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근수를 인견하고 유성룡의 군량 조달, 평양 전투, 중국군의 실정 등을 묻다
상이 행궁(行宮)의 동헌(東軒)에 나아가 예조 판서 윤근수를 인견하였다. 【승지 신점. 】 상이 이르기를,
"풍원(豊原)072) 이 군량과 말먹이를 준비하지도 않았는데 청병(請兵)하려는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신이 안주에서 유성룡을 만나 물었더니, 이미 군량을 마련하여 1만 명의 군사를 먹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1만 명 군사의 며칠 양식이나 되는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그것은 미처 자세히 묻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장수가 패하고는 도리어 우리 나라에 탓을 돌리니 국사가 불행하게 되었다."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군량과 배를 관리하는 관원 중에 한 사람도 전장(戰場)에 들어간 사람이 없고, 출동시킨 군대까지도 겁을 내어 전진하지 않았으니 중국 장수가 성내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출동시킨 군대란 절도사를 가리키는 것인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평양 전투에서 중국 장수는 우리 군대를 다섯 부대로 나누어 동시에 함께 진격하여 습격하도록 하였는데, 성 아래에 도착하자 4개 부대는 도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절도사가 속인 것인가? 판서가 한 말을 나는 이제 처음 들었다. 아군이 전진하지 않았으니 조 총병(祖總兵)이 성내는 것은 참으로 당연하다. 절도사는 그 책임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절도사는 죄를 줄 수 없을 듯하고 4개 부대의 영장(領將)은 죄를 주어야 합니다. 듣건대 중국 장수가 돌아올 적에 별장(別將) 김응함(金應緘)이라는 자가 먼저 나왔으므로 병사(兵使)가 우선 장벌(杖罰)을 보이었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감사(監司)와 병사는 어째서 빨리 보고하지 않았는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감사와 병사는 실상 자세히 알지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양성에서 화살을 쏜 자가 있었다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중국 장수가 ‘적병이 처음에는 목궁(木弓)으로 화살을 쏘았는데 화살의 힘이 세지 않았다. 그런데 흰 깃발을 휘두르며 오는 자가 있자 편전(片箭)·장전(長箭)으로 어지럽게 쏘아대었다. 이는 반드시 너희 나라 사람이 적병에게 투속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중국 장수가 또 ‘그날은 군사를 움직여서는 안 되는데 함부로 접전한 까닭에 패배하였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무슨 까닭인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그날은 큰비가 와서 말의 배에까지 물이 차 올랐습니다. 조 총병이 순안현(順安縣)에서 10리를 와서 회군(回軍)하려 할 적에 한 명의 군졸이 말을 가로막으며 억지로 싸우기를 청한 까닭에 전진하여 싸웠다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군사가 바로 오지 않고 가산(嘉山)에서 머물러 주둔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조 총병이 다시 전진하여 싸우려 하였는데 양 총병(楊總兵)이 소환(召還)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군사가 일단 압록강을 건너 가면, 혹 다시 안 오는 것은 아닌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우선 남병(南兵)을 기다려서 후일의 거사(擧事)를 계획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신점(申點)이 아뢰기를,
"남군(南軍)은 곧 포수(砲手)입니다. 해마다 1천 5백 명이 산해관(山海關)에 와서 방수(防戍)하는데, 소신이 올 때 들은 바로는 곧 해주위(海州衛)에 당도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고, 근수는 아뢰기를,
"김명원(金命元)은 중국 군사를 다시 청할 필요가 없다고 하고, 유성룡은 청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신점은 아뢰기를,
"소신은 우리 나라가 지금 보전되고 있는 것은 중국 군사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신이 북경(北京)에 있을 때 중국 사람이 와서 묻기를 ‘성절사(聖節使)가 들어오지 못했을 듯하다.’ 하였더니, 그 사람이 ‘방물(方物)을 아마 마련하지 못했을 듯하다.’ 하였더니, 그 사람이 ‘방물(方物)이 무슨 관계인가?’ 하였습니다. 가만히 그 뜻을 헤아려보니 ‘우리 나라가 적과 통모(通謀)하여 향도(向導)가 된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스럽게 여기는 듯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일 향도가 되었다면 삼도(三都)073) 가 적의 수중에 함락되었겠는가."
