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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19권, 선조 18년 6월 16일 을묘 1번째기사 1585년 명 만력(萬曆) 13년

이경진이 경연에서 정여립이 이이를 배척한 일을 들어 정여립을 비판하다

이경진(李景震)이 상소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

"신이 듣건대, 정여립(鄭汝立)이 경연에서 신의 숙부(叔父)인 이이를 비방하여 배척했다고 하니 신은 놀랍고 괴이하여 스스로 ‘세상에 어찌 이런 경우도 있는가? 다른 사람이 비난했다고 하면 말할 것이 없겠지만 여립은 반드시 이러할 리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집안에 있는 편지를 열람하여 여립이 숙부에게 보낸 편지를 찾았는데, 거기에 ‘종자(宗者)께서 소인배들의 노여움을 사서 낭패하여 출관(出關)한 이후로 누워도 자리가 편안하지 않고 먹어도 맛이 달지를 않아 간담을 열어 젖히고 피를 뿌리면서라도 간인(奸人)들이 어진이를 질투하고 나라를 그르치는 정상에 대해 극언(極言)하고 싶었다. 그리고 나서 다시 생각해보니 바야흐로 무상(無狀)한 자신은 군부에게 버림받고 있는 실정이어서 의리상 얼굴을 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성장(成丈)062) 이 종자를 위해 소장을 올려 변론했다 하니, 비록 제가 말하지는 않았으나 또한 한은 없다고 여겼다. 이어 들리는 말에 의하면 성장도 참소와 비방을 만나 산으로 돌아갔다 하니, 분서 갱유(焚書坑儒)의 재앙이 조석에 급박하게 되었다. 따라서 충분(忠憤)이 날로 격해져 그냥 있을 수가 없기에 막 동지를 규합하여 대궐에 소장을 올리려 하였는데 곧 이어 들으니 상의 마음이 마치 해가 중천에 뜬 듯이 깨우치시어 귀신 도깨비 같은 무리들이 스스로 물러나 숨을 것이라 하였으므로 또 스스로 참고 그만두었다. 지금의 상황을 보면 한두 간사한 자들은 비록 쫓겨났지만 거간(巨奸)이 아직도 조정의 의논을 장악하고 있으면서 화(禍)를 즐기는 마음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 불행히 하늘이 재앙이 내린 것에 후회하지 않는다면 뒷날의 근심이 오늘보다 더욱 심하여 구원할 수가 없게 될 것이다. 현재 붕우 가운데 십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매우 적어 구구한 내가 존형(尊兄)에 대한 기대가 전에 비해 더욱 절실하니, 이 뜻 역시 애닯다고 하겠다.’ 하였습니다. 이는 계미년063) 9월로 세 사람이 죄를 받아 유배되고 숙부 이이가 조정으로 돌아오려 할 때였습니다.

또 하나의 편지가 있는데, 그 대략에 ‘생각건대 우리 임금께서 혼자 군의(群議)를 물리치고 존형을 여러 사람들이 미워하는 가운데서 발탁하여 총재(冢宰)로 임용하여 의심하지 않았으니 이는 실로 한(漢)·당(唐) 이래 있지 않았던 성대한 일이다. 그것을 보고 듣는 사람이 누군들 감격하지 않았을까마는 여립의 기쁨이 더욱 컸다.’ 하였으니, 이는 이이가 조정에 돌아온 뒤의 일입니다. 이 때부터 이이가 죽을 때까지는 겨우 한 달 사이인데, 어찌 다시 절교(絶交)한 편지가 있었겠습니까."

하였는데, 답하기를,

"정여립의 소위는 인정에 가깝지 않아서 내가 처음에는 혹 떠도는 말에서 나온 것인가 여겼었는데, 뒤에 들으니 과연 헛말이 아니었으므로 반측 무상(反側無狀)한 자라고 전교하였다. 그리고 자신에게 절교해야 할 까닭이 없다면 비록 다른 사람이 스스로 절교했다 한들 그것이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절교 여부에 대해서는 더욱 변명할 필요가 없다."

하였다. 【경진(景震)은 이이의 형의 아들이다. 】


  • 【태백산사고본】 10책 19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422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乙卯/李景震上疏, 略曰:

臣聞, 鄭汝立於筵中, 詆斥叔父, 臣驚怪自言曰: "天下安有是理也? 他人而毁之, 則無足道也, 汝立必無是理也。" 閱家中書, 得汝立通于叔父之書曰: "自從者, 慍于群小, 狼狽出關, 臥不安席, 食不甘味, 思欲披肝瀝血, 極言奸人媢嫉誤國之狀。 旣而復思, 則方以無狀, 見棄於君父, 義不可强顔以言。 而復有丈, 爲之上章陳辨, 雖不言, 亦無恨矣。 繼聞丈, 亦遭讒謗, 裹足還山, 焚坑之禍, 迫在朝夕。 忠憤日激, 不可復(上)〔止〕 , 方欲叫合同志, 抗章北闕, 旋聞聖心開(悞)〔悟〕 , 如日中天, 魑魅之屬, 將自退伏, 又自隱忍而止。 以今觀之, 一二憸人, 雖見貶逐, 巨奸尙握朝論, 樂禍之心, 囂然其未已。 不幸而天不悔禍, 則恐後日之憂, 將有甚於今日而不可救也。 目今朋友十分可恃者甚小, 區區所望於尊兄者, 比前尤切, 其志亦可哀矣。" 云云。 此乃癸未九月, 三人免罪, 將還朝之時也。 又有一書, 略曰: "竊惟吾君, 獨排群議, 至拔尊兄於衆惡之中, 使爲冡宰, 任之不貳, 此誠以來所未有之盛擧也。 凡在見聞, 孰不感激而之, 喜有甚焉。" 此還朝之後也。 自玆距之沒, 纔間一月, 豈更有絶交書乎?

云云。

答曰: "鄭汝立之所爲, 不近人情, 予初以爲或出於流言, 厥後聞之, 則果非虛誣, 而敎以反側無狀也。 且在我無可絶之道, 則人雖自絶, 其何傷焉? 絶交與否, 尤不必辨。" 【景震, 珥之兄子也】


  • 【태백산사고본】 10책 19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422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