 ‘이번에 무슨 일로 왔는가?’ 하기에, 남호정을 시켜 답하기를 ‘우리 나라가 망하게 되었는데도 스스로 떨치고 일어날 수가 없어 날마다 중국군이 오기를 기다리는데, 아직껏 확실한 기약이 없고 겨울은 다 가 겨우 순망(旬望)이 남았다. 봄이 되어 날씨가 따뜻해지면 왜적이 또 마음대로 날뛸 것인데 그렇게 되면 용병(用兵)을 백배나 하더라도 성공하기가 용이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송야에게 자문을 받들어 속히 병마(兵馬)를 진군하도록 애원하려는 것이다. 또 전일에 심 유격이 강화하여 대동강(大同江)을 한계로 한다는 설을 내어 군정(群情)을 해이해지게 하였고, 함경도(咸鏡道)에서 얻은 왜서(倭書)에도 역시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할 말이 있었다. 동변(東邊)의 왜적은 또 선왕(先王)의 묘(墓)를 파헤쳐 과군(寡君)이 밤낮으로 호읍(號泣)하고 있으므로 자문을 갖추어 다급한 상황을 송야에게 고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이 제독이 말하기를 ‘심유경의 일은 믿을 필요가 없다. 나와 송야는 이미 완전하게 의논하였다. 다만 심(沈)의 사람이 강을 지나 평양에 도착할 것이니 그대 나라는 삼가고 막아서 함경도 적진으로 가지 못하게 하라. 동쪽의 왜적이 무덤을 파헤친 것은 매우 놀랍다. 나 역시 봄에는 용병하기가 어렵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16일에 군사를 이끌고 먼저 가기로 하였다. 다만 거느릴 병마가 10만인데 현재 온 자는 4만이다. 다 모이기를 기다리자면 기회를 잃을까 염려되었는데, 4만 명으로 왜적을 평정하기에 족하겠는가? 그대 나라의 병마는 얼마인가?’ 하므로, 남호정을 시켜 답하기를 ‘노야의 발정(發程) 분부를 듣고보니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겠으며 우리 나라의 군심들은 이제야 다시 살아날 길이 열렸다. 우리 나라의 병마는 순안(順安) 및 근처에 있는 것이 대개 2만 명이다.’ 하였는데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이 제독이 급히 문으로 나가면서 말하기를 ‘찰원(察院)에 가 보아야겠으니 다시 돌아와 이야기하자.’ 하고는 남호정을 대동하고 갔습니다. 노상에서 도로(道路)·양초(糧草) 등의 일을 묻기에 그 물음에 따라 대답했다 합니다. 이 제독이 또 말하기를 ‘심유경의 일은 한 가지 일도 믿지 않는다. 나는 8일에 이곳에 도착하여 집에 돌아가 할아버지 제사를 지내고자 하였으나 겨를이 없었다. 급속히 군사를 전진시켜 그대 나라를 회복시키고자 한다. 우리 아버지 때부터 그대 나라와는 후하게 지내서 나는 다른 장관(將官)과는 비할 바가 아니니, 마땅히 힘을 다해 구원할 것을 그대 나라에서도 알고 있는가? 강을 건너는 날에 모름지기 모여 이야기할 통사(通事) 및 지식 있는 총병(摠兵) 몇 명을 뽑아 데리고 가겠다. 또 그대가 송야(宋爺)에게 자문을 바친 후에 배신(陪臣)이 다시 와서 나를 보아야 한다.’ 하므로 남호정이 고두(叩頭)하고 물러났습니다.
