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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29권, 선조 25년 8월 7일 갑오 2번째기사 1592년 명 만력(萬曆) 20년

김경로·안세희를 인견하고 동래 전투, 각도의 민심과 적의 동향 등을 논의하다

상이 김경로·안세희를 인견하였는데, 승지 신점, 가주서 강욱, 봉교 기자헌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들이 들은 바를 모두 진술하라."

하니, 경로가 아뢰기를,

"4월 14일에 적이 왔다는 급한 보고가 있었으나 모두 세견선(歲遣船)084) 일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15일 아침에 포(砲)를 쏜다는 급한 보고 때문에 처음으로 적인 줄 알았습니다. 부산 첨사(釜山僉使) 정발(鄭撥)은 밖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적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군사를 통솔하여 성으로 들어왔으나 아군이 과반수가 들어오기도 전에 적이 곧 성으로 올라왔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발은 죽었는가?"

하니, 경로가 아뢰기를,

"적이 종일 목을 매어 두었다가 저녁에 그만 죽였다고 합니다. 적이 또 동래(東萊)에 당도하자, 송상현(宋象賢)이 서문(西門) 밖에서 패하여 북문(北門)으로 들어갔는데, 적이 작은 대(臺)에 올라가서 무수히 포를 쏘아대므로 사람들은 감히 성을 지키지 못하였습니다. 적이 이내 성에 들어왔고 송상현고윤관(高允寬)은 모두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소신이 웅천(熊川)에 있을 때 적의 동태를 감시하던 자가 와서 ‘왜선(倭船) 4백 85척이 황산강(黃山江)으로 향하여 와서 김해(金海)를 함락하였다. 박진(朴晉)황산강에서 맞아 공격했더라면 적을 막을 수 있었을 텐데 복병(伏兵)을 배설하여 막지 않은 까닭에 철환(鐵丸)이 비처럼 쏟아져 성을 지키기 어려운 형세였고 박진도 성문을 나와서 도망갔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적이 더 왔는가?"

하니, 경로가 아뢰기를,

"처음에 4만 명이 왔는데 손인갑(孫仁甲) 등에게 죽은 자도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있는 선척은 얼마인가?"

하니, 경로가 아뢰기를,

"도로가 통하지 않은 까닭에 듣지를 못하였습니다. 다만 경상도의 적은 3천 명쯤 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곳의 민심은 어떤가?"

하니, 경로가 아뢰기를,

"전라도 사람들은 본디 왜의 이름을 들어왔기 때문에 심히 두려워하지는 않았으나 경상도 인민들은 왜적의 일을 듣지 못하였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두려워하였습니다. 고성(固城)에 침입하였을 때 동풍(東風)이 크게 일어나서 적을 토벌할 수 없게 되자 인민들이 겁을 집어먹고 물러났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감사의 계본을 보니 진주(晉州)를 우려하는 뜻이 있었다. 그대들이 온 뒤에 혹 성이 함락되지는 않았을까?"

하니, 경로가 아뢰기를,

"진주의 군사 6천 명이 성을 지키고 있는데, 3면(面)은 험한 지형을 웅거하고 있고 1면으로만 적을 받으니, 신이 보기에는 적이 함락시키지 못할 듯합니다."

하였다. 신점이 아뢰기를,

"고성·사천(泗川)은 성을 함락시키기가 쉬웠습니다."

하고, 경로는 아뢰기를,

"산척(山尺)085) 등을 매복시켰다가 쏘았기 때문에 적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상주(尙州)·성주(星州) 등의 지역에도 주둔한 적이 있는가?"

하니, 경로가 아뢰기를,

"머물러 있다고 합니다."

하고, 안세희는 아뢰기를,

"신의 장수가 소신을 시켜 공주(公州)에 당도하여 대가(大駕)가 향한 곳을 수소문하게 하였습니다. 신이 중도에서 한산 군수(韓山郡守) 나급(羅級)목천(木川)·청주(淸州) 등지의 군사 7백여 명을 합하여 모두 거느리고 7월 20일에 충주(忠州)에 당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충주의 적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세희가 아뢰기를,

"적의 수효는 적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옥천(沃川)·황간(黃澗) 등지에는 적이 없는가?"

하니, 세희가 아뢰기를,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헌(趙憲)의 군사는 얼마나 되는가?"

하니, 세희가 아뢰기를,

"처음 향교(鄕校)에서 군대를 발할 때에는 그 숫자가 1천 명이었고 지금은 2천 명 정도의 군사가 모였을 것이지만 그 군대는 부실(不實)합니다. 고경명(高敬命)의 군사가 가장 정예(精銳)로운데 경명은 전투에서 패하였다고 합니다. 또 조헌은 적의 수가 3백 30명일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전주(全州)에 당도하여 들으니 4백여 명이었다고 합니다. 나주 목사(羅州牧使) 이경록(李景祿)웅치(熊峙)에 결진(結陣)하였는데 다음날 이른 아침에 적이 크게 밀어닥치자 정담(鄭湛)이 힘을 다해 적을 토벌하다가 끝내 적에게 살해되었다고 합니다. 전주는 군사가 전부 들어가서 지키고 있고 감사(監司)도 만경대(萬景臺)에 주둔하고 있으므로 병세(兵勢)가 크게 떨친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안산(安山)·부평(富平) 등지에는 적이 없는가?"

