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효온이 지은 《육신전》을 보고 상이 괴이하게 여겨 토론에 부치다
상이, 경연관이 아뢴 바에 따라 남효온(南孝溫)이 지은 《육신전(六臣傳)》을 가져다 보고 나서 삼공을 불러 전교하기를,
"이제 이른바 《육신전》을 보니 매우 놀랍다. 내가 처음에는 이와 같을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아랫사람이 잘못한 것이려니 여겼었는데, 직접 그 글을 보니 춥지 않은 데도 떨린다.
지난날 우리 광묘(光廟)034) 께서 천명을 받아 중흥(中興)하신 것은 진실로 인력(人力)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데 저 남효온이란 자는 어떤 자이길래 감히 문묵(文墨)을 희롱하여 국가의 일을 드러내어 기록하였단 말인가? 이는 바로 아조(我朝)의 죄인이다. 옛날에 최호(崔浩)는 나라의 일을 드러내어 기록했다는 것으로 주형(誅刑)을 당하였으니,035) 이 사람이 살아 있다면 내가 끝까지 추국하여 죄를 다스릴 것이다. 기록된 내용 가운데 노산 군(魯山君)에 대해 언급하면서 신유년036) 에 출생하여 계유년037) 까지 그의 나이가 13세인데도 16세로 기록하였으며, 광묘께서 임신년038) 에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갔었는데 여기에는 부음(訃音)을 가지고 중국에 갔다고 기록하였다. 또 하위지(河緯地)가 계유년에 조복(朝服)을 벗고 선산(善山)으로 물러가 있었는데 광묘께서 즉위하여 교서(敎書)로 불렀기 때문에 왔다고 하였다. 하위지가 갑술년039) 에 집현전(集賢殿)에서 글을 올린 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것이 한둘이 아니다. 그 왜곡되고 허탄함은 진실로 믿을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지만, 가슴아픈 것은 뒷사람들이 어떻게 그 일의 전말(顚末)을 자세히 알 수 있겠는가 하는 점이다. 한번 그 글을 보고 곧 구실(口實)로 삼는다면, 이 글은 사람의 심술(心術)을 해치기에 적당한 것이 될 것이다.
또 한가지 논할 것이 있다. 저 육신(六臣)이 충신인가? 충신이라면 어째서 수선(受禪)하는 날 쾌히 죽지 않았으며, 또 어째서 신발을 신고 떠나가서 서산(西山)에서 고사리를 캐먹지 않았단 말인가?040) 이미 몸을 맡겨 임금으로 섬기고서 또 시해(弑害)하려 했으니 이는 예양(豫讓)이 매우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041) 그런데도 저 육신은 무릎을 꿇고 아조를 섬기다가 필부(匹夫)의 꾀를 도모하여 자객(刺客)의 술책을 부림으로써 만에 하나 요행을 바랐고, 그 일이 실패한 뒤에는 이에 의사(義士)로 자처하였으니, 마음과 행동이 어긋난 것이라고 할 만하다. 그런데 열장부(烈丈夫)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떤 이는 ‘헛되이 죽는 것이 공을 세우는 것만 못하고 목숨을 끊는 것이 덕을 갚는 것만 못하다. 성삼문(成三問) 등은 그 마음에 잠시도 옛 임금을 잊지 않고 있었으므로 아조(我朝)를 섬긴 것은 뒷날의 공을 세우기 위한 것이다.’라고도 하지만, 이는 그렇지 않다. 진실로 공을 이루는 것만을 귀히 여기고 몸을 맡긴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백이(伯夷)·숙제(叔齊)와 삼인(三仁)042) 도 반드시 서로 모의하여 머리를 굽히고 주(周)나라를 섬기면서 흥복(興復)을 도모했을 것이다. 이로써 보건대 이들은 자기 임금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또한 후세에도 모범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이제 드러내서 아울러 논하는 것이다. 더구나 사람은 각기 군주를 위하는 것인데 이들은 아조(我朝)의 불공대천(不共戴天)의 역적이니 이들은 오늘날 신하로서는 차마 볼 것이 아니다. 내가 이 글을 모두 거두어 불태우고 누구든 이에 대해 서로 이야기하는 자가 있으면 그도 중하게 죄를 다스리려 하는데 어떠한가?"
하였다. 회계하기를,
"신들이 삼가 비망기(備忘記)를 보니 놀라와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들이 일찍이 《육신전》에 대해서 경연 석상에서 아뢴 자가 있다는 것을 듣고 마음이 매우 불안하였습니다. 지금 상의 분부가 애통하고 간측한 것은 진실로 천리(天理)에 합당한 일입니다. 다만 이 글의 잘못된 점과 사실에 어긋나는 것이 진실로 성유(聖諭)와 같더라도 여염(閭閻) 사이에 드물게 있는 책이며 또 세월이 오래되어 점차 없어져 가는 끝인데 만약 수색하는 일을 시행한다면 반드시 큰 소란이 일어나서 끝내는 이익됨이 없게 될 것입니다. 또 이 요망스러운 책을 진실로 식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감히 서로 이야기하겠습니까? 이 책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금한다는 법이 일단 내리게 되면 풍속이 각박한 이런 때에 고알(告訐)하는 길이 이로부터 열리게 되고 무고(誣告)하는 폐단도 또한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외의 사람들이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보고 들으면 마땅히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금령(禁令)을 내리지 않아도 저절로 중지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그렇게 말하니 지금 우선은 따른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10권 7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339면
- 【분류】출판-서책(書冊) / 변란-정변(政變)
- [註 034]광묘(光廟) : 세조(世祖).
