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 판서 이이가 숙배하자 인물 등용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누다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이(李珥)가 서울에 들어와 숙배(肅拜)하니 상이 인견하고 위유(慰諭)한 후 전교하기를,
"내가 마치 한 원제(漢元帝)가 임금노릇 할 때와 같이 소인배를 물리쳐 멀리 하지 못하여 나라가 거의 망해가고 있다."
하니, 이이가 대답하기를,
"박근원(朴謹元)과 송응개(宋應漑)는 본디 간사한 사람들이지만 허봉(許篈)은 나이 젊어 경망할 뿐 간사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의 재주가 아깝습니다. 그들 3인이 너무 중한 견책을 받아 동죄(同罪)의 사람들이 모두 불안해 하고 있으니 관대한 법을 따르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내 뜻이 이미 정해졌으니 경은 말할 것이 없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비하건대 10명이 도둑질을 했는데 그중 3명만이 중죄를 받고 나머지 7명은 버젓이 사모(紗帽)를 쓰고 공무에 종사한다면 이는 왕정(王政)으로 보아 편파적인 일입니다. 또 그 사람들을 전리(田里)에 내보낸다고 하여도 그들이 어떻게 다시 조정을 탁란(濁亂)하겠습니까? 그리고 죄목이 같은 사람들로서 지금 3인만이 죄를 받고 있는데도 뉘 하나 그들과 함께 죄 받기를 원하는 자가 없으니 의기(義氣)가 없음을 알 만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때는 한 사람도 이의를 제기한 자가 없었는데 나는 이렇게까지 도사리고 있을 줄은 몰랐다. 가령 송(宋)의 정강(靖康)·덕우(德祐) 때와 같은 화064) 가 있을지라도 반드시 한 사람도 의(義)에 죽는 자가 없을 것이니 그게 한탄스러운 일이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지금은 권간(權奸)이 당조(當朝)했을 때와는 달라서 만약 ‘도사린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불가합니다. 한 때 사류(士類)로 자처한 자들의 논의가 모두 같았던 것은 바로 식견(識見)이 없어서 그랬던 것입니다. 저들 자신이 사류로 자처했기 때문에 성혼(成渾)까지도 대단찮게 여겼던 것이니, 사류가 한 짓이 어찌 그와 같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간사하다고 한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간사한 사람이란 반드시 임금의 의중을 헤아려 교묘하게 맞추는 것인데 저들은 주상이 뜻을 돌리지 아니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오히려 자기들 주장을 고집하고 있으니 간사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체로 지금 서(西)를 옳다고 하는 자라고 하여 그가 다 군자(君子)인 것도 아니요 동(東)을 옳다고 하는 자라고 하여 반드시 모두 소인(小人)인 것도 아니어서, 지금 구별하여 쓰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옛부터 신하된 자로서 임금의 신임을 얻고 도(道)를 행하려면 반드시 한집안의 부자(父子) 사이 같아서 참소하는 말이 이간질을 할 수 없어야만 무엇인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근래 나이 젊은 무리들이 30여 년이나 조권(朝權)을 잡아왔는데, 사물의 이치는 극에 달하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오는 법이어서 지금은 주상이 모든 것을 잡으실 때입니다. 다만 관직이 높은 자가 시론(時論)을 주장하고 보면 권간의 혐의가 있고 또 비부(鄙夫)들은 나이 젊은 무리들에게 붙어 그것을 매작(媒爵)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여 그것이 정(政)이 아래로 돌아가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반드시 중망(重望)이 있고 물론을 진정시킬 만한 인재를 얻어야만 조정을 맡길 수 있을 것인데, 그러한 인재를 얻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신은 인심을 얻지 못하였고 또 저들이 틀림없이 심복도 아니할 것입니다. 성혼이 만약 올라온다면 잘잘못을 서로 도와서 나갈 수 있겠지만 그 사람을 오게 하기가 어디 그리 쉽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제 경이 있으니 내 마땅히 모든 것을 맡기겠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지금 인재가 적고 문사(文士) 중에는 쓸 만한 인물을 얻기가 더욱 어렵습니다. 정여립(鄭汝立)이 많이 배웠고 재주가 있는데 남을 업신여기는 병통이 비록 있기는 하지만 대현(大賢) 이하로서야 전혀 병통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가 실로 쓸만한 인물인데 매번 의망(擬望)을 하여도 낙점(落點)을 않으시니 혹시 무슨 참간(讒間)의 말이라도 있는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립은 그를 칭찬하는 자도 없지만 헐뜯는 자도 없으니 어디 쓸 만한 자라고 하겠는가. 대체로 인재 등용에 있어서는 그 이름만 취하는 것은 옳지 않고 시험삼아 써본 뒤에야 알 수 있다."
