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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실록 8권, 선조 7년 2월 14일 기미 1번째기사 1574년 명 만력(萬曆) 2년

주강에서 유희춘이 향약의 장유 예절을 상론하고 이이가 시무를 안다고 말하다

주강이 있었다. 유희춘반경(盤庚)의 지임(遲任) 등의 두 대문을 진강하고서 ‘사람은 오직 구가(舊家)에서 구한다.’는 말에 따라 진언하기를,

"이는 반경이 세가 구족(世家舊族)이 서로들 근거 없는 말을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고 개유한 것이기 때문에 지임이 ‘사람은 오직 구가에서 구한다.’ 한 말을 인용한 것입니다마는, 실은 제왕들이 현인을 구할 적에 어찌 반드시 구가에서만 찾겠습니까. 성탕(成湯)은 현명한 사람을 쓸 적에 족속을 묻지 않았다고 했고, 맹자는 ‘임금이 현명한 사람을 진용할 적에 낮은 사람이 높은 자를 앞서게 하기도 하고 소원한 사람이 친척을 앞서게 하기도 한다.’ 했으니, 대개 현인을 구하는 길은 넓어야지 좁아서는 안 됩니다."

하고, 또 ‘이제 내가 선왕에게 크게 제사할 적에 너희 선조도 따라서 제사 받는다.’ 한 대문을 설명하기를,

"훈공과 덕망이 있는 신하를 종묘에 배향하는 것은 으레 해온 일입니다. 아조(我朝)의 오래된 신하들을 갑자기 말하기는 어려운 일이지만 중묘(中廟)에는 박원종(朴元宗) 등 세 원훈(元勳)과 정광필(鄭光弼)을, 인묘(仁廟)에는 홍언필(洪彦弼)김안국(金安國)을, 명묘(明廟)에는 심연원(沈連源)이언적(李彦迪)을 배향했는데, 모두가 훈로와 덕망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정광필을 당시의 사림(士林)은 관후하고 넓은 도량이 있어서 소소한 일은 쟁변하지 않는다고 했고 사론(士論)은 더러 몽롱하여 분별하는 것이 없다고 나무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기묘년에 남곤(南袞)·심정(沈貞)·홍경주(洪景舟) 등이 사화(士禍)를 조성하여 몰래 신무문(神武門)으로 들어가 참소하는 말로 중묘를 놀라게 하여, 그날밤으로 사림들을 도륙하려고 할 적에 정광필이 영상으로서 부름을 받고 의논에 참예하였다가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어탑(御榻)에 부딪치어 피가 나도록 극력 간했습니다. 비록 종묘께서 세 번씩 하는 참소에 투저(投杼)041) 하기는 했지만 성품이 본시 자인(慈仁)하신 분이라 측은하게 여기며 감동하셔서 곧 그들의 예봉을 잠재웠으니, 광필은 큰 고비에 임하여 늠름한 사람이었습니다. 홍언필은 벼슬이 높으면서도 조심하고 근신하였으며, 심연원은 왕후의 친척으로 수상의 자리에 있으면서 겸손과 근신으로 자신을 경계했고 사림들을 애호하여 일찍이 을사년 사림의 화 때문에 상심하고 통탄했었으니 역시 선인(善人)입니다. 김안국의 일은 신 희춘이 지난번에 이미 진달했었고 이언적의 도덕과 학문은 상께서 이미 알고 계십니다. 이런 명신(名臣)들은 상께서 알고 계시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진강이 끝나고 유희춘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해수(李海壽)가 논한 전(傳)의 구결(口訣)이 합당하니 개정하소서."

