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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31권, 선조 25년 10월 19일 을사 5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경성 판관 이홍업이 가지고 온 적에게 잡힌 왕자 및 적장의 편지

경성 판관(鏡城判官) 이홍업(李弘業)이 오랫동안 적에게 잡혀 있다가 북병사(北兵使) 한극함(韓克諴), 남병사(南兵使) 이영(李瑛), 임해군(臨海君) 이진(李珒), 순화군(順和君) 이보(李𤣰), 상락 부원군(上洛府院君) 김귀영(金貴榮), 장계 부원군(長溪府院君) 황정욱(黃廷彧), 전 호군(護軍) 황혁(黃赫)의 서장과 적장 청정(淸正)의 편지를 가지고 적중으로부터 성천(成川)에 도착하였다. 동조(東朝)의 신하들이 사람들이 놀랄까 두려워 내버려 두고 묻지 않았는데, 대간이 이를 논하여 행재소로 압송해 왔다. 흥업이 아뢰었다.

"평조의(平調義)의 말을 듣고서 나왔는데 평조의가 ‘조선이 땅을 떼어 강화(講和)하면 왕자도 되돌려 보내고 군사도 파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극함과 영 등의 서장은 다음과 같다.

【"일본에서 차정(差定)되어 나온 장수 중 한 사람인 청정(淸正)이라는 장수가 이번에 신들을 불러 ‘일본이 조선과는 오랫동안 인국(隣國)의 수호를 닦아왔으므로 당초부터 다투려는 마음은 없었다. 그런데 대마 도주(對馬島主) 종의조(宗義調)가 거짓말을 지어내어 두 나라의 서계(書契)에 막히는 것이 많아졌고 피차의 사이를 이간하기까지에 이르렀으므로 이미 죄를 받아 복주(伏誅)되었다. 당초 우리 나라의 군사가 온 것은 대명(大明)을 바로 침범코자 하여 귀국의 길을 잠깐 빌리고 또 선도(先導)가 되어 주기를 청하여 군행(軍行)이 편하게 하려 함이었다. 그런데 변방을 지키는 신하들이 이런 뜻을 알지 못하고 부산 등지에서 먼저 무기를 썼기 때문에 난리가 벌어지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일본은 원래 살상을 즐기는 마음이 없어 지나는 성읍(城邑)에서 한번도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았다. 관방(關防)을 파수하던 사람 중 현재 사로잡힌 자는 모두 완전하게 보호하고 있고 임해·순화 두 왕자도 모두 예로써 접대하고 있다. 이제 듣건대, 대왕께서 서쪽 지방에 계시어 다시 통신이 되지 않고 있다 하는데 이는 의심스러운 생각을 가지고 있음에 불과하다. 관백(關白)이 이국(異國)에 대하여 막아 싸우려는 나라는 쳐서 멸망시키고 강화하려는 나라와는 굳게 우호를 맺고 있다. 귀국의 군현(郡縣)은 거의 일본의 소유가 되었으나 대왕이 다시 인국(隣國)과의 맹약을 맺으려 한다면 그중 한두 도(道)를 귀국에 돌려줄 것은 물론 전처럼 신의를 지킬 것이다. 이제 이런 내용을 갖추어 대왕께 진달하도록 하라. 평안도에서 사신을 보내어 답장을 보내되 좋은 뜻으로 허락해 온다면 곧바로 관백에게 아뢰어 좋은 방향으로 처리하겠다.’ 하였습니다. 신들이 두 왕자와 배행한 대신들을 모시고 함께 안변(安邊)에 머무르면서 그들의 말을 대략 갖추어 알립니다."】

진(珒)보(𤣰)·귀영·정욱· 등의 서장은 다음과 같다.