하였다. 이이가 또 정구(鄭逑)가 쓸 만하다고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불러도 오지 않는 그를 어떻게 할 것인가. 천천히 다시 불러보겠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대체로 특소(特召)를 하면 주상의 뜻을 받들어 감당하기가 벅차서 오지 않는데 바로 성혼이 오지 않는 경우가 그것입니다. 성혼이 전번에는 벼슬할 뜻이 전혀 없어 마치 서얼로 관직에 임명된 자처럼 한사코 직에 나아가지 않더니 지금은 그전같이 그렇게 굳게 뜻이 정해져 있지는 않아 벼슬하고 싶은 뜻이 조금은 있는 것입니다. 다만 성혼이 지병이 있어 비록 오더라도 직사를 제대로 수행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만약 한관(閒官)에 참찬관을 겸한다거나 혹은 가선으로 특진관(特進官)이 되어 입시하여 계옥(啓沃)하게 하면 도움 됨이 있을 것입니다. 관작을 어찌 아끼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우옹(金宇顒)은 어떠한 인물인가?"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착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있으나 시비(是非)가 분명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한인(韓戭)은 바로 미치광이 같은 사람으로서 그가 한 짓은 본시 죄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를 죽이기까지 한다면 이는 지나친 일입니다. 무군 부도(無君不道)라는 죄명으로 승복하도록 문초하고 있기 때문에 한인이 불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인이 만약 나를 임금으로 생각했다면 감히 그러한 일을 했겠는가? 그것이 임금을 무시한 것이고, 거짓 전례(前例)를 핑계대어 제 속셈을 실행하였으니 이는 바로 간사한 인물이지 미친 사람이 아닌 것이다. 박근원(朴謹元)이 위아래를 옹폐(壅蔽)하였으니, 그가 조고(趙高)와 같은 자라면 한인은 바로 이사(李斯) 같은 자이다."
하였다. 이이가 아뢰기를,
"정원(政院)이 몽준(蒙准)을 핑계로 소장(疏章)을 즉시 바치지 않고 있었으므로 박근원 역시 구례(舊例)를 빙자하여 중간에서 막았던 것입니다. 만약 그 예를 혁파하지 않으면 근원이 했던 일이 후일에도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화평론(和平論)을 주장하는 자들은 전일 삼사(三司)의 사람들을 다 써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신의 생각에는 조정은 한 조정인데 만약 그 사람들을 모두 쓴다면 논의가 여러 갈래로 갈라져 끝내 귀일(歸一)되는 때가 없을 것이니 모두를 다시 기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9책 17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408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왕실-국왕(國王) / 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
- [註 064]정강(靖康)·덕우(德祐) 때와 같은 화 : 임금의 외적(外敵)에게 붙잡혀가는 화를 말함. 북송의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은 금군(金軍)에게 잡혀갔으며, 남송의 공제(恭帝)는 원병(元兵)에게 북으로 잡혀갔음. 《송사(宋史)》 권23·47. 정강은 송 흠종(宋欽宗)의 연호. 덕우는 남송 공제(南宋恭帝)의 연호.
