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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8권, 선조 7년 5월 20일 계사 1번째기사 1574년 명 만력(萬曆) 2년

경연에서 유희춘이 양생론, 정업원의 일 등을 아뢰다

경연을 열었다. 유희춘서백감려(西伯戡黎)074) 를 진강했고, 진강이 끝나자, 대간(臺諫)과 노수신(盧守愼)·정종영(鄭宗榮)·유전(柳㙉)·홍진(洪進)이 모두들 나아가 정업원 등의 일을 진달(進達)했다. 유희춘이 가장 뒤에야 나아가 진달하기를,

"지난번에는 성상의 옥음(玉音)이 크고 통창하므로 입시(入侍)한 신하들이 기뻐하며 반가와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신(臣)도 성상께서 조리하며 약을 드신 효과라고 여겼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옥음이 대단히 순조롭지 못하므로 우려를 금하지 못하겠으니 다시 더 조리하시어 기어이 쾌차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증세는 소시 때부터 이미 있었는데 생겼다 없어졌다 하여 내가 매우 답답하다."

하였다. 유희춘이 아뢰기를,

"비위(脾胃)는 음식으로 말미암아 생기기도 하고 혹은 독서(讀書)의 과로 때문에 생기기도 하고 더러는 기거(起居)의 절도(節度)가 없는 것 때문에 생기기도 합니다. 신이 전일에 올린 조리에 관한 말들은 곧 《연수서(延壽書)》·《수친양로서(壽親養老書)》·《산거사요(山居四要)》·《명의잡서(名醫雜著)》·《사림광기(事林廣記)》 등 일체의 양생(養生)하는 글을 상고하여 뽑아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말들이 매우 좋았다. 과연 능히 그대로만 한다면 단지 비위만 조리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온 몸의 갖가지 병이 모두 생기지 않을 것이다. 다만 사람이 모두를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일 뿐이다."

하였다. 유희춘이 아뢰기를,

"밤에 잠을 자지 못하는 것도 또한 크게 비위에 해롭습니다. 전일에 정사(政事) 일로 옥체(玉體)가 안온하지 못하였으니, 밤중에 자지 못하는 것은 지극히 미안한 일입니다. 대개 대간(臺諫)이나 승지의 결원(缺員)은 비록 한낮에 생긴 것이라도 이조의 낭청(郞廳)이 반드시 당상(堂上)의 집에 두루 품해 본 다음에 전조(銓曹)가 대궐 뜰에 와서 하게 되므로 사세가 자연히 늦어지게 됩니다.

바라건대 이 뒤로는 대간이 많이 체직된 것과 같은 시급한 정사가 있게 되더라도 즉시 전교를 내려 정사를 하도록 하고, 대간 하나나 승지 하나의 체직이 오후(午後)에 생겨 이조의 낭관(郞官)이 와서 계청(啓請)한다면 내일 하도록 명하셔도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한다면 자연히 밤중에 정사를 하는 일이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정업원(淨業院)의 일에 대해 논계(論啓)하기를,

"이는 중종조(中宗朝)에 일찍이 혁파하여 독서당(讀書堂)을 만들었었는데 문정 왕후(文定王后) 때에 중 보우(普雨)의 말에 따라 다시 세웠고, 처음에는 이름을 인수궁(仁壽宮)이라 하였다가 그 뒤에 정업원으로 했습니다. 이번에 유생(儒生)들이 상소한 일에 있어서는, 성상께서 이교(異敎)의 허위(虛僞)를 환히 아시니 조금도 존숭하여 믿는 일이 없으심을 신자(臣子)인 사람들이 누가 알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두 상전(上殿)께서 유난(留難)해 하시므로 혁파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는 진실로 급하게 할 수 없는 일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증자(曾子)는 부모에게 도를 깨우쳐주는 것을 지극한 효도로 여겼습니다. 윤돈(尹焞)의 어미는 죽을 때에 윤돈에게 매양 일이 없을 적이면 반드시 《금강경(金剛經)》을 한 번씩 읽도록 했었으니, 이는 그가 평소에 부모에게 도를 깨우쳐주지 못한 것입니다. 대명(大明)의 순수한 유자(儒者) 조단(曹端)은 아비가 불교를 좋아하였는데 불교를 물리치는 글을 지어 밤마다 촛불을 켜놓고 간절하게 깨우쳐주었으므로 그 아비가 마침내 해혹(解惑)되었습니다. 성상께서도 진실로 양전(兩殿)께 곡진하게 진달하시어 차차로 깨닫게 하신다면 정업원을 혁파하기가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대개 부도(浮屠)075) 의 말은 어리석은 세속을 현혹하여 이익을 취하고 가만히 앉아서 높이며 받들어 섬김을 누리는 것으로, 이로움은 없고 해만 있음을 역대의 사서에서 환하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뜻으로 양전께 진달하시기 바랍니다."

