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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8권, 선조 7년 10월 10일 신해 1번째기사 1574년 명 만력(萬曆) 2년

서경을 진강하고 유희춘이 정유길의 일, 가공의 폐단, 사서 오경의 구결을 논하다

《서경(書經)》의 홍범(洪範)을 진강했다. 진강이 끝나고 유희춘이 진언하기를,

"저번에 신이 올린 비위를 조리하는 데 대한 말이 미진한 데가 있었습니다. 초목과 오곡(五穀)이 양기를 받아서 결실하듯이 사람의 몸도 그러하여, 언제나 태양 가까운 데에서 기거(起居)하고 침식(寢息)해야 하고 너무 깊숙한 음기(陰氣) 쌓인 곳에 오래 앉아 있음은 좋지 않습니다. 소신이 일찍이 유생으로서 산사(山寺)에서 독서할 적에 법당(法堂) 안의 깊숙한 곳에서 거처하였는데 기운이 매우 좋지 못함을 느꼈었습니다. 누구나가 양기와 가까운 곳에 있지 않아서는 안 됨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비현각(丕縣閣)은 양기가 멀지 않지만 대내(大內)의 깊숙한 데에 있어서는 어떠한지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일찍이 어느 글을 보니 ‘요(堯)·순(舜)·우(禹)가 궁실(宮室)을 낮게 한 것은 대개 궁실이 높으면 공기가 썰렁하여 사람에게 해로울 것을 생각한 것이다.’ 했었다. 비록 성인들이 궁실을 낮게 한 것은 음냉(陰冷)을 피하려는 뜻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역시 높은 집이 사람에게 해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였다. 유희춘이 아뢰기를,

"저번에 대간이 정유길의 일을 논계할 적에 성상께서 비답하신 말씀 중에 과격한 말씀이 있었는데 이는 본원을 함양(涵養)하는 공부가 지극하지 못하여 그러신 것입니다. 옥당이 즉시 차자를 올려 진달하려 하다가 신들이 그윽이 생각해 보건대 상께서 반드시 뉘우치며 깨달으시게 되리라 여겼기 때문에 그만두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함양하는 공부는 또한 간단(間斷)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양주(楊州)에서 조광조를 위하여 서원(書院)을 세웠습니다. 조광조는 사문(斯文)을 일으킨 사람이고 양주는 바로 그의 고장이었으니 인하여 사우(祠宇)를 세워 경모(景慕)하는 곳으로 삼고 또한 유생들의 장수(藏修)138) 하는 곳으로 만드는 것도 불가할 것이 없습니다. 김굉필(金宏弼)을 모신 서원의 예(例)에 따라 현액(懸額)과 서책을 내리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조광조종남도정(終南都正) 이창수(李昌壽)139) 에게 화답한 시를, 신이 요즘에 윤두수에게서 얻었으니 《유선록(儒善錄)》에 첨입하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첨입하는 일은 무방하다."

하였다. 유희춘이 아뢰기를,

"당금의 폐단을 상께서는 알고 계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번에 건의한 가공(家供)에 있어서는 그 뜻이 단지 폐단이 있는 일을 제거하고 간편하게 하려는 것이었는데 지금까지 시행하고 보니 그 폐해가 하나가 아닙니다. 호조 판서 윤현(尹鉉) 등이 아뢴 대로 국고(國庫)의 저축이 고갈되어 지탱할 수 없다는 것이 한 가지 폐단이요, 사공(私供)을 일체 하지 못하므로 늦게 사진(仕進)했다가 일찍 파하여 국가 일에 있어 허술하게 됨이 한 가지 폐단이요, 식사를 제때에 하지 못하므로 비위를 손상하여 병을 얻는 사람이 잇따라 생기는 것이 한 가지 폐단입니다.

옛날 정자(程子)의 아버지 정향(程珦)은 벼슬살이할 적에 좌우의 사령(使令)하는 사람들에 대해 날마다 그들이 배고픈지 배부른지와 수고로운지 편한지를 살피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임금은 군신(群臣)들을 돌보아야 하는 법인데 어찌 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 가공 규정의 설치는 당초에 성상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단지 건의하는 신하의 의견에 따라 지리(支離)한 폐단을 제거하고 간편한 규정을 만들려고 한 것뿐이었는데, 어찌 반대로 이러한 폐단이 이루어질 줄을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나 재상의 반열에 있는 사람들은 그래도 부지할 수 있지만 품계가 낮은 사람이나 소소한 종들 같은 사람과 먼 외방(外方)의 객지에 와서 벼슬살이하는 인사(人士)들은 더욱 감당할 수 없습니다."