하니, 경로가 아뢰기를,

"신이 안산 군수와 대좌했을 때 적의 선봉이 당도했다는 말을 듣고 곧 일어나 헤어졌습니다. 인천의 적은 유옥(兪沃)과 접전하였는데 인천 군사 42명이 패하여 죽자 인천 백성들이 서로 울면서 ‘수령(守令)이 실책(失策)하더니 지금 또 패배당하였다. 이 뜻을 속히 조정에 통보하여 태수(太守)를 차출하여 보내게 해야 한다.’ 하였다 합니다. 최원의 부대는 군심(軍心)이 장차 이산될 지경이었기 때문에 부득이 강화로 옮겼으나 기율이 해이해져서 용병(用兵)하기 어렵습니다. 양호(兩湖)086) 의 인심도 이산되었고 신이 거느리는 군사들도 진상미(進上米)에 대하여 ‘어느 곳에 바칠 것인가?’ 하면서 주상(主上)이 머무는 곳을 전연 몰랐습니다. 대가(大駕)가 남방으로 향한다면 진정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남방으로 향할 길이 있는가?"

하니, 경로가 아뢰기를,

"안주(安州)에서 배를 타고 광량(廣梁)에 상륙하고, 또 삼화(三和)에서 배를 타고 광암(廣巖)에 상륙하여 육로(陸路)로 아랑포(阿郞浦)에 당도하면 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농사는 어떠한가?"

하니, 경로가 아뢰기를,

"6월 사이에 크게 가물어 벼가 말라 죽었습니다."

하고, 세희는 아뢰기를,

"황해도의 농사는 약간 풍년이 들었습니다."

하고, 신점은 아뢰기를,

"적병은 집에 거처하면서 밥을 해먹고 아군은 들에서 노숙(露宿)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이때 급히 공격해야지 군사들이 피곤해져서 무너져버리면 다시는 해볼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떤 계책으로 적을 토벌할 것인가?"

하니, 경로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무사(武士)는 양육하였으나 장수의 임무를 맡길 만한 사람이 없으니, 매우 걱정스럽습니다. 복병(伏兵)으로 토벌해야지 대군을 움직여 토벌할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경로에게 이르기를,

"그대를 황해도 방어사로 삼을 것이니 최원의 군사는 4천 명을 나누어 황해도의 적을 토벌하라. 그대가 그 군사를 합쳐 토벌하면 반드시 앞뒤로 몰리게 될 것이니, 이를 이용하면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하니, 경로가 아뢰기를,

"책임을 감당하지 못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대는 불세(不世)의 대공(大功)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황해도의 적병을 먼저 토벌해야 되지 않겠는가?"

하니, 경로가 아뢰기를,

"상의 분부가 윤당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평양의 적이 궁한 도적이 되어 이곳으로 대들지 않겠는가?"

하니, 경로가 아뢰기를,

"황해도(黃海道)의 적을 토벌하면 형세가 반드시 외롭고 약해져서 감히 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세희에게 이르기를,

"그대를 영흥 부사(永興府使)로 삼을 것이니, 그대는 힘을 다하라. 또 그대는 영흥을 가본 일이 있는가?"

하니, 세희가 아뢰기를,

"가본 적이 있습니다. 요사이 듣건대, 북쪽의 왜적이 만령(蔓嶺)에서 패하였다고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은 각자 맡은 바를 생각하여 공업(功業)을 세우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29권 9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527면
  •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군사-특수군(特殊軍) / 농업-농작(農作) / 왕실-행행(行幸)

  • [註 084]
    세견선(歲遣船) : 대마 도주(對馬島主)에게 우리 나라 왕래를 허가해 준 무역선. 세종 때 대마도 정벌 후 삼포(三浦)를 개항(開港)하여 세견선은 50척, 특송선(特送船)은 2∼3척으로 정하여 왕래하게 하였다. 중종 5년 삼포 왜란 이후에는 세견선의 수를 반으로 감하고 제포(薺浦) 한 곳만 열어주었다.
  • [註 085]
    산척(山尺) : 산에서 사냥을 업으로 삼는 사람.
  • [註 086]
    양호(兩湖) : 충청도와 전라도임.

