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근수가 중국 차관에게 공개한 일본 풍신행장 등이 보내온 편지 두 통
윤근수가 아뢰었다.
"신이 ‘왜(倭)의 서계(書啓)043) 두 통이 있습니다. 차관(差官)에게 보여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혹 왜적이 불측한 말을 할까 두렵습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하 유격(夏遊擊)·황 참정(黃參政)·서 지휘(徐指揮)가 함께 앉아있기에, 신이 뵙고 작은 단자(單子)에 ‘왜노(倭奴)가 중국을 침범하려고 우리 나라에서 병량(兵糧)을 꾸려 하기에 우리 나라가 엄한 말로 호되게 꾸짖은 까닭으로 병화(兵禍)를 입었다.’고 쓴 것과 왜노의 서계 두 통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유격과 참정이 ‘우리들이 바로 평양에 도착하여 왜적과 서로 만날 터이니, 그대 나라는 중신(重臣)을 차출하여 우리와 함께 가도록 하라.’ 하였습니다. 신은 ‘이 일은 응당 전하에게 아뢰고 처리해야 한다. 단 왜적과 우리는 원수가 되었으니, 저들이 우리의 중신을 보면 살려 둘 리가 없을 듯하다. 어떻게 바로 달려갈 수 있겠는가.’ 하니, 그들은 ‘그렇다면 그대 말이 옳다.’ 하고, 인하여 ‘우리들은 그대들을 대동하지 않고 가겠다.’ 하였습니다. 신이 왜적의 편지 두 통을 보여 주었는데, 그 한 통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일본국에서 차출되어 온 선봉(先鋒) 풍신행장(豊臣行長) 및 의지(義智)는 삼가 한음(漢陰) 대인 합하(大人閤下) 이덕형(李德馨)에게 아뢴다. 행장은 조금도 아는 친분이 없으나 의지가 항상 합하의 사람됨을 자랑한 까닭에 이름을 안 지는 오래되었다. 지금 여기에서 한 장의 편지를 보냄은 일찍이 느낀 바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귀국(貴國)에 대하여 티끌만한 원한도 없다. 단지 중국을 침범하려는 것뿐이다. 지난해 우리 전하가 세 사람의 사신을 송환할 때에 이 일을 대략 이야기하였는데, 그 회답에 ‘본국은 중국의 번진(藩鎭)이다. ……’라고 하였다. 올해 또 우리 전하가 편지를 마련하여 일본의 당(黨)이 되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그 편지를 부산(釜山) 사람이 받지 않았다. 그러므로 삽관(揷串)에 영문(營門)을 세워 서울까지 연이었으며, 또 병란(兵亂)에 휩쓸리게 된 것이다. 도중에서 드디어 그 회답을 요구하였는데 무슨 이유로 부산·동래(東萊)에서 길을 막았는가? 이 때문에 순식간에 그 영문을 함몰시켰다. 그 이유는 먼저 그 번진부터 무너뜨리고 중국을 침입하기 위해서인데 이는 바로 제장(諸將)들의 뜻이었다. 귀국이 만일 길을 빌려 주었더라면 어찌 이런 화가 미쳤겠는가. 부산·밀양 사이에 3∼4만 명의 복병(伏兵)으로 길을 막았으나, 우리들의 선봉이 그 길을 텄는데, 한 명의 군사도 칼을 겨누는 자가 없었다. 요즈음 와서 상주·충주·봉안(奉安) 사이에도 복병이 있었으나 모두 칼을 겨누고 대적하지 않는 까닭에 생각하는 바를 통할 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경성(京城)에 도착하면 반드시 생각한 바를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라 여겼으나, 경성에 도착하니 대왕은 이미 경성에서 교하(交河)로 피하였고 그곳의 진영(陣營)도 무너졌다. 따라서 끝내 생각한 바를 이야기하지 못하고 할일없이 이 영문에 이르렀다. 합하가 이 영문에 있으니 한마디 말을 통하기를 바란다.