하니, 신점이 아뢰기를,
"중국 사람들은 3도를 적에게 주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신이 변란(變亂)이 일어났음을 듣던 날 가슴을 치면서 울부짖자, 중국 사람들이 묻기를 ‘해적(海賊)이 무슨 까닭으로 너희 나라를 침입하여 짓밟는가?’ 하기에, 신이 ‘적이 중국을 침범하려 하기에 우리 국왕이 의리(義理)를 내세워 거절한 까닭에 우리 나라에 화풀이하여 이지경에 이른 것이다.’ 하였습니다. 또 신이 영평부(永平府)에서 비에 막혀 있었는데, 건주위(建州衛)의 달자(㺚子)도 그곳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도독(都督)인 자가 와서 ‘삼(蔘) 캐는 호인(胡人)을 그대 나라의 변장(邊將)이 해마다 차단하고 죽이는데 그저 머리만 자르는 것이 아니고 가죽을 벗기기까지 한다 하니 이 무슨 일인가? 내가 처음에는 예부(禮部)에 보고하여 그대 나라에 대한 원한을 풀려 하였다.’ 하기에, 신이 ‘그대들이 만일 그대들의 땅에서 삼을 캤다면 우리 나라의 변장이 반드시 국경을 넘어 쫓아가서 체포하지 않았을 것이다. 호인이 삼을 캔다는 핑계하면서 몰래 국경을 넘어 들어오기 때문에 죽인 것이다. 그렇다면 잘못이 어느 쪽에 있는가?’ 하였습니다. 또 신이 산해관 주사(山海關主事)를 만났더니, 주사가 ‘그대 나라가 위급하다면서 요청하는 군사가 어찌 그리 적은가. 우리 군사가 정탐하려고 하면 핑계를 대고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또한 무슨 까닭인지 모르겠다. 만일 군량이 떨어진 것이 염려된다면 중국에서 당연히 스스로 실어갈 것이고 군사가 귀찮게 구는 것이 두렵다면 기율(紀律)을 매우 엄하고 분명히 할 것이다. 옛날에 당 태종(唐太宗)은 극서(極西)의 나라이면서 극동(極東)의 나라를 쳤으니 이기지 못한 것이 당연하지만, 지금 우리 나라는 그렇지 않다. 태조 황제는 수군(水軍)으로 천하를 평정하였으니 그대는 신중히 하라.’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중국 장수는 이런 말이 없었는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의 작은 진영(陣營)이 왜적에게 투항했다는 말에 대해 중국 장수에게 변명하였더니, 중국 장수가 ‘평양성에 있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은 반드시 그대 나라 사람으로서 적병에게 사로잡힌 사람일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다시 군사를 요청한다면 성공을 기필할 수 있겠는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공(功)의 성패는 미리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전일에는 적을 가볍게 보는 습관 때문에 패하였습니다. 신이 들으니 평양의 전투에서 중국 장수가 적을 쳐부순 뒤에 회식(會食)하려 한 까닭에 밥짓는 기구를 모두 전마(戰馬)에 싣고 행군하였는데, 패배하게 되자 모두 길에 버렸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양의 적병은 얼마나 되는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염탐인들은 모두 숫자가 적다고 하는데 중국 군사들은 수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혹 왜적이 지친 군사를 내어 약함을 보인 까닭에 염탐하는 자가 망령되이 숫자가 적다고 한 것은 아닌가? 그리고 중국 군사 가운데에 성에 올라갔다가 전사한 자가 몇 명이나 되는가?"
