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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11권, 선조 10년 5월 11일 무술 2번째기사 1577년 명 만력(萬曆) 5년

허봉이 대원군묘를 가묘라 한 데 대해 의문을 제기하자 그로 인해 논란하다

허봉이 나아가 아뢰기를,

"명칭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하지 못하게 되어 백성이 손발을 둘 데가 없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대원군묘(大院君廟)를 일컬어 가묘(家廟)라고 하는데 이것이 무슨 명칭입니까? 국가에 어찌 가묘가 있을 수 있습니까? 단지 대원군묘라고 하든지 사친묘(私親廟)라고 하든지 해야 합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안빈(安嬪)을 아조(我祖)라고 일컬으시는데 이는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비록 대원군이 계시더라도 적(嫡)에 압존(壓尊)되어 감히 어머니를 어머니라고 부를 수가 없는 것인데 더구나 전하께서는 대통(大統)을 입승(入承)하셨으니 어떻게 감히 아조라고 일컬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대원군은 제후(諸侯)의 별자(別子)로 백세의 불천묘(不遷廟)가 되지마는 안빈은 첩모(妾母)이므로 다만 사실(私室)에서 제사하는 것이 합당한 것이지, 시조묘(始祖廟)에는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수전(秀荃)을 명령(螟蛉)에 견주시었는데 그 또한 잘못입니다. 전사(前史)에서 송 명제(宋明帝)의 갓난아이를 명령이라 했는데,018) 이는 남의 아들을 취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일컬은 것입니다. 만일 동종(同宗)이라면 아무리 소원한 족속이라도 일체인 것인데 어떻게 명령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김우옹은 아뢰기를,

"이 몇 가지 일에 대해 전하께서는 당초에 깊이 생각하지 않고 범연히 칭호하였습니다. 예문(禮文)에 대해서는 신이 우매하여 널리 고증할 수가 없습니다만 허봉의 말이 대체적으로 이치가 있습니다."

하니, 상이 성난 목소리로 이르기를,

"허봉이 감히 홀로 허다한 이야기를 하였는데 옛사람도 말을 가지고 뜻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했다. 안빈(安嬪)은 조모(祖母)이니 아조(我祖)라 한다 해서 해될 것이 무엇인가? 가묘 또한 무엇이 해롭단 말인가? 수전을 명령이라 한 것은 친자(親子)가 아니기 때문에 한 말인데 또한 무엇이 그리 해롭단 말인가? 감히 말을 따져가며 멋대로 의논을 제기하고 나서니 나는 무슨 뜻을 품고 그러는지를 모르겠다."

하였는데, 좌상 홍섬(洪暹)이 아뢰기를,

"연소한 사람이라서 옛글만 읽었을 뿐 일을 경험하지 않아서 정도에 지나친 의논을 제기한 것이니, 상께서는 모두 포용하시어 마음속으로만 정도에 지나치게 여기셔야지 이와 같이 꺾어 눌러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하신다면 모두들 감히 품은 생각을 진달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허봉이 물러갔다. 김우옹이 아뢰기를,

"지금 조정에서는 백관이 서로 겸양하면서 힘을 합하여 직무에 충실하려는 기풍(氣風)을 볼 수가 없으니 국가의 일에 마음을 바쳐 생령들을 구제하려는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백성들은 고통에 시달려 살아갈 길이 없는 실정입니다. 신이 향리(鄕里)에 있으면서 흙더미가 무너지듯 할 형세를 눈으로 직접 보았는데 지금 계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신은 쉴 곳을 모르게 될 것 같습니다. 전하께서는 구중 궁궐에 깊이 계시니 이와 같은 실정을 어떻게 아실 수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조종(祖宗)이 어렵게 이룩한 대업(大業)을 이어받으시었는데 이를 잘 증대시키지 않고 도리어 무너뜨리니 어찌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이제 천변(天變)이 위에서 일어나고 지변(地變)이 아래에서 일어나 난망(亂亡)의 조짐이 아닌 것이 없는데 여역까지 크게 치성하여 요절한 백성이 10만여 명이나 되는가 하면 이에 대한 장계가 사방에서 올라오고 도성도 극심한 형편이니 지금이 어떤 때입니까? 전하께서 주야로 걱정하시는 마음을 잠시도 그만두지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만,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이 있으면 마땅히 백성을 근심하는 데 대한 조처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전하께서 급히 애통해 하는 교서(敎書)를 내리시고 대신과 근신에게 계책을 자문하여 백성을 구제하기 위한 대책을 마련해야 할 것이요, 평시처럼 일없이 편안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편안히 있으면 아랫사람들이 어떻게 전하의 마음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김우옹이 이어 아뢰기를,