대저 임금의 몸은 만세의 근본을 일으키는 것이다. 바라노니 계책을 훌륭히 하여 화친(和親)을 하는 것이 어떠한가? 귀국의 화친을 요구하려면 왕족 및 권세를 잡고 있는 무리를 볼모로 삼아 일본에 보내야 한다. 그렇게 하면 용가(龍駕)044) 를 보호하여 서울의 도성(都城)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용가가 평안도에 머물러야 될 것이니, 이것도 합하의 현명한 판단에 달려 있다. 그렇긴 하지만 일본의 제장들이 바로 중국을 침입하면 성중(城中)과 평안도가 함께 매우 총망(怱忙)하게 될 것이니, 팔도(八道) 가운데 한 지역을 골라서 용가를 편안히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것도 합하의 현명한 판단에 달려 있다. 일본의 당(黨)이 된다면 볼모만 보내면 된다. 팔도에 나누어 보낸 우리 제장의 성명을 대략 기록하여 태람(台覽)에 대비하겠다. 풍신휘원(豊臣輝遠)은 경상도로 보냈고, 융경(隆景)은 전라도로 보냈고, 가정(家政)은 충청도로 보냈고, 승륭(勝隆) 및 원친(元親)은 경기도로 보냈으며, 도성을 진호(鎭護)하는 자는 풍신가수(豊臣家秀)이다. 풍신길성(豊臣吉成)은 강원도로 보냈고 풍신가정은 【위에 보인다. 혹 옮겨 쓸 적에 잘못 쓴 것인가?】 황해도로 보냈고 청정(淸正)은 영안도(永安道)로 보냈다. 행장(行長)과 의지(義智)가 평안도로 가기를 요청한 것에 관해서는 먼저 편지에 다 말하였으므로 다시 이야기하지 않겠다. 제장들이 팔도에 가득하게 깔렸으나 합하께서 지역을 골라 용가를 안주시킨다면 그 지역에 파견한 장수를 돌아오게 하여 용가를 머물게 하려는 것이 행장과 의지의 뜻이다. 용가를 해변에 안주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것도 총망할 듯하다. 그 까닭은, 병선 수만 척이 바다 가운데 떠있는데 오늘 서남쪽 해변에 도착하지 않으면 내일은 도착할 수도 있고 또는 수십 일을 지나서 도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시기를 분명히 지적하기가 어려우니, 그대는 살피시기를 바란다. 나머지는 조신(調信)·선소(仙巢)·죽계(竹溪)가 말로 진술할 것이다. 황공히 이만 그치며 머리를 조아린다. 일본 천정(天正)045) 임진 6월 11일. 【풍신행장·풍신의. 】
또 다른 한 통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일본국에서 차출되어 온 선봉 풍신행장 및 의지는 조선의 삼태(三台)046) 대인 합하(大人閤下)에게 아뢴다. 일본이 상주(尙州)로의 진격을 명한 날에 사로잡은 역관(譯官)에게 간단한 편지를 부쳤으므로 거듭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회답을 얻질 못했으므로 도성에서 하변(河邊)의 진영에 가기까지 다시 한 차례의 편지를 올렸으나, 그에 대한 회답도 주지 않았다. 진중(陣中) 사졸들이 곧 큰소리치면서 ‘싸워서 자웅을 결정하는 것이 반드시 이 하변에 달려 있다.’ 하였다. 그래서 순식간에 하수를 건넜으나 한 명의 사졸도 칼을 겨누는 자가 없어서 유시말(酉時末)047) 에 개성부(開城府)에 도착하였다. 이로써 보면 온 나라 사람들이 힘을 다한다 하더라도 어떻게 승부를 내겠는가. 그러니 일본의 당이 되어 상의하여 대명(大明)을 침범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또 화친의 계책을 운용할 것이니 그러면 용가를 도성으로 돌아오게 할 것인가, 아니면 용가를 평안도에 머물게 할 것인가? 