○上引見金敬老安世熙、承旨申點、假注書康昱、奉敎奇自獻入侍。 上曰: "汝等所聞, 悉陳之。" 敬老曰: "賊四月十四日有出來馳報, 而皆以爲歲遣船。 十五日朝馳報放炮, 故始知爲賊。 釜山僉使鄭撥出獵于外, 聞賊來, 統軍入城, 而我軍過半不入, 賊乃登城。" 上曰: "鄭撥死乎?" 敬老曰: "賊終日係頸, 而夕乃殺之云。 賊又到東萊, 宋象賢自西門外敗, 入北門, 賊登小臺, 放炮無數, 人不敢守城。 賊乃入城, 宋象賢高允寬皆見殺於賊。 小臣在熊川時, 覘望者來言: ‘船四百八十五隻向黃山江, 陷金海朴晋若邀擊於黃山江, 則可以禦賊, 而不設伏兵遮截, 故鐵丸雨下, 勢難守城, 朴晋亦出門而去。" 上曰: "賊加來乎?" 敬老曰: "初來四萬, 爲孫仁甲等所殺者, 不知其數。" 上曰: "今在船隻幾何?" 敬老曰: "道路不通, 故不得聞知。 但慶尙之賊, 幾三千云。" 上曰: "其處民心何如?" 敬老曰: "全羅之人素聞名, 故畏之不甚, 慶尙人民, 未嘗聞倭賊之事, 故畏之太甚。 固城入寇之時, 東風大起, 不得討賊, 人民恇㤼而退。" 上曰: "見監司啓本, 有憂慮晋州之意。 汝等來後, 無乃陷城乎?" 敬老曰: "晋州之軍六千守城, 而三面據險, 一面受敵, 以臣觀之, 賊似不得陷矣。" 申點曰: "固城泗川陷城爲易。" 敬老曰: "使山尺等設伏而射, 故賊不敢近。" 上曰: "尙州星州等官, 有留屯之賊乎?" 敬老曰: "留在云。" 安世熙曰: "臣之將帥, 使小臣到公州, 訪問大駕所向。 而臣中路見木川淸州等官合軍七百餘名, 韓山郡守羅級七月二十日領軍到忠州矣。" 上曰: "忠州賊幾何?" 世熙曰: "賊數小云。" 上曰: "沃川黃澗等地無賊乎?" 世熙曰: "無矣。" 上曰: "趙憲軍幾何?" 世熙曰: "初發軍於鄕校時, 其數一千, 今則必聚軍二千許, 而其軍不實。 高敬命軍最爲精銳, 而敬命戰敗云矣。 且趙憲以爲賊數三百三十, 而到全州聞之, 則四百餘名云。 羅州牧使李景祿結陣於熊峙, 而翌日早朝, 賊大來, 鄭湛以討賊爲事, 竟爲賊所殺云。 全州全羅兵專數入守, 監司亦留駐萬景臺, 兵勢大振云。" 上曰: "安山富平等地無賊乎?" 敬老曰: "臣與安山郡守對坐時, 聞賊鋒將到, 卽起而散, 仁川之賊, 與兪沃接戰, 仁川軍四十二名敗死, 仁川之民相泣語曰: ‘守令失策, 今又見敗。 此意速達于朝, 差送太守云。’ 崔遠軍將有離散之心, 故不得已移于江華, 而紀律解弛, 難以用兵。 兩湖人心, 亦爲離散, 而臣所領對以進上米, 則曰: ‘納之何處? 殊不知主上所駐之地。 大駕若向南方, 則可以鎭定矣。’" 上曰: "有向南之路乎?" 敬老曰: "乘舟于安州, 下陸於廣梁, 又乘舟於三和, 下陸于廣巖, 陸行而到阿郞浦矣。" 上曰: "農事何如?" 敬老曰: "六月間大旱, 禾穀枯死。" 世熙曰: "黃海農事稍登。" 申點曰: "賊廬居火食, 我軍露處。 當於此時急擊, 若師老而潰, 則無復可爲。" 上曰: "以何策討賊?" 敬老曰: "我國養育武士, 而無將可任, 極爲憫慮。 當設伏以討, 而不可擧大軍討之。" 上謂金敬老曰: "以汝爲黃海道防禦使, 分崔遠軍四千, 討黃海賊。 汝合其軍討之, 則賊必腹背受敵, 因此可大揵也。" 敬老曰: "恐不能堪任。" 上曰: "汝可立不世之功。 且先討黃海賊可乎。" 敬老曰: "上敎允當。" 上曰: "若然則平壤賊, 爲窮寇而來迫於此乎。" 敬老曰: "討黃海賊, 則勢必孤弱, 必不敢來。" 上謂世熙曰: "以汝爲永興府使, 汝其盡力。 且汝曾見永興乎?" 世熙曰: "曾往見之。 近聞北賊敗於蔓嶺云。" 上曰: "此言何可信乎? 汝等各思所任, 以立功業。"


  • 【태백산사고본】 14책 29권 9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527면
  • 【분류】
    외교-왜(倭) / 군사-전쟁(戰爭) / 군사-특수군(特殊軍) / 농업-농작(農作) / 왕실-행행(行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