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를 강하고 육진의 방어책에 대해 논의하다
오시(午時)에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춘추(春秋)》 정공(定公) 4년 ‘기백성(杞伯成)이 회합(會合)에서 죽었다.’039) 에서 ‘춘추의 실정을 알 수 있다.’라고 한 데까지 진강하였다. 강이 ‘허(許)나라가 용성(容城)으로 천도(遷都)하였다.’라고 한 데에 이르러 김수(金睟)가 【관에 있으면서 일을 처리하는 것은 치밀한 듯하였으나 자신의 몸가짐과 마음씀은 소활 담백한 기상이 전혀 없었다. 】 아뢰기를,
"허나라가 이제 국도를 옮겼다는 기록이 네 곳에 나오는데 이는 초(楚)나라의 침략을 받아서입니다. 그러나 덕을 잘 닦아 스스로 노력하지 못하고 도읍만 옮기려 했으니 무슨 이익이 되겠습니까. 도읍을 옮긴 것을 기록한 것은 후세에 귀감이 되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하고, 이국은【기질이 순근(純謹)하고 처사가 공평 정직하였다. 포의(布衣) 때부터 동료들 사이에 명성이 나서 공의(公議)에 천거되어 왕자(王子)의 사부(師傅)가 되었는데, 계적(桂籍)040) 에 오른 뒤에는 청현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 아뢰기를,
"‘낭와(囊瓦)가 정(鄭)나라로 망명하였다.’041) 한 것은 임금이 장수를 잘 고르지 못했기 때문에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한 것이니, 임금이 용인(用人)을 잘못한 것에 대한 귀감이 될 만합니다."
하니, 상이 좌우에게 하문하기를,
"육진(六鎭)의 일을 어떻게 조처해야 하겠는가? 생각한 바가 있으면 각자 진술하도록 하라. 내 뜻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는데 지키지 못할까 저어스럽다. 요즈음 사람들마다 모두 변방(邊方)은 지엽(枝葉)이라고 하지만 이는 참으로 그렇지 않다. 조종(祖宗)께서 왕업(王業)을 일으킨 땅이니, 마땅히 국가와 더불어 서로 시종(始終)을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최황(崔滉)이 【성품이 본디 조급하고 망령스러워 교만하고 발끈 성내는 기가 있었다. 논의는 과격스럽고 용심이 교사스러웠으나 남들이 그의 마음을 환히 들여다보는 듯하였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아뢰기를,
"북방의 일을 누가 대단찮은 일이라고 하겠습니까. 소신이 기묘년042) 에 암행 어사가 되어 심산 궁곡까지 살펴보니 민가(民家)가 열에 한둘도 없었습니다. 그때 신의 소장에 ‘조석지간(朝夕之間)도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으로 아뢰었었습니다."
하고, 유영립(柳永立)은 【재기가 노둔하여 별다른 간국(幹局)이 없는 추솔하고 비루한 일개 범부(凡夫)일 따름이다. 전에 종성 부사(鍾城府使)로 있을 때 강변의 싸움에서 아군의 사망자를 사실대로 알리지 않았으니 이미 임금을 속인 죄를 지은 것이다. 후설(喉舌)의 직책을 맡아서도 천안(天顔)을 지척에 대하고서도 또 사실대로 아뢰지 않음으로써 군부를 무시했기 때문에 탄핵과 논박을 받게 되었으니 그의 사람됨이 볼품없음을 이로써 알 수가 있다. 다른 것이야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 아뢰기를,
"신이 여러번 북도에 가 보았는데 회양(淮陽)에 철령(鐵嶺)이 있고 철령을 넘어서면 점차 낮아집니다. 경흥(慶興)은 더욱 낮은데 바람이 일면 부득이 구의(狗衣)를 입어야만 추위를 막을 수 있으니, 그 지방의 바람결이 매서운 것을 알 만합니다. 눈이 내리면 문을 막아버릴 정도로 쌓이는데 쌓인 눈을 쳐내고서야 문을 열 수가 있습니다. 요즈음 농사가 해마다 흉년이 들은 탓에 목단(木端)으로 겨우 쌀 말을 바꿀 뿐인데, 정병(精兵)이 많이 들어간다면 군량을 대기가 매우 난처합니다. 당초 사변(事變)이 일어났을 때에 토병(土兵)만을 거느리고 가서도 막을 수 있었으니, 이제 비록 잔적(殘賊)이 출몰한다 하더라도 적세(賊勢)가 한창일 때와는 같지 않습니다. 그러니 이 때문에 매번 정병을 투입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고, 김수는 아뢰기를,
"정병이라 칭하지만 풍토가 서로 다르고 북도로 가서 방어할 때는 기능이 서로 다르니 아무리 예기(銳氣)가 있다 하더라도 쓰기가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떤 자는 다른 사람을 대신 보낸다고도 하니, 이렇게 하고서도 나라를 위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해마다 흉년이 드니 나라의 운세가 수상하다."
