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 처사 성운의 졸기와 남명의 평
대곡 처사(大谷處士) 성운(成運)이 졸하였다.
타고난 자품이 순수하고 아름다운데다가 학문을 닦아서 수양함에 도(道)가 있어 덕기(德器)가 일찍 성취되었으므로 안으로는 엄숙 정직했고 밖으로는 평탄 화평하였다. 평생 동안 세상을 놀라게 하거나 시속에서 빼어난 행동을 하려 들지 않고 세인과 뒤섞여 지내면서 남이 알까 염려하였으며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항상 부족하게 여겼기 때문에, 야박한 시속에서 살았어도 그에게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남명 선생(南冥先生)020) 과 친교가 있었는데 남명이 말하기를,
"성운은 속에 빛을 머금고 있는 정련된 금이나 아름다운 옥과 같아서 내가 미치지 못한다."
하였다. 젊어서 과거 공부에 종사하였는데, 문장을 지을 때는 반드시 전모(典謨)021) 를 본받고 세속의 과장(科場)에서 쓰는 말을 익히기를 부끄러워했다. 중묘조에 대신의 천거로 사직 참봉(社稷參奉)을 제수하였으나 병을 칭탁하여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만년에 세변(世變)을 목격하고는 인간사에 뜻이 없어 산림 속으로 종적을 감추고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으므로 조야가 그를 숨은 덕이 있는 군자로 지목하였다. 명묘조에 광릉 참봉(光陵參奉)을 제수하자 사은하고 직에 나아갔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서 다시 사직하고 옛산으로 돌아갔다. 그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육행(六行)022) 을 구비하였다는 것으로 높이 발탁되어 탑전에서 면대할 때, 나라 다스리는 방도를 물으려 하자 병을 핑계대고 쉬게 해달라고 하며 면대하려 들지 않았다. 누차 제수하는 명을 받았으나 소장(疏章)을 올려 사양하는 뜻을 밝히고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은명(恩命)을 받을 때마다 언제나 놀라고 두려워하며 며칠이 지나도 풀지 못했다. 학문하는 데는 공경에 근본을 두고 실천을 우선하였으며 용모를 장중하게 하고 기거 동작은 반드시 공순하게 하여 마치 신명을 대하듯 엄숙하였으므로 아무도 없는 곳에서 홀로 있을지라도 자제나 집안 사람들이 그의 나태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제자 중에 자기도 모르게 객쩍은 생각이 함부로 생긴다고 걱정하는 자가 있으면 교훈하기를,
"이는 공경심을 갖는 공부가 독실하지 못해서이다. 만일 평소에 꾸준히 공경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되어 객쩍은 사념(邪念)이 용납되지 못하고 망상(忘想)이 생겨날 데가 없게 될 것이다. 사람이 행해야 할 일을 외면하고 오묘한 성명(性命)만을 담론할 것 같으면 자기를 위하는 학문이 되지 않는다."
하였다. 그가 힘을 들여 공부하는 것은 항상 인사(人事)에 주력하는 것이 많아서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데서부터 평범한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도 실천에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이 없었다. 남명은 젊었을 때부터 재기가 뛰어나서 그 의논이 자못 지나치게 고허(高虛)하였는데 선생이 독실하게 행하는 것이 평실(平實)한 것을 보고 석연하게 깨달아 기뻐하며 ‘도는 여기에 있다.’고 말하였다. 만년에는 그 조예가 더욱 깊어져서 언어와 행동에 규각이 없이 혼연하여, 사람들이 선생을 접할 때 안색이 겸손하고 언사가 온화한 것만 보고도 저절로 심취되어 감복하였다. 외물에 기호하는 것이 없었고 집이 매우 청빈하였으나 태연자약하였다. 아름다운 산수를 좋아하여 일찍이 속리산(俗離山) 기슭에 서실 한 간을 지어 봄·가을의 좋은 계절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산속을 소요하였으며 시도 짓고 술잔도 들며 마음 내키는 대로 지냈다. 나이 80인데도 뜻이 쇠하지 않아 장경(莊敬)함이 날로 더해서 사람들은 모두 선생을 우러러보며 도맥(道脈)의 장수(長壽)라고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14권 8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363면
- 【분류】인물(人物)
- [註 020]남명 선생(南冥先生) : 조식(曺植).
- [註 021]
전모(典謨) : 《서경(書經)》의 이전(二典)·이모(二謨).- [註 022]
육행(六行) : 경명(經明)·행수(行修)·순정(純正)·근근(勤謹)·노성(老成)·온화(溫和) 등 여섯 가지 행실.○大谷處士成運卒。 天資粹美, 加以學問, 充養有道, 德器夙成。 內則方嚴而正直, 外實坦夷而和平。 平生不肯作驚世絶俗之行, 混跡同塵, 惟恐人知, 自視毁然。 常若不足, 以此難處薄俗, 人不能以惡言加之。 與南冥先生友, 南㝠語人曰: "成運如精金美王, 含光內薀, 吾所不及也。 少從事擧子業, 爲文章, 必法典謨, 恥習世俗科場語。 中廟朝, 用大臣薦, 除社稷參奉, 辭疾不起。 晩覩世變, 無意人間事, 晦迹山林, 不求聞達, 而朝野屬目, 皆知其爲隱德君子也。 明廟朝, 拜光陵參奉, 謝恩就職, 不數日辭歸故山。 其後擧遺逸, 以六行俱備, 擢置前列, 面對前殿, 訪以治道, 以病丐休, 不肯登對。 屢受除命, 上章陳謝, 終不屈。 每得恩命, 輒惕然驚惶, 至數日不能解爲擧。 以居敬爲本, 以踐履爲先, 容貌必莊, 居處必恭, 嚴然肅然, 如對神明。 雖在暗室幽獨之中, 家人子弟未嘗見其隋容。 學者有患, 客念妄起者, 諭之曰: "是由持敬之功不篤耳。 若持敬有素, 則此心靜然凝定。 客邪不容, 而妄想無自而生矣。 以若外人事而談性命, 非爲己之學也。" 其工夫着力, 常於人事上居多。 自事親敬長, 以至日用尋常, 無一不自踐履中來也。 南冥少時, 才氣超邁, 議論頗過高虛, 見先生篤行平實, 釋然喜曰: ‘道在是矣。’ 晩來造詣益深, 圭角渾然, 人與之接, 但見顔色謙恭, 辭氣和易, 而不自覺心醉而誠服也。 於外物無所好, 家甚淸貧, 晏如也。 雅好佳山水, 嘗於離山之麓, 築書室一間, 春秋令節, 遊歷無虛日。 或賦詩, 或行酌, 惟意所適。 行年八十, 意思不衰, 莊敬日强, 人皆仰之, 以爲道脈之壽也。
- 【태백산사고본】 8책 14권 8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363면
- 【분류】인물(人物)
- [註 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