단지 임금의 마음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복(僕)이 두 번 세 번 이 뜻을 아뢰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경인년048) 에 삼사(三使)를 파견했을 때 선위(宣慰)에 선발되었었고 이로 인해 삼사와 역관(譯官)에 대하여 낯이 익고 정(情)도 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신묘년049) 에 표류민을 송환할 적에 도서(圖書)050) 를 내려주었으므로 그 은혜를 받들어 사례하려는 것이 복(僕)의 뜻이다. 의지도 조상 때부터 조선의 동쪽 번신(藩臣)으로서 충성을 기울였으므로 얼마간의 상(賞)을 받았으니, 조선을 어찌 소활히 여기겠는가. 지금 조정의 은혜에 사례하지 않고 또 어느 때에 하겠는가. 이런 저런 사정에서 볼 때, 일본의 당이 되려 한다면 행장과 의지를 제외하고 따로 누구를 놓은 중개자로 삼겠는가. 현재 팔도에 나누어 보낸 제장들 중에는 조선이 알고 있는 자가 없는 까닭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행장과 의지가 평안도로 나가기를 요청한 것은 오로지 이 일을 진술하기 위함이었다. 합하께서 만일 의심이 나면 아들을 볼모로 보낼 적에 반드시 한 장수를 보낼 것이다. 급히 회답을 줄 것이요, 태만함이 없어야 좋을 것이다. 두렵고 황송하여 머리를 조아린다. 일본 천정 임진 6월 1일. 【풍신행장·풍신의지. 】
이상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고난 뒤, 참정이 ‘염탐하는 사람이 한번도 진짜 왜인을 못 보았다기에 아마 이는 가짜 왜인인가 여겼더니, 이제 왜인의 서계(書契)를 보고는 진짜 왜인이 분명함을 알았다. 그대 나라가 천자(天子)를 위하여 나라와 집을 잃고 많은 백성들이 모두 도륙(屠戮)을 당하였으며, 한쪽 변방에 피해 있으면서도 천자를 위하는 마음을 변하지 않으니 참으로 가련하고 애처롭다.’ 하고 이어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면서 ‘우리들이 판서와 더불어 서로 속마음을 터놓고 사귀었으니, 굳이 평양에 갈 필요가 없다. 나는 당연코 석야(石爺)를 만나 그대 나라의 실정을 분명히 말할 것이며, 서계도 천자에게 주달(奏達)하겠다. 모쪼록 이런 뜻으로 자문(咨文)을 만들어 나에게 달라.’ 하였습니다. 석야는 병부 상서(兵部尙書) 석성(石星)을 이르는 것입니다.
돌아갈 시기를 물었더니 ‘20일이나 21일 사이에 북경(北京)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였습니다. 신이 ‘만일 대인이 북경에 돌아가 천자께 명을 청하여 군사를 출발시키기를 기다리면 날짜가 몹시 오래 걸릴 것이니 어찌 구원할 수 있겠는가. 돌아갈 적에 한편으로 진무(鎭撫)에게 말하여 발병(發兵)하게 하기 바란다.’ 하니, 대답하기를 ‘마땅히 진무에게 말하여 곧 군사를 발송하게 하겠다.’ 하였고, 서 지휘(徐指揮)는 ‘군사는 신속함을 귀하게 여긴다. 어찌 오래 끌겠는가. 즉시 발병하도록 하겠다.’ 하고는, 또 ‘우리들 세 사람은 모두 항주(杭州) 사람이다. 황응양(黃應陽)은 참모(參謀)이고 나는 찬획(贊畫)인데 군사(軍師)와 일반이며, 황은 중간에서 참모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다. 과거에 담윤(譚綸)과 척계광(戚繼光)이 왜(倭)를 정벌하여 경략(經略)할 때 황 참정이 참모였다.’ 하였습니다. 신이 ‘중국 군사가 평양으로 향할 적에 직로(直路)를 따라 간다면 양료(糧料)가 넉넉하지 못하지만 만약 세 길로 나누어 들어오면 양료를 마련할 수 있다.’ 하니, 답하기를 ‘이 계획이 매우 묘하다.’ 하였습니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28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509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명(明) / 군사(軍事)
- [註 043]서계(書啓) : 일본과의 왕복 문서임.