"신은 질병 때문에 직무에 힘쓰는 일은 감당하지 못한다는 뜻을 전에 이미 다 아뢰었습니다. 근래 조정에 폐습(弊習)이 있는데 질병 때문에 임무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도 반드시 예에 따라 주의(注擬)하고 있고, 상께서도 감당하지 못한 것을 알면서도 예에 따라 낙점(落點)하면서 이것을 정사(政事)019) 하는 체통에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된 사람의 처지에 보면 명령을 받들고 분주(奔走)하면서 신하의 직분을 다하려다가 도로에 전부(顚仆)되어 운명하게 될 두려움도 있는 것입니다. 비록 조정에 나아간다 하더라도 일을 감당하지 못할 것인데 역로(驛路)만 수고롭히면서 부질없이 왕래하게 됩니다. 혹 병이 심하여 올라오지 못할 경우에는, 임금의 명령이 문에 이르렀는데도 편안히 앉아 있는 것이 신하의 의리에 있어 어찌 스스로 편안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어 낭패스럽고 군박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옛부터 신하의 대우를 이와 같이 한 때가 어디 있었습니까?

내직을 담당할 수 없는 자는 외직에 보임하기도 하고 외직도 감당할 수 없으면 편안히 지낼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송(宋)나라 때는 물러가 쉬는 신하에게 집에 있으면서 봉사(奉祀)하게 하였었는데020) 이 또한 한 가지 방편인 것입니다.

신은 성품이 우졸(愚拙)하여 잘하는 일이 없고 단지 글을 읽어 대강의 뜻만을 알 뿐인데 지금은 또 병 때문에 학문을 폐하고 있어 아무일도 할 수가 없는 형편이니 시골에 거처하면서 조섭하기에나 합당할 뿐입니다. 그런데 신이 향리에 있으면서 보니 향교(鄕校)의 폐이(廢弛)가 더욱 극심했습니다. 이는 훈도(訓導)를 차견(差遣)할 적에 단지 재신(宰臣)의 행하(行下)021) 만 쓰는가 하면 혹 서리(書吏)에게 뇌물을 주고 임명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들이 교도(敎導)가 무슨 일인 줄을 어떻게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으로 교도하는 직책이 사람들에게 천시당하게 되었고 식견 있는 사람이 여기에 차임되면 수치로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 폐단을 구제하려면 마땅히 천거하여 공선(公選)한 다음에 차임해야 됩니다. 이렇게 한다고 다 적임자를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사체가 올바르게 되어 어느 정도의 폐단은 구제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지금부터 병 때문에 작산(作散)되어 향리에 거처하는 사람에게는 사관(祠官)의 예(例)와 같이 그 고을의 교관(敎官)으로 삼아 교도하는 일을 주관하게 하는 것이 사의(事宜)에 합당할 것 같습니다. 신이 비록 어리석고 비루하기는 하나 만일 이 책임을 맡기신다면 마땅히 경건한 마음으로 향화(香火)을 받들 것은 물론 교도의 직무를 힘써 수행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세속(世俗)에서 교도하는 관원을 천시하는 풍조를 조금이나마 없앨 수 있다면 또한 도움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병을 조리하면서 분수에 넘친 소명(召命)을 면하게 하여 주신다면 천은(天恩)이 망극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7책 11권 5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346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보건(保健) / 인사-임면(任免)

  • [註 018]
    송 명제(宋明帝)의 갓난아이를 명령이라 했는데, : 송 명제가 이도아(李道兒)의 첩이었던 진씨(陳氏)를 맞이하여 후폐제(後廢帝) 유욱(劉昱)을 낳았으므로 이씨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명령(螟蛉)은 양자를 말하는데 송 명제의 경우에는 성이 다른 사람을 아들로 삼았다는 뜻이다. 《남사(南史)》 권3 명제본기(明帝本紀).
  • [註 019]
    정사(政事) : 인사 행정.
  • [註 020]
    송(宋)나라 때는 물러가 쉬는 신하에게 집에 있으면서 봉사(奉祀)하게 하였었는데 : 노재상(老宰相)으로 정무에 임하기가 곤란한 사람들에게 시골에 내려가 있게 하면서 그 가까운 곳의 궁관(宮觀)에 사관(祀官)으로 임명하여 여기에 봉안된 신을 받들게 하고 녹봉을 주었던 일을 말한다.
  • [註 021]
    행하(行下) : 여기서는 표지(標紙)의 뜻으로, 재상이 지시하는 문서를 가리킨다. 이 외에 위로금의 지급 또는 경사가 있을 때 주인이 하인에게 내려주는 금품의 뜻으로도 쓰인다.

