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전투 후에 양 총병이 왜적에 대한 정보 부족을 질책했다고 심희수가 보고하다
이에 앞서 부총병 조승훈, 유격 장군(遊擊將軍) 사유(史儒)·왕수관(王守官) 등이 평양에 진격하여 17일 동틀녘에 평양으로 돌격, 성에 포(砲)를 쏘고 관(關)을 부수면서 길을 나누어 쳐들어가 몸을 돌보지 않고 전투를 독려하였다. 사유가 사졸보다 앞장서서 천총(千摠) 마세륭(馬世隆)·장국충(張國忠) 두 무관과 함께 손수 적병 수십 급을 베었으나 사유와 마·장 두 사람이 탄환에 맞아 전사하였다. 따라서 제군(諸軍)이 후퇴하여 무너졌다. 승훈은 빨리 달려서 하루 만에 대정강(大定江)에 도착하여 전군(全軍)을 거느리고 돌아가 버렸다. 병조 참지 심희수(沈喜壽)를 파견하여 구련성(九連城)에 가서 양 총병에게 정문(呈文)하고, 조 총병을 거듭 타일러 기성(箕城)063) 에 머물면서 공격하도록 간절히 고하였다. 희수가 돌아와서 아뢰기를,
"양 총병이 크게 노하여 목소리와 얼굴빛이 모두 사나와져서 ‘예부터 어찌 대국(大國)이 소국(小國)을 위하여 많은 병마를 수고스럽게 움직여서 2∼3천 리 밖의 위급한 상황을 구제한 일이 있었던가. 황제의 은혜가 망극하니 맹세코 은혜를 보답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너희 나라가 장관(將官)들은 이를 생각하지 않고, 군사·군량·전선을 맡은 제신(諸臣)이 모두 뒤떨어져 있으면서 전진(戰陣)에 나아가려 하지 않고서 오직 우리 군사들만 몰아 적과 싸우게 하였다. 또 적군 중에 총을 잘 쏘는 자가 많이 있었는데도 나에게 진작 말하지 않았으니, 이 무슨 생각에서였던가?’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곧장 하나의 소첩(小帖)을 신에게 내어보였는데, 이는 조 총병이 양 총병에게 올린 것이었습니다. 첩서 내용에 ‘조선의 한 작은 병영(兵營)이 투항했다.’는 따위의 말이 있었습니다. 신이 기필코 그럴 리가 없다는 뜻을 반복하여 말하자, 그의 얼굴빛이 조금 누그러지면서 ‘너희 나라는 본디 예의의 나라로 일컬어졌는데 어찌 적을 감싸 내응(內應)할 리가 있겠는가. 저쪽 군중에 양득공(楊得功)이란 자가 있는데 나의 친병(親兵)이다. 마땅히 그에게 자세히 물어보고 따져서 처리하겠다.’ 하였습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이를 보니 매우 놀랍다. 어떻게 조처해야 될 것인지 대신에게 하문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28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517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명(明) / 군사(軍事)
- [註 063]기성(箕城) : 평양의 딴 이름.
○先是, 副總兵祖承訓、游擊將軍史儒ㆍ王守官等, 進至平壤, 以十七日黎明, 進迫平壤, 砲城斬關, 分道以入, 奮躍督戰, 史儒身先士卒, 與千總馬、張二官, 手斬賊累十級, 儒及馬、張二人中丸而死。 諸軍退潰。 承訓一日之內, 疾馳到大定江, 將全軍回去。 遣兵曹參知沈喜壽往九連城, 呈文于楊總兵, 懇告以申勑祖總兵, 留擊箕城。 喜壽回來啓曰: "楊總兵大怒, 聲色俱厲曰: ‘自古以來, 安有大國爲小國, 勞動許多兵馬, 救濟急難於數三千里之外者乎? 皇恩罔極, 所當圖報之不暇。 而爾國將官, 不此之思, 管兵管糧管舡諸臣, 皆落後不肯上陣, 獨驅吾兵犯賊。 且賊中多有善射者, 不曾說吾, 是何等意思也?’ 卽出一小帖示臣, 乃祖總兵呈楊總兵者也。 帖中有: ‘朝鮮之兵, 一小營投順。’ 等語。 臣反覆以必無此理之意, 則其色稍降曰: ‘爾國素稱禮義之邦, 豈有護賊內應之理? 彼軍中有楊得功者, 俺之親兵也。 從當詳問量處。’ 云云" 傳曰: "觀此極爲驚愕, 何以處之, 問于大臣。"
- 【태백산사고본】 14책 28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517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명(明) / 군사(軍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