- [註 044]
용가(龍駕) : 임금이 타는 수레.- [註 045]
천정(天正) : 정친정(正親町)의 연호.- [註 046]
삼태(三台) : 영의정·좌의정·우의정 .- [註 047]
유시말(酉時末) : 오후 7시가 거의 되어가는 시간.- [註 048]
경인년 : 1590 선조 23년.- [註 049]
신묘년 : 1591 선조 24년.- [註 050]
도서(圖書) : 일본의 사자(使者)가 우리 나라에 입국할 때 제시하던 입국 허가증. 조정에서 미리 일본 사람에게 발급한 동인(銅印)인데, 그들이 지정된 항구에 입항하면 그곳의 변장(邊將)은 서계(書啓)·노인(路印)과 함께 이를 검사한 뒤 입국하는 그들의 정원을 확인하고 서울로 보냈음. 《대전회통(大典會通)》 예전(禮典) 대사객(待使客).○尹根壽啓曰:
"有: ‘倭書契二道。 令差官見之, 何如? 不然, 則恐倭賊或有不測之言也。 傳曰, 依啓。’ 夏遊擊、黃參政、徐指揮同坐而見之。 臣將小單子內: ‘倭奴欲犯大明, 借兵糧, 我國嚴辭峻責, 因被兵禍。’ 及倭奴書契二道呈之。 遊擊、參政曰: ‘吾等當直至平壤, 與倭賊相見, 爾國須差重臣, 與我同往。’ 臣曰: ‘此事當啓知殿下而處之。 但倭賊與我爲仇, 見我國重臣, 似無存活之理。 豈宜直往?’ 曰: ‘然則爾言是矣。’ 因言: ‘俺等, 當不帶爾等而往。’ 臣以倭書二道示之, 其一曰: 日本國差來先鋒豊臣行長及義智, 謹白漢陰大人閤下李德馨。 行長雖未有半面之素, 義智常說閤下誇人, 故知名久矣。 今於此地, 通一書, 夙因所感乎! 日本於貴國, 無纖芥之恨。 只要犯中國者也。 去歲吾殿下, 送還三使之日, 粗陳此事, 其報曰: "貴國者, 中國藩鎭云云。" 今歲又吾殿下裁書, 覓黨于日本, 其書釜山人不受之。 是以揷串, 立營門, 連京師耶, 又混兵塵耶。 途中遂覓其報, 如何如何 釜山、東萊遮路。 因玆瞬息之間, 陷其營者何也? 先毁其藩, 以言入中國者, 是諸將之意也。 貴國若借路, 則何及此禍乎? 釜山、密(良)陽(字)之間, 以伏兵三四萬遮路, 吾輩先驅, 開其路, 無一士當鋒。 爾來尙州、忠州、奉安, 亦雖有伏兵, 皆不當鋒, 故無由通一語說所思, 以謂到京城, 必說所思, 而到京城, 則大王已逃京城而交河, 河邊之陣, 亦潰矣。 遂不能說所思, 空到此營。 閤下在此營, 通一語, 希有希有。 蓋是聖躬, 萬世起本也。 幸甚以賢計慮, 和親如何? 貴國若要和親, 王族及當權之輩, 爲質子, 遣日本可也。 然則鎭護龍駕回城中, 不然, 則駐龍駕於平安, 是亦在閤下賢慮。 雖然, 日本諸將, 直入中國, 則城中及平安, 共匆忙乎? 八道之中, 請擇其地, 安龍駕如何? 是亦在閤下賢慮。 若枉黨日本, 只遣質子而已。 吾諸將分遣八道者, 粗錄其姓名, 以備台覽。 豐臣輝完遣慶尙道, 隆景遣全羅道, 家政遣忠淸道。 勝隆及元親遣京畿道, 鎭護城中者, 豐臣家秀也。 豐臣吉成遣江原道, 豐臣家政 【見上或傳書之際, 錯書耶?】 