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강에 《춘추》를 강하고, 이산해가 전장과 산업의 영위는 권간의 일임을 아뢰다
상참은 정지하고 조강이 있었다. 상이 사정전에서 연 조강에 나아갔다. 《춘추》를 강하였다. 대사간 김첨경(金添慶)이 아뢰기를,
"조종조에서 매일 상참과 조참을 행한 것은 정사를 지극히 부지런히 하신 훌륭한 고사입니다. 근래에는 상참이 없어서 소관(小官)이 전혀 천안(天顔)을 뵙지 못하며 심지어 왜인(倭人)·야인(野人)도 입시(入侍)하지 못하였으니, 그들이 제 나라로 돌아가서 무슨 말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문(禮文)에 있는가? 있다면 하는 것이 마땅하다. 봄철에는 일이 많았고 지난번에는 피전(避殿)도 하였지만 지금은 날씨가 더우니 수시로 해야 한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근래 사습(士習)에 대하여 사대부 사이에 의논이 분분합니다. 부자가 된 후에야 선(善)을 행할 수 있다 하며 명사(名士)라는 사람들도 모두 재산 늘릴 것만 생각하여 노전(蘆田)과 해택(海澤)을 가지지 않은 사람이 없으며 진전(陳田)까지도 제방을 쌓거나 개펄을 파내는데 회문(回文)을 돌려 협동 작업을 하자는 자도 있으니 이는 그 마음가짐이 매우 밝지 못한 것입니다. 먼저 마음을 잃고서 뒤에 선을 행한다는 말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상께서는 다시 신칙하고 격려하시어 이러한 폐습을 근절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상의 이목이 있으니, 한두 사람을 탄핵해서라도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또 이르기를,
"부자가 된 뒤에 선을 행한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인데 이 말이 어디에서 나왔는가?"
하였는데, 김첨경이 아뢰기를,
"일정한 산업이 없으면 본심을 지킬 수 없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은 백성을 기르는 방법이지, 사대부가 자처(自處)할 도리는 아니다."
하였다. 이산해(李山海)가 아뢰기를,
"조종조에서는 조금이라도 산업을 경영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탄핵했기 때문에 벼슬하는 사람은 일체 이러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중국의 조관(朝官)은 벼슬길에 나온 뒤에는 집을 새로 짓지 않고 모두 빌어서 거주한다 하는데 이 말이 사실인가?"
하니, 산해가 아뢰기를,
"중국의 경우는 알 수 없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벼슬한 뒤에는 가업(家業)을 경영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권징이 아뢰기를,
"전장(田莊)이나 늘이고 산업을 영위하는 등의 일은 전일 권세를 휘두르던 간신들이 한 일이지 지금에야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이이(李珥) 같은 사람은 살고 있던 가옥도 팔고 갔습니다. 근일 붕우 사이에는 서로 믿고 벼슬하는 것을 즐거워하는 도리가 없어져서 지난날 홍혼(洪渾)의 처자는 상수리를 주워 먹었습니다. 신이 보니 김계휘(金繼輝)도 고부(古阜)에 있을 때 그 처자가 의지할 곳이 없었고 홍섬(洪暹)이 소신의 집 옆에 살았는데 전혀 가산을 영위하는 일이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와 같이 하면 사습도 역시 아름답게 될 것이다. 임금은 충신한 사람에게 후한 녹봉을 주므로 지사(志士)는 구렁에서 죽을 것도 돌아보지 않는다고 하였다. 박팽년(朴彭年)이 세마지기 밭을 사들였는데, 그 친구가 ‘녹만으로도 농사의 수확을 충분히 대신할 수 있다.’ 하자, 팽년이 즉시 그 밭을 팔아버렸다고 하였다. 대간은 임금 앞에서 탄핵할 때에 범연하게 아뢰어서는 안 된다."