【"혁 등이 지난 7월 24일 회령부(會寧府)에서 사로잡혔으나 그 일의 곡절을 치계할 길이 없어 혼자 속만 태울 뿐이었습니다. 지금은 일행이 안변부에 압송되어 와 머무르고 있은 지 이미 한달이 되었습니다. 왕자와 대소 일행의 제관(諸官)들은 가까스로 목숨을 지탱하고 있는 형편이어서 다른 것은 아뢸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일본의 장군이 행재소(行在所) 등을 다그쳐 묻기에 ‘6월 초순부터 길이 막혀 알기가 어렵다. 지금 어느 곳에 계신지 알 수가 없는데 틀림없이 이미 요수(遼水)를 건넜을 것이다. 혹 어떤 이는 지난번에 이 도(道)에 계셨다고도 했다.’고 답했습니다. 그는 또 ‘일본은 별로 다른 뜻이 없다. 일국에 임금이 없을 수 없는데 앞서 대마도주의 일처리는 극히 사리에 어긋났고 신의를 크게 저버린 것으로 본국까지도 속이려 들었다. 당초 응당 형벌이 있어야 했다. 우리는 이런 유는 아니다. 단지 당신네 나라 국왕이 언지(言旨)를 차분히 지켜 2∼3도(道)로 경계를 삼아서 국경을 나누고 군사를 파할 것은 물론 양국의 강화를 논하고자 한다. 모름지기 재상 중에서 한 사람을 파견시켜 함께 편부에 대해 의논케 하라. 만일 의심스러워 믿기지 않는다면 직접 의논한 뒤에 다시 당신에 국왕에게 품의(稟議)케 하고 또 처자(妻子)를 볼모로 들이겠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그들 군주의 인신(印信)이 적힌 문서를 내보였으나 맹랑한 것으로 준신(準信)할 것이 못되었는데도 그는 매우 믿을 만한 것이라 하였습니다만 합당한 문서인지 모르겠습니다. 또 지금 계신 곳을 알지 못하니 사람을 시켜 찾아 아뢰도록 하라고 하였습니다. 핍박을 하기에 감히 어쩔 수 없이 이렇게 품의합니다. 또 일본의 장군이 지난번 치장(馳狀)하게 한 까닭에 영흥(永興)과 문천(文川) 두 고을에서 함께 서장을 만들어 그들에게 주었었습니다. 또 북병사(北兵使)와 남병사(南兵使) 등도 별도의 서장을 부송하게 하였다고 했습니다. 또 ‘일본과 우리 나라가 2백 년 동안 화친하여 정의가 두텁지만 일본의 관백은 그 사유를 일찍이 알지 못하였었는데 이번에 관백이 이런 기별을 듣게 되면 반드시 좋게 받아들일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 장군의 말로는 이상의 의제들을 하나하나 조목별로 의논하여 타결될 만한 것들을 보고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일본 장군의 서계 1통을 아울러 첨부하여 올리니 참고하소서."】

적장 청정(淸正)의 글은 다음과 같다.

【"지난 7월 23일, 회령부에서 두 왕자와 관원들을 체포하여 지금은 안변부(安邊府)에 체류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지난 일들을 들어 보니 2백 년 이래 일본과 이웃하여 사이좋게 지냈다 하였는데, 일본 국왕은 알지 못했던 말입니다. 대마도 태수(對馬島太守)가 사사로이 이런 논의를 만들어 낸 것입니다. 또 듣건대 근세(近歲)에 혹 전산전(畠山殿)이니 세천전(細川殿)이니 일컫기도 하고 혹 우우무위(尤右武衛)라 일컫는 사람들은 모두 거짓으로 만들어 낸 것들입니다. 때문에 두 나라가 서로 화합하지 못하게 되었고 조선은 폐망하게 된 것입니다. 아, 이보다 더한 후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듣건대 국왕께서는 평안도에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왕자군(王子君)이 잡혔다는 소식이 전달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나 또한 전일 영흥 고을에서 글을 올렸었는데 이다지 전달되지 못하였단 말입니까? 그러나 국왕께서 그 도에 계신다 해도 전부터 우리의 군사가 이르면 우리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는 곳이 없었으니, 이른바 원려(遠慮)가 있는 자에게는 목전의 근심이 없다는 말이 지금의 상황을 두고 한 말일 것입니다. 다행히 지금 나에게 협화하여 따라 주신다면 내가 일본의 관백공에게 아뢰어 나라의 고을을 나누어 주어 부자가 함께 살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 처리하시겠습니까? 또 이 말이 믿기지 않거든 사신을 보내면 진위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뜻들을 주달할 따름입니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31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557면
  •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왕실-종친(宗親)

