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강에 《강목》을 강하고 북변과 왜적의 대비에 대해 의논하다
석강(夕講)에 있어 《강목(綱目)》의 ‘동시월(冬始月)’부터 ‘종회(鍾會)를 사도(司徒)로 삼았다.’는 대목까지 진강(進講)하였다. 임문(臨文)하여 상이 변협(邊協)에게 이르기를,
"병가(兵家)에서 주객(主客)의 형세가 같지 않다고 하는데, 촉한(蜀漢)으로써 본다면 같지 않은 점이 어디에 있는가?"
하니, 변협이 아뢰기를,
"미리 방비하여 편안한 군사로써 피로한 군사를 기다리기 때문에 주객의 구분이 있었는데, 촉한은 성을 지키는 데 엄하지 아니하여 종회(鍾會)가 갑자기 침입하였으니, 이는 복심(腹心)의 병통으로 촉한이 도리어 객(客)이 된 셈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옛날에는 우리 나라가 성을 지키는 데 능하였는데, 지금은 1∼2일도 지탱하지 못하고 문득 흩어져 달아나기를 생각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변협이 아뢰기를,
"인심이 옛적과 같지 아니하여 군상(君上)을 위해 죽으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고려의 박서(朴犀)와 김경손(金慶孫)이 귀주(龜州)를 지킬 때 임금은 이미 출항(出降)하였는데도 굳게 지키고 항복하지 않았던 것은 다만 인심을 얻었기 때문일 뿐이었고, 장순(張巡)이 혼자 고성(孤城)을 지킬 때 군졸이 다 죽고 20여 명만 남았으나 항복하지 않았으니, 군사가 아무리 많아도 인심을 얻지 못하면 어찌 능히 그리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난 을묘년019) 에 이덕견(李德堅)이 항복했었는가? 그 사실을 경(卿)은 알고 있을 것이다."
하니, 변협이 아뢰기를,
"그해 5월 9일에 감사(監司)는 해남(海南)에 들러 강진(康津)으로 향하고 소신(小臣)은 군량을 계산하는 일로 밤중까지 공청(公廳)에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왜적이 모처에 들어 왔다는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감사가 정병(精兵)을 뽑아 달량(達梁)을 구원하라 하기에 신이 백여 명을 거느리고 출발하다가 길에서 가리포(加里浦)의 배 만드는 사람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왜적에게 생포되었는데 그들의 배에 오르게 하여 무기들을 구경시키고 나서 놓아주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병사(兵使)에게 고하기를, 가리포·어란(魚蘭)·달량(達梁)이 위태롭게 되었으니 급히 군사를 나눠 구원해야 한다고 하니, 병사가 신으로 하여금 어란을 구원케 하였습니다. 왜적이 달량을 포위하여 촌락을 분탕(焚蕩)하는데 연기가 3일 동안 하늘을 덮었으며, 달량이 함락된 뒤 이덕견이 단신으로 와서 말하기를, ‘왜적과 모처에서 서로 만나기로 약속하였으니, 군사를 일으켜 그곳에서 기다리도록 하라.’ 하기에, 신이 그의 말을 감사에게 보고하였는데, 감사가 상에게 아뢰어 그를 베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때 왜적이 얼마나 되었는가?"
하니, 변협이 아뢰기를,
"배 70척에 군사가 약 6천 명쯤 되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수만 명이 쳐들어올 기세는 보이지 않던가?"
하니, 변협이 아뢰기를,
"왜선(倭船)은 그다지 크지 아니하여 중국 배에 미치지 못하므로 한 척에 1백 명밖에 실을 수 없습니다. 1백 척이면 1만 명이니 1만 명밖에는 더 나오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혹시 변지(邊地)를 할거(割據)한 뒤에 계속해서 계원전(繼援戰)을 펼 리는 없겠는가?"
하니, 변협이 아뢰기를,
"주객(主客)이 같지 않으니 그러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유대진(兪大進)이 아뢰기를,
"성교(聖敎)가 지당하십니다. 《동국통감(東國通鑑)》에 의하면, 평안·함경에 그들의 발길에 닿지 않은 곳이 없어, 세종 말년에 33척이 비인(庇仁)을 침범하였고 38척이 해주(海州)를 침범하였었습니다."
하니, 변협이 아뢰기를,
"그때에는 왜인이 우리 나라의 해로(海路)를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러하였지만, 지금은 해로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충청도에는 능히 들어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지 않다. 우리 나라의 사정을 저들이 죄다 알고 있으니 만약 우리 나라가 전라도에 주력하는 줄을 알고 딴 도(道)로 들어오면 어찌할 것인가?"