하고, 또 진달하기를,

"홍문관(弘文館)은 경연에서 진강(進講)할 서책을 교정하는 것이 가장 긴요한 일인데, 지금은 다만 하번(下番)인 저작(著作)·정자(正字) 각 1원(員) 및 수찬(修撰) 단지 1원과 상번(上番) 1원만이 있으므로 몹시 쓸쓸합니다. 그전에 중종조(中宗朝) 때에는 옥당(玉堂)의 관원이 항시 12∼13명이었습니다. 대개 임용(任用)할 만한 인물 중에 홍문록(弘文錄)에 들지 못한 사람이라도 또한 대간이 될 수 있지만, 옥당은 반드시 홍문록에 든 다음에야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은 옥당의 관원이 많이 양사(兩司)로 옮겨갔기 때문에 옥당에 사람이 모자라는 것이니, 바라건대 상께서는 힘써 옥당을 채우소서. 대간의 경우는 홍문록에 들지 못한 자일지라도 선량한 선비면 채울 수 있는 것입니다."

하고, 또 진달하기를,

"‘자기는 말을 탔는데 존장이 도보(徒步)로 가면 바라보고서 말에서 내려 나아가서 읍(揖)을 하고, 멀리 지나가면 그제야 말에 오른다.’ 한 이 말을 마땅히 보태 넣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예조(禮曹)의 낭관(郞官)을 불러 이르라. 그 공사(公事)를 이제까지 계하(啓下)하지 않았는가?"

하였다. 신이 응대하기를,

"이미 삼공(三公)에게 의논하여 허락받았으므로 이번에 마땅히 입계(入啓)될 것이라 들었는데, 오직 이 한 조목만이 미비합니다."

하고, 또 진달하기를,

"지금 정종영(鄭宗榮)에게 듣건대 상께서 경서(經書)를 읽으실 적에 단지 대문(大文)076) 만 풀면 되고 수고롭게 전주(傳註)까지 푸실 것은 없다고 했고, 노수신(盧守愼)도 하는 말이 ‘마땅히 경연에서 읽는 양을 줄이고 대신 대화하고 의논을 해야 한다.’ 하였기에 신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대개 옥음(玉音)이 이러하시니 진강하는 장수(張數)를 진실로 마땅히 헤아려 감해야 합니다. 전주의 풀이에 있어서는 성학(聖學)이 이미 투철하시니 풀이하시는 것이 또한 자못 수고롭습니다. 단지 대문만 풀이하고 전주는 풀이하지 않더라도 어찌 방해롭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풀이하는 것이 뭐 어렵겠는가."

하였다. 유희춘이 아뢰기를,

"박근원(朴謹元)이 진달(陳達)한 서북(西北) 지방에 감군 어사(監軍御史)를 보내자는 말은 이치가 있는 말입니다. 대개 다른 도에는 보낼 필요가 없지만 오직 양계(兩界)에는 마땅히 보내야 합니다. 대개 신이 오랫동안 북쪽 변방에 귀양가 있었기에 실정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왕화(王化)가 멀어 수령(守令)이나 진장(鎭將)이 탐오하고 포악하며 부정한 자가 있을 뿐 아니라 토호(土豪)와 군관(軍官)이 피인(彼人)077) 들을 침탈(侵奪)하는 자도 있었습니다. 만일 어사를 보내어 1년에 너댓 달만 왕래하게 하더라도 수신(守臣)078) 들이 두려워하고 조심하여 군민(軍民)들이 거의 되살아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卿)이 귀양갔던 데가 바로 종성(鍾城)이구나."