하니, 근수가 아뢰기를,
"성에 올라간 사람은 모두 정병(精兵)이었는데 점검하여 헤아려보니 3백 명을 잃었다 합니다. 사유(史儒)은 용력(勇力)이 남보다 뛰어나 일찍이 달적(㺚賊)과의 전투에서 많은 공을 세웠는데 불행히 죽었으니, 가슴이 아프다 하겠습니다. 또 마병(馬兵)을 많이 두는 것은 오직 양 총병의 분부에 달려 있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28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520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명(明) / 외교-야(野) / 군사-전쟁(戰爭) / 군사-병참(兵站)
○上御行宮東軒, 引見禮曹判書尹根壽 【承旨申點】 上曰: "豐原不備糧料, 而欲請兵何也?" 根壽曰: "臣於安州見柳成龍問之, 則已辦軍糧, 可餉萬兵云。" 上曰: "萬兵幾日糧乎?" 根壽曰: "此則未及詳問。" 上曰: "天將見敗, 反歸咎於我國, 國事不幸。" 根壽曰: "我國之管糧管船等官, 無一人入戰者, 至於發兵者, 亦退㤼不前, 天將之怒宜矣。" 上曰: "發兵云者, 指節度使乎?" 根壽曰: "平壤之役天將以我軍分爲五隊, 與之同時進勦, 而及至城下, 四隊不至云。" 上曰: "若然則節度使欺罔乎? 判書所言, 今始聞之。 我軍不爲前進, 祖總兵之怒固宜。 節度使不得辭其責矣。" 根壽曰: "節度使似不可罪, 而四隊領將可罪矣。 聞天將回來時, 有別將金應緘者爲先出來, 兵使姑示杖罰云。" 上曰: "監兵使何不馳報乎?" 根壽曰: "監司、兵使實未詳知。" 上曰: "平壤城中, 有發矢者, 是何故也?" 根壽曰: "賊初以木弓發矢, 矢力不緊。 有麾白旄來者, 以片箭長箭亂射, 必是汝國之人, 投入賊中者也, 天將又言, 厥日不可行師, 而妄爲接戰, 故致敗云。" 上曰: "何故耶?" 根壽曰: "厥日大雨, 水沒馬腹。 祖總兵自順安縣行到十里, 欲回軍之際, 有一卒遮馬强請, 故進戰云。" 上曰: "天兵不爲直來, 而留屯嘉山者何耶?" 根壽曰: "祖總兵更欲進戰, 而楊總兵召還故也。" 上曰: "天兵一渡鴨江, 則無乃不復來耶?" 根壽曰: "且待南兵, 以圖後擧。" 申點曰: "南兵乃炮手也。 每年一千五百, 來戍山海關, 而小臣來時聞之, 將到海州衛云。" 根壽曰: "金命元則言不須更請天兵, 柳成龍曰請之可也。" 點曰: "小臣以爲, 今日之所以得保, 亦莫非天兵之力也。 小臣在北京時, 天朝人來問曰: ‘聖節使入來乎?’ 臣曰: ‘當此板蕩, 許多貢物, 恐不能辦也。’ 其人曰: ‘方物何關。’ 微揣其意曰: ‘疑我國與賊通謀而向導也。’" 上曰: "若爲向導則三都豈陷於賊手耶?" 點曰: "天朝人謂以三都與賊也。 臣於聞變之日, 擗踴號哭, 天朝人問曰: ‘海賊何故侵軼汝國乎?’ 臣曰: ‘賊欲犯上國, 我國王據義拒之, 故移怒而至此耳。’ 且臣阻雨爲永平府, 建州衛㺚子亦留其處。 有爲都督者來言曰: ‘胡人採蔘者, 汝國邊將, 年年遮殺, 非徒斫頭, 而至於剝皮, 此何等事耶? 吾初欲呈于禮部, 釋憾於汝國。’ 臣答曰: ‘汝若採蔘於汝地, 則我國邊將, 必不越境而追捕。 胡人托以採蔘, 僭入我境故殺之。 未知曲在何處耶?’ 且臣見山海關主事, 主事曰: ‘汝國若急, 何其請兵之少。 我軍欲爲偵探, 則托而不納, 亦未知何故耶。 若以糧乏爲慮, 則中國當自轉運, 若以兵擾爲懼, 則紀律亦至嚴明。 昔唐 太宗以極西之國, 伐極東之國, 宜其失利, 我國則不然。 太祖皇帝以水軍定天下, 汝其愼之。’" 上曰: " 天將其無此等語耶?" 根壽曰: "無矣。 但以一小營投順之語, 發明於天將, 則曰: ‘平壤城中有善射者, 必是汝國之人, 被擄於賊中者也’" 上曰: "若復請兵, 則成功其可必乎?" 根壽曰: "功之成敗, 未能逆知, 而前日狃於輕敵致敗矣。 臣聞平壤之役, 天將意欲破賊而後會食, 故炊飯之具, 俱載戰馬而行, 及其敗也, 皆棄於道路矣。" 上曰: "平壤之賊多少幾何?" 根壽曰: "我國體探人, 皆以爲數小, 而天兵則曰: ‘多至數萬’" 上曰: "無乃賊羸兵而示弱, 故體探人妄以爲數少耶? 且未知天兵之登城而戰死者幾許耶?" 根壽曰: "登城者皆精兵, 而點閱則三百失亡云。 史儒勇力過人, 曾與㺚賊戰多有功, 不幸而死, 可謂痛惜。 且馬兵多寘, 惟在楊總兵之分付耳。"
- 【태백산사고본】 14책 28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5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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