하니, 변협이 아뢰기를,
"소적(小賊)이라면 천성(天城)·가덕(加德)이 염려되지만, 대적(大賊)이야 어느 곳엔들 들어오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에게 화친을 단절할 사세가 있어 보이던가?"
하니, 변협이 아뢰기를,
"오직 대마도(對馬島)만은 우리에게서 후한 이득을 받아온 터이므로, 혹 이를 내세워 다시 통하기를 굳이 청하였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들은 화친을 단절하지 않을 줄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마도가 어찌 마음대로 할 수 있겠는가. 만약 화친을 단절시킨다면 사단(事端)이 많을 것이다."
하니, 변협이 아뢰기를,
"과연 그렇습니다. 그들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오지 않더라도 적은 군사로써 누차 침범한다면 우리는 자연 피곤해질 것입니다. 더구나 하삼도(下三道)는 적지 천리(赤地千里)로 변하였으니, 사실 우리가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승부간(勝負間)에 살상이 클 것이 두려운 것입니다. 또한 지금 사신(使臣)들이 가지고 온 무역물(貿易物)이 많은지 적은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많다면 이익을 탐내는 마음이 앞선 것으로 달리 원대한 계획이 없는 것이고, 적다면 진실로 염려되는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가지고 온 물품이 적다고 한다. 부사(副使)에 대해, 혹자는 장재(將才)가 있는 사람이라고 하고 혹자는 대마 도주의 아들이 아니라 국왕(國王)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이 말을 어떻게 보는가?"
하니, 변협이 아뢰기를,
"절대 대마 도주의 아들은 아닙니다. 아무리 국왕의 친속이라 하더라도 사치성이 그와 같으면 원대한 사려가 없는 자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아무리 무상(無狀)한 그들이라 한들, 딴 사람을 제 아비라 청할 리야 있겠는가. 또한 서둘러 신사(信使)를 유치하려는 것은 무슨 의도인가?"
하니, 변협이 아뢰기를,
"남의 역량을 빌어 인심을 진정시키려는 것인지, 우리에게 혼단을 만들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쪽에서 통신사(通信使)는 절대 보내지 말고, 다만 두둑한 선물로써 회유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변협이 아뢰기를,
"의장(衣章) 같은 물품을 하사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들을 접견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변협이 아뢰기를,
"이미 서계(書契)로써 서로 통하였으니, 접견하신들 무엇이 해롭겠습니까. 궐내(闕內)에 잔치를 하사하여 먼 데 사람을 포용하시는 도량을 보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시(平時)에야 통신사를 보내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마는, 지금은 제 임금을 시해한 역적이므로 어렵다는 것이다. 경연관(經筵官)은 이를 어떻게 보는가?"
하자, 허성(許筬)이 나와서 아뢰기를,
"성교(聖敎)는 만세(萬世)에 바꿀 수 없는 정론(定論)으로, 이륜(彝倫)을 부식(扶植)하는 뜻이 지극하십니다. 다만 싸움이 계속 일어나 변방이 불안할까 염려되니, 생령(生靈)을 위한 계획을 세우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저들의 악행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그들과 교빙(交聘)하는 것도 괜찮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계획은 잘못된 듯하다."