송 시랑의 부(府)에 이르러 자문을 바치니 송 시랑이 읽어본 뒤에 신을 불러 상(床) 앞에 세우고 좌우를 물리치고는 남호정을 상 위로 불러 귀에다 대고 말하기를 ‘심 유격이 주관하는 일이 비록 석 상서(石尙書)의 뜻이라고는 하지만 나는 실로 잘 알지 못한다. 전에 광녕(廣寧)에 있을 때 내가 심 유격에게 말하기를 「만약 저 왜적들이 모든 조선 지방을 양여(讓與)하고 본국으로 돌아간다면 강화(講和)해도 무방하다. 그러나 혹시라도 조선의 1현(縣), 1보(步)의 땅이라도 점거하고 있으면 강화는 불가하다. 」 하였는데, 심유경이 재삼 왕복하면서 마침내 대동강(大同江)으로 경계를 삼았고 점차 양보할 것이라 하니, 나는 그의 의사(意思)는 믿지 않는다. 또 평양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것을 내가 우선 머물러 두어 가지 못하게 하였다. 이제 왜노들의 반시(反詩)와 묘를 발굴한 일로 보건대 경악함을 금치 못하겠다. 너는 배신(陪臣)에게 이렇게 말하여 국왕에게 회보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신은 남호정으로 하여금 고하게 하기를 ‘겨울이 다 되어가도록 대병(大兵)은 이르지 않고, 심의 강화는 이처럼 기일을 끌고 있어 우리 백성들이 다 실망하고 있다. 북쪽의 왜적은 분명히 범순(犯順)한 글을 보냈고 동쪽의 왜적은 또 선왕의 묘를 파헤쳐 우리 임금께서 밤낮으로 울부짖으며 장차 몸소 와서 구원을 청하고자 하였지만 우리 나라의 군신(群臣)들이 읍간(泣諫)하여 중지시키고 즉시 신(臣)을 차출하여 이곳에 보냈다. 듣건대 서변(西邊)의 병마는 아직 이르지 않는 자가 있다고 하니, 만약 일제히 다 도착하기를 기다리다가는 반드시 시기를 잃게 되어 후회하여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만약 강화를 해도 될 것 같았으면 우리 나라에서 이미 했지 어찌 천위(天威)를 기다렸겠느냐. 왜노들의 간사함이 이미 다 탄로가 났으니 바라건대 노야께서는 위로는 황상(皇上)의 뜻을 본받고 아래로는 우리 임금의 간절함을 불쌍히 여겨 속히 병마(兵馬)를 내어 하늘이 준 때에 미치게 하라.’ 하였습니다.
시랑이 또 귀에다 대고 답하기를 ‘16일에 이 제독(李提督)이 군사를 이끌고 떠날 것이다. 심 유격의 술책을 이미 나는 믿지 않고 일찍 조치하였다. 찬획(贊畫) 유 원외(劉員外), 원 주사(袁主事) 역시 이 제독과 함께 먼저 떠난다. 배신은 국왕에게 회보(回報)하여 송례(送禮)할 필요도 없고 역시 친히 나와서 기다리지 말게 하라. 다만 미시(米柴)를 준비하여 공급하면 된다. 나 역시 머지 않아 출발하여 떠날 것이다. 그러니 국왕에게 아뢰어 회면(會面)하지 말게 하고, 연도(沿道)의 역참(驛站)과 주현(州縣)에서도 역시 먹을 것들을 준비해 지공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모든 먹을 것은 우리 스스로가 갖추어 가지고 가니 미시(米柴)만 지공하는 것이 좋겠다. 만약 내 말대로 하면 내가 기뻐하겠지만 내 말대로 하지 않으면 내가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 그대 나라가 다 망하게 되어 어려운 상황인데 어찌 지공을 감당하겠는가. 다만 심가(沈家)의 사람을 십분 막아서 평양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이 옳다. 전일에 장 도사(張都司)가 갈 때에 이미 이런 뜻을 유시(諭示)하여 패문(牌文)을 가지고 갔다. 또 그대 나라로 하여금 각처의 통병관(通兵官) 성명 및 병마의 숫자를 적어서 나에게 보고하게 하라. 내가 마땅히 각기 한 장수에게 각 1패(牌)씩을 주어 내 절제(節制)를 받게 하여 중국 장관(將官)과 더불어 한가지로 일을 행하게 하면 우리 중국 군사들이 그대 나라 장졸(將卒)들을 모욕하지 못할 것이다. 배신으로 하여금 국왕에게 치보(馳報)하여 장관의 성명과 병마의 숫자를 하루 속히 보고하게 하라.’ 하므로, 남호정으로 하여금 고하게 하기를 ‘전일 장 도사가 돌아갈 때 이미 장관의 성명과 숫자를 써 보냈다.’ 하니, 시랑이 말하기를 ‘내 뜻에 맞지 않았고, 장 도사가 이미 가지고 갔으니 속히 다시 써서 보내라.’ 하였습니다.