하였다. 응답하기를,

"신이 정미년 9월에 제주(濟州)로 귀양갔다가 다시 종성으로 옮겼습니다. 11월에 바다를 건너오고 무신년 2월에 종성에 이르러 19년 동안 귀양살이하다가, 을축년 12월에 이르러 명종(明宗)께서 은진(恩津)으로 양이(量移)하셨습니다. 신이 병인년 봄에 은진에 이르러 2년 동안 있다가 정묘년 10월에 부름을 받고 조정으로 돌아왔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은진으로 옮겨 온 것은 내가 몰랐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8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302면
  • 【분류】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정(軍政) / 왕실-국왕(國王) / 왕실-경연(經筵) / 왕실-비빈(妃嬪) / 정론-간쟁(諫諍)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癸巳/經筵。 希春《西伯戡黎》。 講畢, 臺諫盧守愼鄭宗榮柳㙉洪進咸進, 而陳淨業院等事。 希春最後進陳: "頃者上玉音鴻暢, 入侍之臣, 莫不悅喜。 臣以爲自上調理藥餌之效。 及今日, 則玉音最艱澁, 不勝憂慮。 願更加調理, 期於快差。" 上曰: "此證, 自少時已有之, 或發或息, 予甚悶焉。" 柳希春曰: "脾胃, 或由飮食而生, 或以讀書過勞而生, 或以起居不節而生。 臣頃日調理之說, 乃考《延壽書》《壽親養老書》《山居四要》名醫雜著《事林廣記》, 一切養生之書, 而抄出者也。" 上曰: "其說甚好。 若果能依施, 則非但調理脾胃, 一身百病, 皆不生矣。 但人不能盡行耳。" 柳希春曰: "夜不得眠, 亦大妨於脾胃。 頃日政事, 爲未穩於玉體, 不寐中夜, 極爲未安。" 蓋臺諫承旨之闕, 雖在於日中, 吏曹郞廳, 必遍稟於堂上之家, 然後銓曹乃來于闕庭而爲之, 其勢自至於晩。 請今後有急政事, 如臺諫多遞之類, 卽傳敎令政事, 若一臺諫一承旨之遞, 在於午後, 吏郞來啓請, 可命明日爲之。 如是, 則自無犯夜之政矣。 又論: "淨業院, 中廟朝嘗罷之, 而爲讀書堂。 及文定王后時, 以僧普雨之言, 復立。 初號爲仁壽宮, 厥後爲淨業院。 今此儒生之疏, 聖上洞照異敎之虛僞, 無一毫崇信。 凡在臣子, 孰不知之? 第兩上殿留難, 故未能革罷。 此固不可遽也。 然曾子以諭父母於道, 爲孝之至極。 尹焞之母臨沒, 令每於無事時, 必讀《金剛經》一遍。 此是平日, 闕却諭父母於道。 大明醇儒曹端之父嗜佛, 作闢佛說, 名夜行燭, 懇懇曉諭, 其父終解惑。 聖上於兩殿, 苟能委曲陳達, 漸漸開悟, 則革罷淨業不難矣。 蓋浮屠之說, 誑惑愚俗, 以取利坐享, 其奉事上, 無利而有害, 歷代史牒, 昭昭可見。 願以此意, 開陳於兩殿。" 又陳: "弘文館, 經筵進講書冊校正, 最爲緊急, 而今日只有下番著作。 正字各一員, 修撰只一員, 上番二員, 蕭索如此。 昔在中廟朝, 玉堂之員, 常有十二三。 蓋以可用人物, 未爲弘文錄者, 亦得爲臺諫玉堂, 則必有錄, 然後可爲。 今玉堂之員, 多遷兩司, 此玉堂所以乏人也。 願上務充玉堂。 若臺諫, 則可以未錄之良士爲之。" 又陳: "行則望見, 而下馬趨楫, 過旣遠, 乃上馬。 此當添入。" 上曰: "可招禮郞語之。 其公事, 至今未啓下乎?" 臣對曰: "聞已議於三公蒙準, 今當入啓。 惟此一條, 尙未備。" 又陳: "今聞鄭宗榮, 上讀經書時, 只釋大文, 不必勞釋傳註。 盧守愼亦言宜簡。 經筵之受, 代以言語議論, 臣惑焉。 蓋玉音如此, 進講張數, 固宜量減。 至如傳註釋, 聖學旣已透澈, 釋之, 亦頗勞苦, 只釋大文, 而不釋傳註, 何妨?" 上曰: "釋之何難?" 希春曰: "朴謹元所陳西北監軍御史之說, 有理。 蓋他道, 則不必遣。 唯兩界, 則當遣。 蓋臣久謫北邊, 備諳事情。 王化遼遠, 不特守令鎭將, 貪暴不中者有之。 土豪、軍官之侵彼人者, 亦有之。 若遣御史, 一年只四五朔往來, 則守臣畏戢, 軍民庶有蘇息之理矣。" 上曰: "卿之謫去處, 定鍾城?" 臣對曰: "臣於丁未九月, 謫濟州, 更遷于鍾城。 十一月渡海, 戊申二月, 到鍾城, 謫居十九年。 至乙丑十二月, 明廟量移于恩津。 臣以丙寅年春, 到恩津, 留二年。 至丁卯十月, 蒙召還朝矣。" 上曰: "卿之移來恩津, 予未知之矣。"


  • 【태백산사고본】 5책 8권 34장 B면【국편영인본】 21책 302면
  • 【분류】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정(軍政) / 왕실-국왕(國王) / 왕실-경연(經筵) / 왕실-비빈(妃嬪) / 정론-간쟁(諫諍) / 사상-불교(佛敎) / 역사-고사(故事)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