- [註 035]
최호(崔浩)는 나라의 일을 드러내어 기록했다는 것으로 주형(誅刑)을 당하였으니, : 최호는 후위(後魏) 사람으로 자는 백연(伯淵)인데 학문을 좋아하고 지모가 많았다. 벼슬은 사도(司徒)에까지 이르렀는데 뒤에 《국서(國書)》를 저술하고 비석의 글을 쓰면서 직필(直筆)했다는 것으로 복주(伏誅)되었다. 《북사(北史)》 권21 최호열전(崔浩列傳).- [註 036]
신유년 : 1441 세종 23년.- [註 037]
계유년 : 1453 단종 1년.- [註 038]
임신년 : 1452 문종 2년.- [註 039]
갑술년 : 1454 단종 2년.- [註 040]
서산(西山)에서 고사리를 캐먹지 않았단 말인가? : 어째서 세조(世祖)를 등지고 깊은 산속으로 숨지 않았느냐는 뜻. 서산은 수양산(首陽山)을 말한다. 은(殷)나라 고죽군(孤竹君)의 아들인 백이(伯夷)·숙제(叔齊)가 주 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치자 주(周)나라의 곡식을 먹을 수 없다 하여 수양산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굶어죽었다고 한다.- [註 041]
예양(豫讓)이 매우 부끄럽게 여긴 것이다. : 일단 신하가 되었으면 그 임금을 시해할 수 없다는 뜻. 예양은 전국 시대 진(晉)나라 사람으로 지백(智伯)을 섬겨 총애를 받던 중, 조양자(趙襄子)가 지백을 쳐 섬멸하자 그 원수를 갚기 위해 온갖 일을 다하였다. 그 때 친구가 "그대의 재능으로 조양자를 섬기면서 기회를 보아 시해하면 쉽지 않겠는가?" 하니, 예양이 "섬기면서 시해하라는 것은 두 마음을 품는 것이다.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은 두 마음 품은 자를 부끄럽게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사기(史記)》 권86 자객열전(刺客別傳).- [註 042]
삼인(三仁) : 미자(微子)·비간(比干)·기자(箕子)인데, 모두 은나라 말기의 충신(忠臣)이다. 미자는 멀리 떠났고 기자는 노예가 되었고 비간은 간하다가 죽었다 한다. 《논어(論語)》 권80 미자(微子).○乙酉/上因經筵官所啓, 取南孝溫六臣傳, 觀之。 招三公, 傳曰: "今見所謂六臣傳, 極可驚駭。 予初不料至於如此。 乃爲下人所誤, 目見其書, 不寒而栗。 昔我光廟, 受命中興, 固非人力所致。 彼南孝溫者何人, 敢自竊弄文墨, 暴揚國事。 此乃我朝之罪也。 昔崔浩以暴國史見誅, 此人若在, 予必窮鞫而治之矣。 所錄中語魯山生於辛酉, 至癸酉, 其年十三, 而以十六書之。 光廟壬申, 以謝恩使朝天, 而乃書之曰: ‘持訃使於上國。’ 又曰: ‘河緯地, 於癸酉, 盡賞朝服, 退去善山, 光廟卽位, 敎書致之就召。’ 云。 緯地於甲戌年, 在集賢殿上書, 何耶? 若此之類, 不一而足。 其誕妄不經, 固無足信。 所可痛者, 後人豈能細知其事之首末乎? 一見其書, 便以爲口實, 則此書適足爲壞人心術之物也。 抑又有一論焉。 彼六臣, 忠耶? 否? 如忠耶, 何不快死於受禪之日? 如其不然, 又何不納履而去, 採薇於西山耶? 旣爲委質北面, 又求害之, 是豫讓之所深恥, 而彼六臣者, 屈膝於我朝, 奮匹夫之謀, 逞刺客之術, 以冀僥倖於萬一。 及其事敗之後, 乃以義士自處, 可謂心迹猥狽矣。 其得爲烈丈夫乎? 或曰: ‘虛死不如立功, 滅名不如報德。 三問等, 其心未嘗頃刻, 而不在於舊主, 所以北面於我朝, 將以期其後功。’ 是不然。 苟以成功爲貴, 而不自恥其委質, 則夷、齊、三仁, 必相與爲謀, 北面而事周, 以圖興復矣。 由玆以觀, 此輩非獨不得致忠於其主, 亦不可爲法於後世也。 故予今表而竝論之。 況人各爲主, 此輩與我朝, 乃不共戴天之賊, 則此書非今日臣子所可忍見。 余欲盡取此書而焚之。 或偶語者, 亦重治何如?" 回啓曰: "臣等伏見備忘記, 驚懼罔措。 臣等曾聞有以《六臣傳》, 爲言於經席者, 心極未安。 今者上敎傷痛懇惻, 允合天理。 但此書訛誤失實, 誠如聖諭, 閭閻之間, 罕有之, 而年久湮沒之餘, 若爲搜索之擧, 必致大擾, 終爲無益矣。 且此妄書, 苟有識者, 孰敢偶語? 偶語之禁一下, 則當風俗薄惡之時, 告訐之路, 從此而開, 誣枉之弊, 亦不可不慮。 中外之人, 見聞所及, 謹當兢省惕然, 不待禁令而止矣。" 答曰: "如是言之, 今姑勉從。"
- 【태백산사고본】 7책 10권 7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339면
- 【분류】출판-서책(書冊) / 변란-정변(政變)
- [註 0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