남호정으로 하여금 고하게 하기를 ‘노야께서 16일에 군사를 출발시킨다는 말을 들으니 감격함을 이기지 못하겠다. 다만 교전의 시기와 노야께서 길을 떠날 날짜를 알 수가 없다. 국왕께서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치켜들고 기다리시기를 마치 큰 가뭄에 비를 바라듯 할 뿐만이 아니다. 배신은 확실한 기일을 알아 국왕께 보고하고자 한다.’ 하니, 시랑이 답하기를 ‘남병(南兵)을 전진시켜 의주(義州)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내가 패문(牌文)을 내어 안주(安州) 등지로 곧바로 보내 이 제독(李提督)과 함께 진격하도록 하겠다. 교전은 정월 보름 전에 하고, 왕경(王京)을 수복하는 것은 2월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뒤에 오는 병마를 재촉하여 다 출발시킨 다음에 길을 떠날 것인데 역시 이 달을 넘기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전진하여 정주(定州)에 주둔해서 이 제독으로 하여금 안주(安州)로 진둔(進屯)하게 하고 세 길로 군사를 진격시켜 교전할 것이다. 평양을 수복하면 나는 국왕에게 평양에 진주(進駐)하기를 청할 것이고, 왕경을 수복하면 국왕에게 왕경으로 진주할 것을 청할 것이며, 왜적을 다 섬멸하고 한치의 땅까지 다 수복한 다음에는 마땅히 성상(聖上)에게 복명(復命)할 것이다. 나는 천토(天討)를 받들어 행할 뿐이니 공(功)을 이루는 날에 국왕을 만나서 위로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이 제독 역시 하나의 맹장(孟將)이다. 심 유격이 주관하는 일을 어찌 믿겠는가. 배신은 즉시 사람을 차출하여 이런 뜻을 치보(馳報)하여 국왕의 급한 마음을 위로하고 이틀 더 머물면서 제독이 떠난 것을 본 뒤에 돌아가 보고하는 것이 어떤가?’ 하였습니다.
신은 작별하고 나와 다시 제독의 아문(衙門)에 도착했습니다. 제독은 남호정을 불러 앞에 앉히고 잠시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제독이 좌우를 돌아다보면서 한 번 큰 소리를 지르자 좌우가 모두 피해 흩어졌습니다. 제독이 계단을 내려와 남호정의 앞에 와 옷이 닿을 정도에 서서 가만히 심 유격의 일을 말하고, 또 말하기를 ‘내가 군사를 이끌고 사잇길로 가 먼저 왕경의 적을 치고자 하는데 가부를 모르겠다.’ 하므로, 남호정이 답하기를 ‘평양은 의주에서 멀지 않고 연도(沿道)의 추량(芻糧)이 참역(站驛)에 있는데 만일 노야께서 먼저 왕경으로 가고 평양의 적이 때를 틈타 서쪽으로 내려간다면 만전(萬全)의 계책이 아닐 듯 싶다. 또 사잇길에도 추량이 있기는 하지만 아직 많이 비축하지 못했으니, 먼저 평양을 치고 위엄을 갖추어 전진하는 것만 못하다. 그렇게 되면 비단 왜적이 바람에 풀이 쓸리듯 무너지게 될 뿐만 아니라 추량의 운반 역시 매우 편리할 것이다. 그러나 군사의 일을 멀리서 헤아리기 어려우니 노야께서 우리 나라에 도착하여 상의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니, 제독이 말하기를 ‘당신 말이 이치에 맞다. 모름지기 지식 있는 총병관(摠兵官)들로 하여금 나를 인도하여 가게 하라.’ 하였습니다.