遣黃海道, 淸正遣永安道, 行長、義智請赴平安道者, 先書說盡, 故不能再說。 雖諸將瀰淪于八道。 閤下擇地, 安龍駕, 則摩回遣其地之將, 以駐龍駕者, 是行長、義智之意也。 安龍駕於海邊, 則如何? 是亦恐匆忙乎? 所以者何? 兵船數萬隻, 浮海中, 今日不到此西南之邊, 必在來日乎! 又歷數十日乎! 難暗指其期, 賢察。 餘在調信、仙巢、竹溪口布。 恐惶不宣。 頓首。 日本、天正壬辰六月十一日, 【豊臣行長、豊臣義智】
(○) 又一道曰: 日本國差來先鋒豊臣行長及義智, 啓朝鮮三台大人閤下。 日本所命尙州之日, 付生擒譯官呈短簡, 是以不重說焉。 猶不獲止, 自城中至河邊之陣, 雖呈一書, 不賜其報。 陣中士卒, 却誇說曰: ‘鬪戰決雌雄, 必在此河云云。’ 故瞬息之間, 雖超河, 無一士當鋒者, 而酉尾到開城府。 以此視之, 闔國人戮力, 亦豈決勝乎? 庶幾枉黨于日本, 相議犯大明乎? 又運和親之籌, 然則回龍駕於城中耶? 抑亦留龍駕於平安道耶? 只在龍襟而已。 僕再三啓此意者, 是無他, 庚寅遣三使之日, 應宣慰之撰, 因玆于三使于譯官, 面亦熟情亦親。 加之辛卯送還漂民之次, 辱賜圖書, 欲奉謝其恩者, 僕之意也。 義智亦祖先以來, 東藩于朝鮮, 而傾忠誠, 是故粗受其賞, 今於朝鮮, 豈存踈闊乎? 此時不謝朝恩, 而又何時乎? 于此于彼黨日本, 則除行長、義智之外, 別以誰爲良媒乎? 今分八道之諸將, 無受知於朝鮮之徒, 故云爾。 行長、義智請赴平安道者, 偏爲陳此事者也。 越于閤下, 若有狐疑, 則爲質子, 遣一將者必矣。 急賜報可也, 無怠好矣。 恐惶頓首。 日本、天正壬辰六月朔。 【豊臣行長、豊臣義智】 看書訖。 參政言, ‘探哨人, 不會見眞倭, 恐是假倭子, 今見倭子書契, 的是眞倭。 爾國爲天子失家失國, 許多生靈盡被屠戮, 竄一隅而猶不變, 眞可怜憫。 因涕泗拊心曰: "吾等與判書, 必肝相照, 不須往平壤。 我當現石爺, 洞陳爾國情事。 書契亦當達于天子。 須以此意, 作咨文, 與我。
石爺謂兵部尙書石星也。 問回期, 則曰: ‘二十二十一日間, 當還北京。’ 臣曰: ‘若待大人還京, 請旨發兵馬, 則爲日甚久, 豈能急救? 望回還時, 一面言於鎭撫, 發兵。’ 答曰: ‘當言于鎭撫, 卽發送。’ 徐指揮曰: ‘兵貴神速, 豈容遲久? 當卽發兵。’ 且曰: ‘吾等三人, 皆抗州人。 黃則參謀, 我則贊畫, 與軍師一般, 黃則爲間謀者也。 昔年譚綸戚繼光征倭經略時, 黃叅政是參謀。’ 云。 臣曰: ‘天兵若向平壤, 則只從直路, 糧料不敷, 若分三路而入, 則糧料可辦。" 答曰: "此計甚妙。"
- 【태백산사고본】 14책 28권 1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509면
- 【분류】외교-왜(倭) / 외교-명(明) / 군사(軍事)
- [註 0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