하고, 유희춘이 물러가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무릇 글 속의 토석(吐釋)을 혹자들은 소소한 일이어서 꼭 유의(留意)할 것까지는 없다고 하지만 성현들의 하신 말씀이 ‘글 뜻을 알지 못하고서 정미(精微)한 내용을 통할 수 있는 자는 없다.’ 하였다. 지금 사서(四書)와 경서(經書)의 구결(口訣)과 언석(諺釋)140) 을 경이 정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경의 학문이 정밀하고 해박함은 세상에 드문 일이다. 사서와 오경(五經)의 구결 및 언석을 경이 모두 자상하게 정해 놓았으니, 하나의 국(局)을 설치할 만하다. 혹 경학을 강론할 관원을 뽑고 싶다면 7인이 있으니, 경이 알아서 가리라."

하였다. 유희춘이 아뢰기를,

"이 일은 꼭 국을 설치할 것까지는 없고 다만 마땅히 정밀하고 명석한 사람들만 공동으로 의논하여 정하면 됩니다. 다만 신은 지금 한창 《주자대전(朱子大全)》을 교정하고 있어 다른 것에 미칠 틈이 없습니다. 신은 매우 잔약한 데다가 또한 몹시 노쇠했으니 내년에 《주자대전》 인출(印出)을 끝내면 그해 가을에는 전리(田里)로 돌아가서 하도록 해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 그렇게는 안 된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8권 56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313면
  • 【분류】
    재정-국용(國用) / 출판-서책(書冊) / 왕실-사급(賜給)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어문학-어학(語學) / 어문학-문학(文學)

  • [註 138]
    장수(藏修) : 학문(學問)을 닦고 익히는 것. 장은 마음에 항시 학업(學業)을 생각하는 것. 수는 수습(修習)을 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 [註 139]
    종남도정(終南都正)이창수(李昌壽) : 金宏弼(김굉필)의 문인으로 조광조와 교류하였던 종남부수 이창수로 추정된다.
  • [註 140]
    언석(諺釋) : 언해.

○辛亥/講《洪範》。 講畢, 柳希春進曰: "頃日臣所獻條理脾胃之說, 有未盡者, 草木五穀, 以向陽成實, 人身亦然。 常於近太陽之地, 起居寢處, 不可久坐於太深邃積陰之處。 小臣嘗以儒讀書山寺, 處法堂深邃之中, 便覺氣甚不安。 人之不可不近陽, 尙矣。 丕顯閣則不遠於陽, 大內深邃之地, 臣未之知也。" 上曰: "予嘗見一書云: ‘之卑宮室。’ 蓋慮室高風冷之中, 人雖聖人之卑宮室, 不出於避陰冷, 然亦可見其高室之有害於人也。" 希春曰: "頃日臺諫論啓鄭惟吉時, 上之批答之辭, 有過激之辭, 涵養本源之功, 未至而然。 玉堂卽欲箚陳, 臣等竊料, 自上必有悔悟, 爲此而止。 然亦涵養之功, 不可間斷也。 楊州趙光祖建書院, 光祖興起斯文, 而楊州乃其土性, 因設祠宇, 以寓景慕, 而仍爲儒生藏修之地, 未爲不可。 乞依金宏弼書院例, 賜額與書冊。" 又曰: "趙光祖終南都正 昌壽詩, 臣頃日得之於尹斗壽, 乞添入。" 上曰: "添入無妨。" 希春曰: "當今之弊, 自上不可不知。 頃日建議家供, 其意只欲除弊事, 而爲簡便也。 到今行之, 其弊非一。 戶曹判書尹鉉等所啓, 國儲虛竭, 不能支當, 一弊也; 私供不能齊一, 晩仕早罷, 國事虛疎, 二弊也; 飮食失時, 損傷脾胃, 得病者相繼, 三弊也。 昔程子之父珦居官時, 左右使令之人, 無日不察其飢飽勞佚。 況於人主體群臣, 豈可不念? 此家供之設, 初不出於上意, 只緣建議之臣, 欲除支離之弊, 爲簡便之規而已。 豈料飜成如此之弊乎? 然宰相之列, 猶可支持, 秩卑僮小之員, 遠方旅宦之士, 尤不能堪。" 希春欲退, 上曰: "凡文字吐釋之間, 或者以爲小事, 不必留意。 然聖賢有言, 未有不得於文義, 而能通其精微者。 今四書經書口訣諺釋, 卿無不定。 卿之學問精博, 世所罕有。 四書五經口訣及釋, 卿皆詳定。 亦可以設局, 或欲取經學講論之員有七, 惟卿所擇。" 希春曰: "此事不必設局, 只當與精明之人, 通議而定之。 但臣今方校正《朱子大全》, 無暇及他, 臣孱弱之甚, 衰老亦至。 明年《朱子大全》畢印出, 其秋乞歸田里, 而爲之。" 上曰: "吁, 此則不可。"


  • 【태백산사고본】 5책 8권 56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313면
  • 【분류】
    재정-국용(國用) / 출판-서책(書冊) / 왕실-사급(賜給) / 왕실-경연(經筵) / 왕실-국왕(國王) / 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어문학-어학(語學) / 어문학-문학(文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