하니, 허성이 통신의 편리함을 적극 말하였다. 변협이 아뢰기를,
"지난 정해년020) 의 전라도 인심을 보면, 수령은 장수의 명을 따르지 않고 백성은 수령의 영을 따르지 않았으니, 지금 비록 이일(李鎰)을 보내더라도 상께서 장령(將令)을 중히 해주지 않는다면 이전의 버릇을 고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다. 허성이 아뢰기를,
"공작(孔雀)은 어떻게 처분할 것입니까? 이를테면, 성의는 가상하나 진금(珍禽)·기수(奇獸)를 본디 좋아하는 바가 아니고 또 수토(水土)가 맞지 않으니 되돌려 보낸다고 말씀하시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이 매우 마땅하니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다만 저들의 의심을 살까 염려될 뿐이다. 모처로 보내려 하는데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허성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에는 놓아 기를 만한 곳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장차 외부와 의논해서 처리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23권 7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459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군사-군정(軍政) / 역사-전사(前史) / 외교-왜(倭) / 인사-임면(任免)
○有夕講。 進《綱目》, ‘自冬十月, 止鍾會爲司徒。’ 臨文, 上謂邊協曰: "兵家曰, 客主之勢不同。 以蜀觀之, 則烏在其爲不同耶?" 協曰: "預爲防備, 以逸待勞, 故有客主之分, 蜀則不爲城守戒嚴, 而鍾會猝入, 乃腹心之痛也, 此則漢反爲客矣。" 上曰: "古者我國善城守, 而今則不能支一二日, 便思散走何耶?" 協曰: "人心不古, 無死長之心故也。 朴犀ㆍ金慶孫之守龜州也, 至於君已出降, 而堅守不降, 只在能得人心而已, 如張巡獨守孤城, 軍卒盡死, 只餘二十餘人而不降, 兵雖多, 不得人心, 則安能如此乎?" 上曰: "乙卯年, 李德堅降耶? 卿知之矣。" 協曰: "五月初九日, 監司入海南, 向康津矣, 小臣以軍糧計料事, 夜分坐廳, 忽報賊來某處。 監司使抄精兵, 救達梁, 臣率百餘人發行, 路逢加里浦造船之人, 自言: ‘爲賊所擄, 使登其船, 觀其兵械, 然後縱之去云。’ 臣告兵使曰: ‘加里浦ㆍ魚闌ㆍ達梁孤危, 急須分兵救之。’ 兵使使臣救魚闌。 賊圉達梁, 焚蕩村落, 烟焰漲天三日, 達梁陷, 李德堅赤身來言, ‘與賊相期於某處, 可以起兵待之於其地。’ 臣以其言, 報于監司, 監司啓于上, 命斬之矣。" 上曰: "倭幾何耶?" 協曰: "七十艘云, 約六千餘矣。" 上曰: "有數三萬出來之勢乎?" 協曰: "倭船不甚大, 不及唐船, 一艘不過載百名矣。 百艘則萬名, 萬外似難出來矣。" 上曰: "無乃割據邊地, 陸瀆繼援之理乎?" 協曰: "主客不同, 此則必不能矣。" 兪大進曰: "聖敎至當。 以《東國通鑑》見之, 則平安ㆍ咸鏡無處不到。 英廟末年, 三十三艘犯庇仁, 三十八艘犯海州矣。" 協曰: "其時倭人, 習知我國海路, 故能然。 今則不知海路, 忠淸道恐不能入也。" 上曰: "不然。 我國之事, 彼無不知。 若知我國致力於全羅道, 而自他道入, 則奈何?" 協曰: "小賊則天城ㆍ加德可慮, 大賊則何處不入來乎?" 上曰: "彼有絶和之勢乎?" 協曰: "唯對馬島受厚利於我, 或此固請再通耳。 彼則必知其不絶和矣。" 上曰: "馬島豈能自由耶? 若絶和, 則事多矣。" 協曰: "誠然。 雖不多來, 輕兵屢犯, 則我自困矣。 況下三道, 赤地千里, 我非畏被也, 勝負間, 畏所傷大也。 且今使臣等齎來貿易之物, 多耶? 小耶? 多則似有貪利之意, 無他遠圖, 少則誠可慮矣。" 上曰: "齎物小云矣。 副使或云有將才之人, 或言非馬島之子, 乃國王之子, 此言如何?" 協曰: "決非島主之子。 雖國王親屬, 豪侈如此, 無遠慮者也。" 上曰: "雖無狀, 豈敢謂他人父耶? 且汲汲欲致信使者, 何意耶?" 協曰: "欲借重, 鎭定人心耶? 抑開釁於我耶? 未可知也。" 上曰: "通信使, 決不可送, 但以厚贈, 誘之如何?" 協曰: "如衣章之物, 賜之似可。" 上曰: "接見如何?" 協曰: "旣以書契相通, 接見何妨? 闕庭賜宴, 當用包荒之量, 可也。" 上曰: "平時則通信何難? 但今簒賊, 難之耳。 經筵官, 以爲何如?" 許筬進曰: "聖敎乃萬世不易之定論, 其扶植彝倫之意至矣。 但恐干戈相從, 邊境不安, 不可不爲生靈計耳。 彼之惡, 何預於我? 臣意交聘, 亦無不可。" 上曰: "此計似誤矣。" 筬仍極言通信之便。 協曰: "丁亥年全羅道人心, 守令不用將帥之令, 百姓不行守令之令, 今雖送李鎰, 非自上重將令, 則不能改絃矣。" 筬曰: "孔雀何以處之? 若曰誠意可嘉, 而珍禽奇獸, 素非所玩, 且不耐水土, 故還送云云, 何如?" 上曰: "此言甚當, 予亦思之。 但恐彼疑之耳。 欲送某處, 何如?" 筬曰: "我國無放畜之地矣。" 上曰: "予當外議處之。"
- 【태백산사고본】 12책 23권 7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45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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