하였는데, 성낙(成洛)이 아뢰기를,
"비록 탄핵하지 않더라도 이러한 논의를 들으면 필시 스스로 부끄러워서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김수(金睟)가 또 아뢰기를,
"이이의 일은 전에 아뢰려고 하다가 감히 아뢰지 못하였으나 지금 이미 언급이 된 터이라 감히 아룁니다. 그 사람이 벼슬사는 것을 즐겁게 여기지 않아 병을 핑계대고 물러난 후에 의식이 매우 어려워서 처가쪽의 집까지도 팔았습니다. 당초에 봉가(奉家)와 해택(海澤)을 가지고 다툴 때에 비록 이이의 이름으로 소장을 올렸지만 실은 그의 형 이번(李璠)이 한 일인데 봉가에서는 이이가 사주한 것이라고 의심합니다. 이이가 그 형을 막지 못하였으니 허물을 받아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설사 형이 그런 일을 하더다도 형을 의리로 설득시켜 제지하였어야 할 것인데 어찌 이와 같은 일을 하였단 말인가. 빼앗고 안 빼앗은 것은 내가 알지 못하겠지만 시골에 있을 때는 부유하게 살았다고들 한다."
하였는데, 김수가 아뢰기를,
"당초의 처지가 소홀하기는 하였지만 남의 토지를 뺏은 일은 없었습니다."
하였다. 우승지 권징(權徵)에게 전교하기를,
"전 전생서 주부 정순희의 딸과 승훈랑 홍여겸의 딸을 숙의로 결정하여 명호(名號)까지 정하였다. 후궁이 된 사람이 여염에 있을 수 없으니, 정씨는 어의동(於義洞)에 있는 궁으로 홍씨는 봉상시동(奉常寺洞)에 있는 궁으로 민씨는 수진방(水眞坊)에 있는 궁으로 각각 명일에 옮길 것을 예조에 이르라."
하였다.
이미 중궁이 있는데 또 숙의를 두는 것은 후사(後嗣)를 넓히는 것이다. 다만 우리 나라는 혼례가 엄하지 못하여 사대부집 처녀들을 궁중에 모아놓고 간택하되 그 중에서 적합한 자를 보아서 결정하는 것이니 이는 남녀의 교제를 신중히 하고 혼인의 예절을 존중하는 것이다. 그런데 선왕 때부터 정해진 예가 없고, 예관(禮官)도 아직까지 혼례를 강구하지 않는다. 숙의 선택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대혼(大婚)의 예도 그러하여 근심하고 진지할 의의가 전혀 없으니, 예문의 결여된 곳이 이와 같이 많다.
선비로서 가산을 경영하는 것은 비루한 일이므로 의논할 것이 못된다. 다만 지나치게 심한 자가 있으면 분명하게 적발해서 논핵하려 하고 그렇지 못한 바에는 차라리 논하지 않는 것이 낫다. 어찌 애매하게 지적하는가. 사대부가 가산을 경영하는 것을 사류의 병통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온 조정의 사대부가 모두 모리만하는 비부(鄙夫)가 될 것이니, 임금으로 하여금 마음속에 의혹이 쌓여 모든 사람을 다 똑같이 보아 사대부란 모두 모리만하고 염치없는 좋지 못한 사람이라도 여기게 할 것이다. 그러니 군상이 선비를 가볍게 보는 마음을 열어주어 후일 사대부의 말도 믿지 않고 계책도 받아들이지 않게 하는 것이 지금 어떤 애매모호한 그릇된 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딱하다. 처음 발설한 자가 어떻게 그 죄를 면하겠는가.
