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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33권, 선조 25년 12월 8일 갑오 2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진주사 정곤수 등이 북경에서 돌아오자 인견하고 중국 조정의 상황 인식을 논의하다

진주사(陳奏使)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곤수(鄭崐壽), 서장관(書狀官) 직강(直講) 심우승(沈友勝)이 북경에서 돌아오니, 상이 편전(便殿)에서 인견하는데 동부승지(同副承旨) 심희수(沈喜壽)가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주(陳奏)한 일은 소원대로 되었는가?"

하니, 정곤수가 아뢰기를,

"신이 북경(北京)에 가보니 조정의 의논이 아직도 정해지지 않아 어떤 사람은 마땅히 국경에서 막아야 한다 하고, 어떤 사람은 두 오랑캐끼리 싸우는 것이니 구원할 필요가 없다고도 하였습니다. 당초에 허홍강(許弘剛)이 상본(上本)하여 구원해서는 안 된다는 뜻을 힘써 아뢰었는데, 지금은 석 상서(石尙書)가 정벌할 뜻을 세우고 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왜 구원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가?"

하니, 정곤수가 아뢰기를,

"허홍강이 ‘요동(遼東)에서 막기만 하면 되지 가서 구원할 필요까지는 없다.’고 하는 것은 대개 군사를 줄이고 비용을 줄이려는 뜻입니다."

하였다. 심우승이 아뢰기를,

"장동(張東)은 또 허홍강의 ‘구원해서는 안 된다.’는 논의를 그르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올 때에 장동을 만나 그 제본(題本)을 청하여 보고는, 장동이 우리 나라를 구원하려는 뜻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하고, 정곤수는 아뢰기를,

"신이 돌아올 때에 장동이 적의 형세를 자세히 묻고는 정벌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중국이 군사를 내어 구원할 것인가?"

하자, 정곤수가 아뢰기를,

"송 시랑(宋侍郞)이 요동에 있으면서 왜를 정벌하는 일을 전적으로 맡고 있습니다. 다만 양향(糧餉)이 갖추어지지 않은 이유도 있고 또 원근(遠近)의 병마가 일제히 도착한 다음에야 출발할 것입니다. 심 유격(沈遊擊)은 사실 석 상서가 보냈는데 적이 만약 강화를 청하면 강화를 허락하고 그렇지 않으면 군사를 진격하여 소탕하려 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이 왜적을 어렵게 여기고 있는가?"

하니, 정곤수가 아뢰기를,

"매우 어렵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조 총병(祖總兵)이 패하고 돌아온 후부터 더욱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군사는 얼마나 나올 것인가?"

하니, 아뢰기를,

"6만 명을 10만 명이라 표명하는데 교병(交兵)할 날은 이달 22일과 정월 3일이라 합니다."

하였다. 정곤수가 아뢰기를,

"섬라(暹羅)의 사신이 중국에 도착하여 상본(上本)하여 조선을 구원하기를 청하였는데 중국 조정에서 그 청을 준허(準許)하였으므로 내년 봄에 군사를 내어 일본을 정벌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본은 원 세조(元世祖)도 토벌하지 못하였는데 섬라가 어찌 해낼 수 있겠는가."

하자, 심우승이 아뢰기를,

"섬라가 비록 말은 쉽게 하였지만 어찌 토벌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에서는 왜적이 단지 우리 나라만 침범할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하니, 정곤수가 아뢰기를,

"중국에서는 매우 우려하고 있습니다. 석 상서(石尙書)는 자기가 가서 왜를 정벌하여 한 척의 조각배도 요해(遼海)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다고 청하였는데 황상(皇上)께서 그의 청을 준허(準許)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에서 우리 나라를 의심하지 않던가?"

하니, 정곤수가 아뢰기를,

"지금은 의심이 모두 풀렸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것은 매우 기쁜 일이다. 예로부터 망하지 않는 나라는 없지만, 한번 악명(惡名)을 들으면 만고에 씻기가 어렵다."

하였다. 심우승이 아뢰기를,

"장동은 천문(天文)을 아는데 신에게 이르기를 ‘그대 나라와 북경(北京)은 같은 분야(分野)인데 세성(歲星)이 지금 그 분야에 들어갔으니, 천시(天時)와 인사(人事)가 모두 회복될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고, 정곤수는 아뢰기를,

"석 상서가 한번은 신들을 자기 집으로 맞이하여 좌우를 물리치고 말을 했는데 그 태도가 진지하고 다정한 것이 마치 집안의 부자(父子)간 같았습니다. 그가 말하기를 ‘내가 마땅히 그대 나라를 회복하겠으니 돌아가거든 그대 국왕에게 모름지기 마음을 놓으라고 고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여송(李如松)은 명장인가?"

