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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33권, 선조 25년 12월 5일 신묘 4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경상우도 관찰사 김성일이 경상도 지역의 전투 상황을 보고한 장계

경상우도 관찰사(慶尙右道觀察使) 김성일(金誠一)이 치계(馳啓)하였다.

"지난 10월 5일에 적이 1만 명을 셋으로 나누어 곧바로 진주(晉州)를 침범하여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 유숭인(柳崇仁), 사천 현감(泗川縣監) 정득열(鄭得悅), 배량 권관(背梁權管) 주대청(朱大淸)이 출전하여 전사하고, 진주 목사(晉州牧使) 김시민(金時敏), 판관(判官) 성수경(成守慶), 곤양 군수(昆陽郡守) 이광악(李光岳)은 성을 지킬 계책을 세우고 제장(諸將)과 함께 각 문(門)을 나누어 지켰습니다. 7일에 왜적은 대나무를 베어 방패로 삼아 줄지어 진을 만들고 사이사이에 목판(木版)을 끼워 점차로 진격해 와 크게 소리치며 포를 쏘았습니다. 신시(申時)에 잠깐 물러갔다가 초경(初更)에 또 진격해 왔으며, 삼경에 다시 물러갔습니다.

이보다 앞서 신은 진주가 위급하다는 말을 듣고 삼가 의병장(三嘉義兵將) 윤탁(尹鐸), 의령 가장(宜寧假將) 곽재우(郭再祐), 초계 가장(草溪假將) 정언충(鄭彦忠) 등으로 하여금 동쪽으로부터 들어가고, 합천 가장(陜川假將) 김준민(金俊民)은 북으로부터 들어가고, 전라 의병(全羅義兵) 최경회(崔慶會)는 서쪽으로부터 들어가고, 고성 가장(固城假將) 조응도(趙凝道)와 복병장(伏兵將) 정유경(鄭惟敬)은 남쪽으로부터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윤탁은 2백여 명을 거느리고, 정언충은 1백여 명을 거느리고 강변에서 모였는데, 마현(馬峴)에서 적과 부딪쳐 오랫동안 크게 싸우다 군사가 궤멸되어 돌아왔습니다. 곽재우는 선봉장 심대승(沈大昇)으로 하여금 북산(北山)에 올라가 햇불을 들고 나팔을 불며 방포(放砲)하면서 성중에다 대고 크게 외치게 하기를 ‘전라도의 원병(援兵) 1만여 명과 의령(意寧)의 홍의 장군(紅衣將軍)이 합세하여 내일 아침에 와서 적을 죽이기로 하였다.’ 하니, 성안에 있는 사람들 역시 크게 외치면서 서로 호응하였습니다. 김준민은 결사대 80여 명을 거느리고 단계현(丹溪縣)에 이르니 적들이 바야흐로 관사(官舍)를 불사르고 있었습니다. 김준민이 곧바로 돌격하여 20여 리를 뒤쫓으니 적은 흩어져 퇴각했습니다. 조응도남강(南江) 10리 밖에 이르러 멀리서 형세를 이루고 있으면서 영적(零賊)을 나누어 소탕하였습니다.

10일 밤중에 적은 동·북·서 세 문으로 나누어 침범해 왔는데 혹은 긴 사다리를 세우기도 하였고, 혹은 성밑을 파기도 하고, 혹은 장작을 쌓아 불을 놓기도 하여 연기가 하늘을 가렸습니다. 김시민은 자신이 직접 독전(督戰)하였는데 철환(鐵丸)이 김시민의 이마를 맞추니 성안이 소란해졌습니다. 적이 북문을 5∼6척이나 뚫고 그곳으로부터 들어오려고 할 때 이광악(李光岳)이 다시 제장을 독려하여 화살을 쏘고 돌을 던졌는데 적은 개미처럼 붙어 올라오므로 불을 밝혀 끓는 물을 쏟고 혹은 진천뢰(震天雷)를 던지기도 하여 죽은 자가 그 숫자를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비단옷을 입은 한 왜적이 양견마(兩牽馬)를 타고 군사를 지휘하여 돌진해 오자 이광악이 화살로 쏘아 죽였습니다. 적들이 모두 통곡하며 시체를 메고 돌아가니 성안은 이로 인해 사기가 충천하였습니다. 최덕량(崔德良)은 서문을 방수(防守)하고 있었는데 적 수천 명이 뜻밖에 충돌해 오는 바람에 성가퀴[陴]를 지키던 수천 명이 일시에 무너졌습니다. 최덕량이 그의 관하(管下)를 거느리고 죽기를 한정하고 힘껏 싸워 물리치니 적들은 성밖에 있는 1천여 채의 집을 불사르고 신시(申時)에 포위를 풀고 물러나 함양(咸陽) 등의 길로 향하여 갔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33권 5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581면
  •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慶尙右道觀察使金誠一馳啓曰: "去十月初五日, 賊以兵萬餘, 分爲三起, 直犯晋州, 慶尙右兵使柳崇仁, 泗川縣監鄭得悅, 背梁權管朱大淸出戰而死, 晋州牧使金時敏, 判官成守慶, 與昆陽郡守李光岳, 爲守城之計, 與諸將分守各門。 初七日, 賊斫竹爲牌, 排列作陣, 間以木板, 漸次進迫, 大呼放砲。 申時少退, 初更又進, 至三更乃退。 先是臣聞晋州危急, 令三嘉義兵將尹鐸, 宜寧假將郭再祐, 草溪假將鄭彦忠等, 由東而入, 陜川假將金俊民, 由北而入, 全羅義兵崔慶會, 由西而入, 固城假將趙凝道, 伏兵將鄭惟敬, 由南而入。 至是尹鐸領二百餘名, 鄭彦忠領百餘名, 會于江邊, 遇賊於馬峴, 大戰良久, 軍潰而歸。 郭再祐令先鋒將沈大昇, 登北山擧火, 吹角放砲, 鼓譟大呼城中曰: ‘全羅援兵萬餘與宜寧紅衣將軍合勢, 明朝來殺賊徒。’ 城中之人, 亦大呼相應。 金俊民領敢死士八十餘人, 至丹溪縣, 賊方焚燒官舍。 俊民直突急(聲)〔擊〕 , 追逐二十餘里, 賊乃奔退。 趙凝道到南江十里外, 遙爲形勢, 分勦零賊。 初十日夜半, 賊分犯於東北西三門, 或建長梯, 或鑿城底, 或積柴焚之, 烟焰漲天。 金時敏親自督戰, 鐵丸正中時敏額上, 城中擾亂。 賊破鑿北門五六尺, 將由而入, 李光岳更督諸將, 射矢投石, 賊蟻附而登之, 以火燭之, 爚湯注之, 或投震天雷, 死者不紀其數。 有一賊, 乘兩牽馬, 着錦衣, 麾兵突進, 光岳一箭殪之。 賊皆痛哭, 羿屍而去, 城中爲之增氣。 崔德良防守西門, 賊數千不意衝突, 守陴者數千, 一時潰散。 德良率其管下, 殊死力戰以却之。 賊縱火焚城外千餘家, 申時解圍退, 向咸陽等路。"


  • 【태백산사고본】 16책 33권 5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581면
  •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