- 【태백산사고본】 8책 14권 4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361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경연(經筵) / 왕실-비빈(妃嬪) / 외교-왜(倭) / 외교-야(野) / 사법-탄핵(彈劾) / 농업-전제(田制) / 농업-경영형태(經營形態) / 역사-사학(史學)
○停常參, 有朝講。 上御朝講于思政殿, 講《春秋》。 大司諫金添慶啓曰: "祖宗朝, 逐日常參、 朝參, 勤政之至也。 近無常參, 小官專不見天顔。 至於倭野人, 亦未得入侍, 恐歸其國有言也。" 上曰: "禮文有之乎? 有則爲之當也。 春初多事, 頃緣避殿。 今則暑熱, 當隨爲之。" 又啓曰: "近來士習, 爲士大夫間有議論, 富而後爲善, 雖名士, 皆以營産爲計。 蘆田海澤, 無不(旨)〔自〕 持。 至於陳田, 或防築掘浦, 出回文, 共力爲之者有之。 此乃心術不明, 不可之大者。 先失其心, 而後爲善, 臣未之知也。 自上更加勑勵之道, 以絶此習也。" 上曰: "耳目有寄, 雖(殫)〔彈〕 一二人, 亦不可不懲也。" 又曰: "富而後爲善, 無理之言也。 此出何處?" 添慶曰: "無恒産, 無恒心。" 上曰: "此言養民之道, 非士大夫自處之道也。" 李山海曰: "祖宗朝, 少有營産之人, 必加(殫)〔彈〕 劾, 爲仕者一切不爲矣。" 上曰: "中原朝官, 仕後不作家, 皆借寓云。 其言是耶?" 山海曰: "中原未知我 國仕後, 則家業不營也。" 權徵啓曰: "田莊營産等事, 昔權奸爲之。 今豈有如此事乎? 若李珥, 亦賣家舍去矣。 近日朋友間, 無相信樂仕之道。 頃者洪渾妻子亦拾橡實爲食矣。 臣見金繼輝亦在古阜, 妻子無依; 洪暹在小臣家邊, 專無營産。" 上曰: "如此, 則士習亦佳矣。 人君忠信重祿, 志士不忘在溝壑, 朴彭年買得三斗田, 其友曰: ‘祿足以代其耕。’ 彭年卽賣棄之。 爲臺諫者, 當(殫)〔彈〕 劾君前, 泛然啓之, 不可也。" 成洛曰: "雖不(殫)〔彈〕 劾, 若聞此等議論, 必將羞恥而不爲矣。" 金睟又啓曰: "李珥事, 前欲啓之而不敢。 今因言及敢啓。 其人不樂仕, 病退後, 衣食爲難。 其妻邊家舍, 亦賣之矣。 當初奉家海澤相爭事, 雖以李珥名呈疏, 而其兄李璠爲之。 奉家疑李珥指囑, 珥旣不得救其兄, 宜受此咎。" 上曰: "設使同生爲之, 當以義理, 喩而救止之, 豈爲如此事乎? 其奪不奪, 予未知, 在鄕時富居云。" 睟曰: "其初處置, 踈脫則有之。 奪人土地, 則無矣。" 傳于右承旨權徵曰: "前典牲署主簿鄭純禧女子, 承訓郞洪汝謙女子, 定爲淑儀, 名號已定, 後宮之人, 不可在於閭閻之中。 鄭氏 於義洞宮、 洪氏奉常寺洞宮、閔氏 水眞坊宮, 各於明日移寓事, 言于禮曹。"
旣(正)〔定〕 中宮, 又設淑儀, 所以廣繼嗣也。 但我 國婚禮不嚴, 士大夫處女, 聚會簡擇于宮中, 視其可者而定之。 凡所以愼男女之際, 而重婚姻之禮也。 自先王未有定禮, 禮官亦未之講究, 非徒淑儀, 至於大婚之禮, 亦然。 其無謹摯之義。 甚矣, 禮文之多闕也如是。
士而營産者, 鄙哉, 何足與議也: 但有太甚者, 分明摘發論劾可也。 如其不然, 則雖置而不論可也。 乃何糊塗泛指, 士大夫之非以營産, 爲士類之詬病, 是擧朝之士大夫, 皆爲謀利之一鄙夫, 使君心蓄疑於中, 而等視之曰: "此皆謀利無廉恥不吉之人。" 則適足以啓君上輕士之心, 而他日之言不信、計不用者, 未必非此說爲之誤也。 吁: 始作俑者, 烏得辭其罪乎?
- 【태백산사고본】 8책 14권 4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36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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