"이성량(李成梁)의 아들로 천하의 명장입니다. 영하(靈夏)를 정벌할 때에 그의 아버지 성량의 권한이 너무 중하여지자 성량을 불러서 북경에 머물게 하였습니다. 그가 성공하게 되자 영하후(靈夏侯)로 봉해져서 지위가 아버지 위에 있게 되고 천하 대총병(天下大總兵)이 되어 13총병이 모두 이여송의 명을 받고 있습니다."

하고, 심우승은 아뢰기를,

"심 유격의 강화(講和)하는 일을 신이 시랑(侍郞)에게 물었더니, 시랑이 갑자기 얼굴색이 변하면서 ‘말하지 말라. 군기(軍機)는 가벼이 누설할 수 없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에 만약 사람이 있다면 어찌 적과 강화를 해도 끝내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하니, 심우승이 아뢰기를,

"설번(薛藩)의 제본(題本)에 ‘우리는 이 술책으로 저들을 우롱하고, 저들 역시 이 술책으로 우리를 우롱하고 있다.’ 하였으니 설번 역시 강화가 불가함을 알고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유동사(劉東賜)는 이미 죽였는가?"

하니, 정곤수가 아뢰기를,

"이여송이 하수(河水)를 끌어다가 그 성(城)에 대니, 유동사의 부하가 그의 목을 베어 항복하였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33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581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외교-동남아(東南亞) / 군사-전쟁(戰爭)

    ○陳奏使知中樞府事鄭崑壽、書狀官直講沈友勝, 回自北京。 上引見於便殿, 同副承旨沈喜壽入侍。 上曰: "陳奏得請耶?" 崑壽曰: "臣行到帝京, 則朝廷論議尙不定, 或以爲當禦於境上, 或以爲兩夷之鬪, 不必救。 當初許弘剛上本, 力陳不可救之意, 今則石尙書銳意征勦矣。" 上曰: "何以謂不可救耶?" 崐壽曰: "弘剛則以爲, 禦於遼東, 而不當往救云, 蓋省兵省費之意也。" 友勝曰: ‘張東又以許弘剛不可救之言爲非。’ 臣來時, 見張東, 請見其題本, 知有欲救我國之意也。" 崐壽曰: "臣之回還時, 詳問賊勢, 而力言其可伐矣。" 上曰: "中國發兵來救耶?" 崐壽曰: "宋侍郞遼東, 專主征倭。 但糧餉不具, 且待遠近兵馬齊到, 然後可啓行也。 沈遊擊, 則石尙書實送之, 賊若請和, 則因而許和, 否則進兵勦滅云矣。" 上曰: "中國難倭賊耶?" 崐壽曰: "甚以爲難。 從祖摠兵敗歸者, 益懼矣。" 上曰: "兵出幾何?" "以六萬, 聲言十萬, 而交兵之日, 則今月念二正月初三云矣。" 崐壽曰: "暹羅使臣到上國, 上本, 請救朝鮮。 天朝準其請, 故明春當發兵, 往征日本云矣。" 上曰: "日本, 世祖所不能討, 暹羅何能爲?" 友勝曰: "暹羅雖易言之, 豈能討乎?" 上曰: "中原謂, 倭賊只侵我國而已耶?" 崐壽曰: "中原甚憂之。 石尙書請自往征倭, 期使片, 不入於遼海, 皇上不準其請矣。" 上曰: "中原不疑我國耶?" 崐壽曰: "今則洞釋矣。" 上曰: "此甚可喜。 自古無不亡其國, 一得惡名, 則萬古難雪矣。" 友勝曰: "張東解天文, 謂臣曰: ‘爾國與北京同一分野, 而歲星方入分野, 天時人事, 皆可恢復云矣。’" 崐壽曰: "石尙書嘗邀臣等其第, 辟古右, 言語懇眷, 如家人父子。 言俺當恢復爾國, 歸告爾國王, 須放心云矣。" 上曰: "李如松名將乎?" 崐壽曰: "李成梁之子, 天下名將也。 征靈夏時, 惡其父成梁權太重, 召成梁北京。 及成功, 封爲靈夏侯, 位在厥父上, 爲天下大摠兵, 十三摠兵, 皆聽命於如松云。" 友勝曰: "沈遊擊講和之事, 臣問諸侍郞, 則侍郞輒變色曰: ‘莫說也。 軍機不可輕洩’ 云矣。" 上曰: "天朝若有人, 則豈不知與賊講和, 而終不可保乎?" 友勝曰: "薛藩題本, 言 ‘我以此術愚彼, 彼亦以此愚我’ 云云。 亦知其不可也。" 上曰: "劉東賜已就誅耶?" 崑壽曰: "如松引河水, 灌其城, 東賜部下人, 斷其首以降矣。"


    • 【태백산사고본】 16책 33권 6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581면
    • 【분류】
      외교-명(明) / 외교-왜(倭) / 외교-동남아(東南亞) / 군사-전쟁(戰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