    鏡城判官李弘業, 久陷賊中, 持北兵使韓克諴、南兵使李瑛臨海君 順和君 𤣰上洛府院君 金貴榮長溪府院君 黃廷彧ㆍ前護軍黃赫書狀、賊將淸正書, 自賊中來到成川。 東朝諸臣, 恐爲驚駭, 置之莫問, 臺諫論之, 執送行在。 弘業云: "聞(平調義)〔平調義〕 之言而出來,’ 其言曰: ‘朝鮮若割地講和, 則王子可還, 兵亦罷去云」’" 克諴等書狀有云

    【日本差來一將, 號曰淸正, 今招臣等而言曰: "日本之與朝鮮, 久修隣好, 本無爭競之心。 惟是對馬島主宗義調做成詐說, 至於二國書契中, 多擁遏以間彼此, 故已伏其罪矣。 當初我軍之來, 只欲直犯大明, 而假途貴國, 且請先引以便軍行矣。 守邊之臣, 未知此意, 如釜山等處, 先動干戈, 致有攻擊之亂。 然日本元無嗜殺之心, 所過城邑, 一不血刃, 關防把守之人, 見爲俘獲者, 一切保完。 臨海、順和二君, 竝皆接待以禮矣。 今聞大王在於西方, 而更不通信, 是不過有持疑之意也。 關白之於異國, 防戰者, 攻滅之, 講和者, 固結之。 貴國郡縣幾爲日本所有, 若大王更修隣盟, 則其中一二道, 可還貴國, 而信義如前。 今具此意, 以達大王。 自平安道遣使復書, 許以好意, 則便當申於關白, 從長區處云云。" 臣等陪二王子, 與陪行大臣, 俱在安邊, 略具其所言以聞。】

    、臣𤣰貴榮廷彧等書狀有云:

    【赫等, 已於七月卄四日, 被擄於會寧府, 其事之曲折, 無因馳啓, 只自煎悶而已。 今者, 一行押到于安邊府, 爲留已至一朔。 王子及大小一行諸官, 僅支縷命, 無他可道。 日木將軍迫問行在等, 答以: "自六月之初, 路塞難達, 苦未聞。 今御某土, 必意其已渡遼水。" 云。 或言: "尙御此道。" 又曰: "日本別無他意。 一國之內, 不可無主, 前者馬島主處事極乖, 妄多失信義, 至欺其本國。 當初應有罪罰。 我非此類也。 只欲安守其國王言旨, 以二三道爲界, 平分境土, 罷兵講兩國之和也。 須遣宰相中一人, 與之面議便否, 若疑其不信, 則面議後更稟, 其國王又爲納質其妻子。" 云。 且出視渠主有印文書, 贗浪不準, 亦以爲自信的好。’ 云, 等則未知合無, 又未審的御之土, 使人第爲尋遠云, 不得已見逼, 敢此陳稟。 且日本將軍前令馳狀, 故永興、文川兩邑, 皆已作書給之矣。 且北兵使、南兵使等, 亦令爲別狀附送云。 且日本與我國二百年和親, 情義雖重, 而日本關白未曾聞知其由, 今者關白若聞此奇, 則必爲收好事, 此將軍言說云, 右議一一詮課議報之可者云。 日本將軍書契一道, 竝爲附上參商事。】

    賊將淸正書有云:

    【去七月二十三日, 於會寧府捕住於兩王子及諸官員, 而今滯留于安邊府。 爰聞話, 朝鮮之往古又二百年來, 與日本爲隣好云, 日本國王未曾知之。 惟對馬太守私作此議。 又聽近歲或稱(島山殿) 〔畠山殿〕 細川殿, 或稱尤右武衛之類, 皆是贗生也。 故二國不相和合, 而朝鮮已廢亡矣。 嗚呼! 何侮加焉! 蓋國王聞在平安道。 王子君被寄信文, 雖未通音報, 我亦呈書前日自永興之邑, 亦如此未達乎? 縱然國王在其道, 頃來押到我軍, 則無處不歸掌握, 所謂有遠慮者, 必無近憂。 幸今付予降從, 則已達日本關白公, 分與於國邑, 而父子相共。 須, 今安在也。 若又不信此言, 試來使臣, 則可知其眞僞也。 此意旨宜奏達而已。】


    • 【태백산사고본】 15책 31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557면
    •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왕실-종친(宗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