하였는데, 김수가 아뢰기를,
"경흥에 흉년이 더욱 극심합니다. 둔전(屯田)을 하고 싶어도 반드시 풍년이 들어야 저축을 할 수가 있는데, 풀이 없어 말이 주리고 곡식이 없어 사람이 굶고 있습니다. 오랑캐 땅에라도 풍년이 들었으면 사서 수송해다가 먹겠지만 오랑캐 땅도 흉년이라고 하니 더욱 민망스럽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19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418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인물(人物) / 군사-군정(軍政) / 군사-부방(赴防) / 군사-병참(兵站) / 구휼(救恤)
- [註 039]‘기백성(杞伯成)이 회합(會合)에서 죽었다.’ : 노 정공(魯定公) 4년 3월, 제후들이 소릉(召陵)에 모여 초(楚)나라를 치고, 다시 5월에 고유(皐鼬)에서 회맹(曾盟)하였는데, 이 모임 도중 기백성(杞伯成)이 죽었다고 한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정공(定公) 4년.
- [註 040]
계적(桂籍) : 과거에 급제한 사람의 명부(名簿). 진(晉)나라 극선(郤先)이 현량대책(賢良對策)에 장원하여 옹주 자사(雍州刺史)로 부임할 때 무제(武帝)의 물음에 대해 스스로를 ‘계림일지(桂林一枝)’와 ‘곤산편옥(崑山片玉)’에 비긴 것에서부터 시작되어 과거에 급제하는 것을 ‘절계(折桂)’라 부르고 그 명부를 계적이라 하였다.- [註 041]
‘낭와(囊瓦)가 정(鄭)나라로 망명하였다.’ : 춘추 시대의 초 장왕(楚莊王)의 아들로 평왕(平王)을 섬겨 영윤(令尹)이 되었다. 초 소왕(楚昭王) 때 오(吳)가 초를 정벌하였는데, 이때 낭와가 초의 장수로 세 번을 싸워 패하고서는 정(鄭)으로 도망쳤다.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정공(定公) 4년.- [註 042]
기묘년 : 1579 선조 12년.○午正, 上御宣政殿, 進講《春秋》 定公自 ‘杞伯成卒于會, 止《春秋》之情見矣。’ 講至 ‘許遷於容城’, 金睟 【居官處事, 雖似縝密, 而行己處心, 太無疎淡氣象。】 曰: "許今書遷四處, 爲楚所侵。 不能修德自强, 欲遷國有何益乎? 書遷爲後鑑也。" 李𥕏 【氣質純謹, 處心公直, 自在布衣, 著名儕輩, 爲公議所薦, 補王子師傅, 及登桂籍, 顯揚淸列。】 曰: "囊瓦出奔鄭國, 君不能擇將, 至於如此, 人君用人之誤, 可以鑑矣。" 上問左右曰: "六鎭之事, 何以爲之? 如有所懷, 宜各陳之。 予意未知所爲, 恐不得保守也。 今人皆曰, ‘邊方枝葉也,’ 此甚不然。 祖宗興王之地, 當與國相爲終始可矣。" 崔滉 【性本躁妄, 有驕傲悻悻之氣。 論議怪激, 設心巧詐, 人如見其肺肝, 亦何益之有哉?】 曰: "北方之事, 孰謂歇後乎? 小臣, 己卯年爲暗行御史, 深山窮谷見之, 則民家十無一二。 其時臣陳疏有莫保朝夕之語矣。" 柳永立 【才器駑下, 別無幹局, 麤鄙一庸夫耳。 前守鍾城江灘之戰, 我軍死亡之數, 不以實聞, 已負欺罔之罪。 及居喉舌, 咫尺天顔, 又不直達, 面慢君父, 仍被劾論, 其人無狀, 此爲可見。 他尙何說?】 曰: "臣屢見北道, 淮陽有鐵嶺, 嶺後漸下。 慶興尤卑下, 而風起則不得已着狗衣, 乃可禦寒, 其風氣之猛可知矣。 下雪則擁塞門戶, 必掃除然後乃開門戶。 近來年運比歲凶荒, 木端僅受斗米, 精兵多入, 糧餉甚難。 當初事變之起, 只率土兵而可禦, 今雖零賊出沒, 非如賊勢方張之日。 不可爲此, 每入精兵。" 睟曰: "名雖精兵, 風土相殊, 赴防北道, 技能各異, 雖有銳氣, 難於適用。" 上曰: "或代身入送云, 如此而能爲國事乎? 連歲凶荒, 國運殊常矣。" 睟曰: "慶興之凶饉尤甚。 雖欲屯田, 必豐穰乃可儲峙, 無草馬餒, 無粒人飢。 若胡地年豐, 則可轉賣而食, 而胡地亦荒云, 尤可悶也。"
- 【태백산사고본】 10책 19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418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인물(人物) / 군사-군정(軍政) / 군사-부방(赴防) / 군사-병참(兵站) / 구휼(救恤)
- [註 0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