許篈進啓曰: "名不正, 則言不順, 而至於民無措手足。 今者稱大院君廟曰: "家廟" 此何名也? 國家安有家廟, 只令稱大院君廟, 或稱私親廟也。 殿下稱安嬪爲我祖, 甚非也。 雖大院君在, 亦壓於嫡, 而不敢母其母, 況殿下入承大統, 安敢稱祖乎? 且大院君, 以諸侯別子, 爲百世不遷之廟, 安嬪是妾母, 只合祭之私室, 不可入始祖之廟。 且殿下以秀荃, 比之螟蛉, 亦非也。 前史稱宋明帝保字螟蛉, 此是取他子故云。 若同宗, 則雖踈屬, 猶是一體, 安可曰螟蛉乎?" 宇顒啓曰: "此等處, 殿下初不(輕)〔經〕 意, 而泛稱之耳。 至於禮文之事, 臣愚昧不能博考, 然言大槪有理。" 上厲聲曰: "許篈敢獨爲許多說話, 古人云: ‘不以辭害義,’ 安嬪是祖母, 雖曰我祖, 何害? 家廟亦有何妨? 秀荃謂之螟蛉, 言非親子也, 亦何害? 乃敢較計言語, 橫生議論, 予不識其何意也。" 左相洪暹曰: "年少之人, 只讀古書, 不曾經事, 生出過當之論, 自上皆當包容, 只於心裏, 以爲過當而已, 不可摧抑之如此也。 如此, 則恐皆不敢達懷也。" 退, 宇顒啓曰: "今朝廷之上, 不見百僚敬讓, 同寅協恭之風, 盡心國事, 欲濟生靈者爲誰耶? 小民愁苦, 生理無門, 臣在鄕里, 目覩土崩之勢。 今若不爲之計, 臣不知稅駕之所, 殿下深居九重, 豈能眞知如此耶? 殿下承祖宗艱大之業, 不能增大, 而反以壞之, 豈不可懼哉? 今天變作於上, 地變作於下, 無非亂亡之像。 至於癘疫大熾, 生靈夭札, 計以十萬, 而狀啓四至, 都城亦甚, 此何等時也? 殿下宵旰憂勤, 想不敢自弛矣。 然有憂民之心, 則當有憂民之事, 臣謂殿下, 當亟下哀痛之敎, 與大臣近臣, 咨問計畫, 圖爲救民之策, 不當晏然無事, 如平時也, 如此, 則下人安知 殿下之心哉?" 上不答。 宇顒仍啓曰: "臣以廢疾, 不堪陳力之意, 前已盡啓矣。 比來朝廷有弊習, 疾病不堪任事之人, 亦必循例注擬, 自上雖知其不堪, 亦或循例落點, 以是爲政事之體當然也。 然自其人身上計之, 欲承命奔走, 以盡臣子之恭, 恐顚仆道路, 以隕其軀, 雖或造朝, 亦不堪事, 而徒勞驛路, 往來屑屑, 其或以病甚, 不能上道則 君命到門, 晏然安坐, 在臣子之義, 豈敢自安? 進退惟谷, 狼狽窘迫, 自古待臣下, 豈有如此之時乎? 不能乎內者, 或以補外, 外亦不堪, 則亦使之自安。 時退休之臣, 奉祀家居, 此亦一事也。 臣稟性愚拙, 百事不能, 只知掇拾糟粕。 今又以病廢學, 無一事可做, 只合養拙柴門而已。 但臣居鄕, 見鄕校廢弛尤甚, 蓋緣訓導差遣時, 只用宰臣行下, 或賂書吏而爲之。 彼又安知敎導之爲何事乎? 以故敎導之職, 爲人賤惡, 人若得差, 以爲羞辱矣。 若欲救此, 當以薦擧公選差之, 雖未盡得其人, 而其事體得正, 當救得一半矣。 臣愚以爲: ‘今以病作散, 居鄕之人, 如祠官之例, 使爲其邑敎官, 以主敎導之事, 似合事宜。’ 臣雖愚陋若使爲此職, 則當恪奉香火, 黽勉職敎, 或使世俗, 賤惡敎官之風少息, 亦非無補, 以此養疾, 庶免非分之召, 則天恩罔極矣。" 上不答。


  • 【태백산사고본】 7책 11권 5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346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정론-정론(政論) / 보건(保健)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