남호정이 잇따라 말하기를 ‘노야가 확실히 16일에 길을 떠나면 언제 강을 건너게 되며, 언제 교전할 것인가?’ 하니, 답하기를 ‘내가 강연대(江沿臺)에 도착하여 2일을 머물면서 군사를 점검하고, 강을 건너 국왕과 회의(會議)하고는 즉시 진격하여 왜를 정벌하겠다. 대략 25∼26일에 강을 건너고 정월 초순에는 교전할 것이니, 정월 안에는 평양을 수복하고, 왕경 수복은 2월을 벗어나지 않고, 제도(諸道) 수복은 3월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서쪽 정벌을 하고 온 지가 오래지 않았는데 황상(皇上)께서 즉시 나를 차출하여 동정(東征)하게 하시면서 왜노들을 소탕하여 조선을 수복(收復)하라고 분명하게 명지(明旨)를 내렸으니 이는 나의 책임이므로 다른 일은 관계할 게 없다.’ 하였습니다. 대체로 송야(宋爺)와 이야(李爺)는 신들이 온 것을 기쁘고 다행으로 여기는 기색이 있었으며 말이 진지하여 마음속에서 우러난 것 같았습니다. 이번 군사가 출동하는 기일은 비록 조금 늦어질 듯하기는 하나 반드시 전날 뒤로 미루던 것과는 같지 않을 것입니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33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588면
- 【분류】외교-명(明) /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吏曹判書李山甫馳啓曰: "臣於初八日拜辭後, 渡中江, 唐卒閉關牢拒曰: ‘凡人毋得擅過。 乃禁約也。 佟參將以迎候宋侍郞事, 發行已數日, 九連城只有中軍。 如必欲過, 當令譯官, 偕我往稟。’ 臣使譯官南好正偕往。 往復之際, 日已西落, 不得已留宿狄江西村。 初九日鷄嗚發行, 遇張都司於鳳鳳城南郊, 都司曰: ‘予以檢察芻糧事, 向順安。 大軍則十三間定發, 不須往也。’ 臣辭以奉咨不可停之意。 行到湯站, 聞錢遊擊 世禛, 率先鋒一千入站, 臣過城外, 見散行, 不過三百矣。 過站一息許, 宿西孤山民家, 適有擺撥二名。 南好正問曰: ‘錢遊擊軍一千云, 而今目見三百, 何耶?’ 答曰: ‘不減一名, 以五十作一隊, 乃二十隊也。 必皆入城內, 故過城時, 未及見也’ 云。 此後路上, 臣所目見, 而心數之者, 南方砲手步兵千餘, 所着外服色, 多有不同, 防牌車、火車各三十餘輛, 軍器軍糧輸載者, 連續於路。 投宿連山村舍時, 南好正過一南來唐人曰: ‘砲手五千云, 而道上所見, 僅千名, 何耶?’ 答曰: ‘豈其然乎? 以五千人, 分作五隊, 而眼象五方之色, 頭巾皆白者, 象西方肅殺之色’ 云。 十二日, 行過佟參將於甛水站, 佟言 ‘李提督如松, 初八日己到遼陽, 犒軍後, 十三日間定發行, 請兵之行, 不須煩也。’ 臣亦辭以奉咨。 十三日午後, 入遼陽, 詣都司, 則方犒東征軍卒, 以煩擾免見。 