○庚午/吏曹判書李珥入京肅拜。 上引見慰諭後, 傳曰: "予如漢 元帝之爲君, 不能斥遠小人, 國幾亡矣。" 珥對曰: "朴謹元、宋應漑固邪人也, 許篈則年少輕亡, 而非邪人也。 其才華可惜也。 此三人得譴太重, 同罪之人, 皆不自安, 須從寬典。" 上曰: "予意已定, 卿不須言之也。" 珥曰: "譬如十人作賊, 三人獲重罪, 而七人晏然着紗帽而行公, 於王政亦偏頗也。 且此人等, 雖放歸田里, 豈能更爲濁亂朝政乎? 且以同罪之人, 三人獨得罪, 而無一人願與之同受其罪者, 可見其無義氣也。" 上曰: "予不知其盤據如此也。 當其時無一人立異者, 假有如宋 靖康ㆍ德祐之禍, 必無一人死義者, 是可歎也。" 珥曰: "非如權奸當朝之時, 若曰盤據則不可也。 一時自以爲士類者, 其論同然, 是乃無識見而然也。 彼輩自以爲士類, 故雖成渾亦不饒之, 士類所爲豈若是乎? 然以爲奸邪, 則不可也。 奸邪之人, 必探上意而巧中, 彼輩則知上意不回, 而猶然固執, 可知非奸邪也。 大槪今之是西者, 未必皆君子, 是東者, 未必皆小人, 今者分別用之難矣。" 又曰: "自古人臣, 得君行道, 必如家人父子, 讒言不得以間之, 然後可以有爲也。 近來年少之輩, 執朝權三十餘年, 物極則反, 今當摠攬于上之時也。 但官高者若主時論, 則嫌於權奸, 又其鄙夫, 則反附於年少之輩, 以爲媒爵之計, 此所以政歸於下也。 必得重望鎭物者, 然後可付朝政, 而得其人難矣。 臣不得人心, 且彼輩必不心服。 成渾若上來, 則可以可否相濟, 而此人豈能易致乎?" 上曰: "旣有卿矣, 予當委任之。" 珥曰: "當今人才渺然, 文士中可用之人, 尤爲難得。 鄭汝立博學有才, 雖有凌厲之病, 大賢以下, 豈有無病痛之人乎? 此實可用之人也, 今者每爲擬望, 而不爲落點, 無乃有讒間之言乎?" 上曰: "汝立固無譽之者, 又無毁之者, 豈其可用者乎? 凡用人不當徒取其名, 而試用之, 然後可知也。" 珥又曰: "鄭逑可用也。" 上曰: "召之而不來, 奈何? 徐當更召之。" 珥曰: "凡特召者, 皆以上旨, 不堪承當而不來, 如成渾之不來是也。 渾前則頓無宦情, 如庶孽者之拜官, 牢不就職, 今則不如前日之堅定, 稍有欲仕之意矣。 但渾有病, 雖來, 必不能供職。 若以閑官兼參贊官, 或以嘉善爲特進官, 入侍啓沃, 則有所裨益也。 官爵何足惜乎?" 上曰: "金宇顒何如人也?" 珥曰: "可謂善人, 而是非不明之人也。" 又曰: "韓戭乃狂疾之人也, 其所爲之事, 固有罪。 然至於置之死則過也。 以無君不道爲罪名, 而責其招伏, 此戭之所以不伏也。" 上曰: "戭若以我爲有, 則敢爲如此之事乎? 是無君也, 假托前例, 而實行胸臆, 乃奸人而非狂疾之人也。 朴謹元壅蔽上下, 是猶趙高, 而戭則猶李斯也。" 珥曰: "政院托以蒙準, 不爲卽納疏章, 朴謹元亦是依憑舊例, 而阻當之也。 若不破此例, 則後日亦有謹元之所爲也。" 又曰: "主和平之論者, 或以爲前日三司之人, 皆可用也, 臣意朝廷一朝廷也, 若竝用此等人, 則議論多岐, 終無歸一之時, 不可盡爲復用也。"
- 【태백산사고본】 9책 17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408면
- 【분류】인사-임면(任免) / 왕실-국왕(國王) / 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