鎭撫柱聯芳曰: "凡咨, 當呈都司轉報, 乃格例也。 今何直咨侍郞乎?’ 令南好正答曰: ‘聞宋爺之行, 定發於初八日, 意謂必遇諸中路, 不可轉報, 故用權宜直咨矣, 豈料今入遼陽乎?’ 柱亦曰: ‘然矣。’ 十四日曉, 當先往宋府, 而聞晩坐, 先赴李提督府。 提督出立簷下受禮, 暫見呈文, 曰: ‘俺處, 亦當爲咨, 而今何獨咨於宋爺耶?’ 令好正答曰: ‘俺等, 於初八日, 離發義州, 其時專未聞老爺之奇。 設或聞知, 敢不奉咨? 老爺專位也?’ 李頷之曰: ‘然矣。’ 因令拿進宋處咨文, 亦暫見問曰: ‘今來何幹?’ 令好正答曰: ‘小邦垂亡, 不能自振, 日望天兵, 尙無的期, 冬節垂盡, 只隔旬望。 開春尙暖, 倭又肆毒, 則用兵百倍, 亦難容易爲功, 以此奉咨宋爺, 哀情速進兵馬爾。 且前日沈遊擊講和, 大同江限界之說, 以致群情解體, 咸鏡道所得倭書, 亦有不可忍道之說。 東邊倭賊, 又掘破先墓, 寡君日夜號泣, 備咨告急於宋爺矣。’ 李曰: ‘沈事, 不須信也。 我與宋爺, 已爲議完。 只恐沈人過江, 又到平壤, 爾國可謹愼防閑, 不使經過咸鏡賊陣。 東倭掘塚極駭。 我亦知春間用兵之難, 故定於十六日, 領兵前去矣。 但所領兵馬十萬, 而見來者四萬餘。 待彼齊到, 恐失天時, 四萬足以平倭乎? 汝國兵馬幾何?’ 令好正答曰: ‘蒙爺分付發程之日, 不勝感激, 小邦君臣, 始有再生之道矣。 小邦兵馬在順安及近地, 大槪二萬矣。’ 語未終, 李忙出門曰: ‘往見察院, 還可作話。’ 因帶好正而去。 路上, 問道路糧草等事, 隨問隨答。 李又曰: ‘沈事, 一點不信。 我初八日到此, 欲回家祭祖, 而未暇焉。 急速進兵, 期復汝國矣。 自我父親, 與爾國相厚, 我非他將官之比。 當盡力救援, 汝國知之乎? 過江之日, 須選會說通事, 及十分有知識摠兵幾員隨之。 且汝呈咨宋爺之後, 陪臣更來見我。’ 好正叩頭而退。 到宋府呈咨。 宋覽訖, 招臣立床前, 辟左右, 招好正上床, 附耳語曰: ‘沈遊擊所幹, 雖云石尙書之意, 我實未曉。 前在廣寧, 我謂沈曰: 「若彼倭奴盡讓朝鮮地方, 走回本國, 則講和不妨。 若或據朝鮮一縣一步之地, 則不可和矣。」 云, 而沈再三往還, 竟以大同江爲界, 漸次讓之云, 我不信他意思。 且欲回去平壤, 我姑留之, 不使去矣。 今見倭奴反詩與發墓之事, 不勝驚駭。 爾說與陪臣, 回報國王。’ 臣令好正告曰: ‘冬月垂盡, 大兵不至, 而沈之講和遷就若此, 小邦人民, 亦皆缺望。 北倭明有犯順之書, 東倭且發先王之墓, 寡君日夜號泣, 將欲自來請救, 而小邦群臣泣諫乃止, 卽差臣到此。 聽得西邊兵馬, 尙有未到者, 若待齊到, 則必失時幾, 後悔莫追。 如可講和, 則小邦早已爲之, 何待天威? 倭奴奸詐, 敗露已盡, 望老爺, 上體皇上之旨, 下憫寡君之懇, 速發兵馬, 以及天時。’ 侍郞又附耳答曰: ‘十六日, 李提督當領兵去矣。 沈家之術, 我已不信, 早爲處置矣。 贊畫劉員外袁主事, 亦偕李提督前去。 陪臣可報國王, 不要送禮, 亦不要親自出待。 只備米柴以供之。 我亦不遠, 當起程前去矣。 啓知國王, 不須會面, 沿途驛站州縣, 亦不許備辦供食等物。 凡喫食之物, 我自備齎而去, 只供米柴可也。 若依我言, 我當喜懽, 不依我言, 我將不悅。 汝國垂亡困苦之餘, 豈能堪支? 但是沈家之人, 十分防關, 不使入平壤可也。 前日張都司去時, 已諭此意, 行牌文而去矣。 且令爾國, 書各處統兵官姓名及兵馬之數, 以報于我。 我當各委一將, 各給一牌, 受我節制, 與天兵將官, 一樣行事, 則我天兵不敢侮汝將卒矣。 令陪臣馳報國王, 取將官姓名, 兵馬數目, 急速來報。’ 令好正告曰: ‘前日張都司之還, 已書將官名數送呈矣。’ 侍郞曰: ‘不合我意, 張都司亦已持, 須速更書以送。’ 令好正告曰: ‘蒙爺十六日發兵之敎, 不勝感激。 第未知交兵遲速, 起程日字也。 一國王, 日夜號泣, 翹首以待, 不啻大旱之望雲霓。 陪臣願得的期, 歸報國王。’ 侍郞答曰: ‘前進南兵, 俾屯義州, 我將發牌, 令直送安州等處, 與李提督同進。 若交兵, 當在正月望前, 而收復王京, 則期不出二月之內。 我則儧催後來兵馬, 盡發然後, 當啓程, 亦不出這月。 起身前進, 留駐定州, 使李提督, 進屯安州, 須用三道進兵交戰。 收復平壤, 則我當請國王進駐平壤, 收復王京, 則請國王進駐王京, 及其盡滅倭賊, 盡復尺寸之地, 然後當復聖上立命。 我則奉行天討而已, 功成之日, 面慰國王, 亦未晩也。 李提督亦一熊羆之將也。 沈之所幹, 豈容聽信? 陪臣可卽差人馳報這等意思, 以慰國王一日之心, 且留兩日, 目見提督發去, 然後歸報何如?’ 臣辭出, 還到提督衙門。 提督招好正進前跪, 暫開話。 提督左右顧, 厲聲一度, 左右奔避。 提督下階, 進立于好正前接衣, 潛說沈遊擊之事, 且曰: "我欲領兵從間道, 先攻王京之倭, 未知可否? 好正答曰: "平壤距義州不遠, 而沿途芻糧, 積在站驛, 如或老爺先赴王京, 而平壤之賊乘時西下, 則恐非萬全。 且間道雖有芻糧, 時未多備, 不如先勦平壤, 仗威前進。 則非但倭賊自當風靡, 而芻稂之運, 亦甚便矣。 然兵難遙度, 老爺到小邦, 商議如何?’ 提督曰: ‘爾說有理。 須以有知識摠兵等官, 導我而行。’ 好正仍曰: ‘老爺的於十六起身, 而未知何時過江, 何時交戰?’ 答曰: ‘我到江沿臺, 住兩日點兵, 過江會議國王, 卽當直進征倭。 約二十五六日渡江, 正月初間交戰, 收復平壤不出正月, 收復王京, 不出二月, 收復諸道不出三月矣。 我征西未久, 皇上卽差我東征, 顯有明旨, 勦盡倭奴, 收復朝鮮, 是我責任, 不管餘事矣’ 云。 大槪宋、李兩爺, 見臣之來, 皆有喜幸之色, 而辭意款懇, 似由中悃。 今此師期, 雖若稍緩, 必不如前日退托之歸矣。"
- 【태백산사고본】 16책 33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58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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