하니, 상이 개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다. 유희춘이 또 상께 아뢰기를,

"향약(鄕約) 속의 옛 규약은 진실로 시기를 기다렸다가 거행해야 합니다마는 그중 한가지 일은 간편하여 폐단이 없는 것으로서 백성을 교화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만드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기에 삼가 계달합니다. 신이 향약의 규례를 고찰해 보니 ‘동류끼리 교접하는 데 다섯 등급이 있는데, 첫째는 존자(尊者)로서 자신보다 20세가 위인 사람이고, 둘째는 장자(長者)로서 자신보다 10세가 위인 사람이며, 세째는 적자(敵者)로서 자신의 나이와 위아래로 10세가 못되는 사람이고, 네째는 소자(少者)로서 자신보다 10세가 아래인 사람이며, 다섯째는 유자(幼者)로서 자신보다 20세가 아래인 사람이다. 존자와 유자가 상대되고 장자와 소자가 상대되는데 향약의 모임에서 유자와 소자는 존자와 장자에게 모두 재배(再拜)한다.’ 했으니, 이는 대개 장유(長幼)의 차서를 중히 여긴 것입니다. 또 ‘무릇 모이는 자는 모두들 나이대로 한다. 만일 특이한 벼슬이 있는 사람이라면 비록 향인(鄕人)이라도 나이대로 하지 않는다.’ 했으니, 이는 또한 조정의 벼슬을 중히 여긴 것으로서, 어른을 어른으로 대접하고 귀한 이를 귀한 이로 대접하는 것이 어긋나지 않도록 함께 행하는 의리입니다.

우리 나라 풍속이 공청(公廳)에서의 공례(公禮)에는 재배례를 행하고 사례(私禮)에는 단지 읍(揖)만 하지만 사처에서는 이 두 가지 예를 겸하여 써야 합니다. 평소에 사인(士人)들이 존장에게는 단배례(單拜禮)만 행하는데 단배가 비록 성대한 예는 아니지만 또한 공경을 바치는 뜻이 있으니, 서로 대등하게 읍만 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중묘조 이전부터 동류 사인들이 사처에서 서로 만났을 때 존자에게만 절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장자에게도 대부분 절을 하였으므로 장유의 차서가 있어서 공순한 것이 풍속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20∼30년 이래로 인심이 예와 달라져 선비들 풍습이 날로 태만해졌으므로 향당과 여리에서 형장(兄長)을 만나도 절을 하지 않을 뿐 아니라 아버지 뻘의 존자를 만나도 서로 대등하게 읍만 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으니, 이는 조관(朝官)들이 사례로서 읍하는 것만 보았고 공례로서 공손하게 재배하는 예를 알지 못해서이며, 길이나 땅위에서는 절을 할 수 없는 것만 보았고 당(堂)이나 방 안에서는 절을 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 것은 알지 못해서인데, 그대로 따르며 물이 들어서 점차로 거만한 것이 풍속을 이루었습니다. 주자(朱子)《논어》의 ‘공손함이 예에 가까우면’이라는 대문을 해설하여 ‘존장을 보거든 절하는 것이 예이다.’ 하였고, 또 《동몽수지(童蒙須知)》를 지어 소자(小子)들을 교훈하기를 ‘길에서 장자를 만나거든 빨리 다가가 읍한다.’ 했습니다. 만일 이번에 이런 예를 거듭 밝혀, 모든 동류 사인들이 존자에게는 더러운 땅바닥이 아니면 반드시 절하도록 하고 장자에게는 각각 형편에 따라 알맞게 절하거나 읍하도록 하며 같이 조관으로 있는 사람끼리도 나이와 벼슬이 모두 높은 존자에게는 사처에서도 반드시 절하게 하고 장자에게는 단지 읍만 하도록 하며, 혹 소자에게 벼슬이 있고 장자에게 벼슬이 없을 경우에 서로 공경하여 읍만 하게 한다면, 장유의 차서와 관작의 차서에 대한 예를 다같이 행하게 하는 것입니다. 낮은 사람이나 어린 사람이 길에서 존자를 만나면 말에서 내리게 하는 것도 백성을 예로써 가르치는 일이니 사체가 가볍지 않습니다. 해조에 명하여 대신들과 의논해서 상정하여 시행하게 하여 예절을 무시하는 오만한 풍습을 개혁하고 공손하고 화순한 풍속을 이룬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옳으니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행하게 하라."

하였다. 희춘이 즉각 일어나 사은하였다. 이해수이이의 해박함과 시무에 능통함을 극력 진달하니, 희춘도 아뢰기를,

"이이는 시무를 아는 사람입니다."

하였다. 아뢰는 말이 끝나고 물러갈 때가 미시말(未時末)이었다.


  • 【태백산사고본】 5책 8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294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사(宗社)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어문학-어학(語學)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 [註 041]
    투저(投杼) : 여러 사람의 참소에는 누구든지 넘어가게 된다는 것. 증삼(曾參)의 어머니가 베를 짜고 있는데 어떤 사람이 와서 증삼이 사람을 죽였다고 하였으나 믿지 않고 태연하다가 세 사람씩이나 와서 말하자 그만 북[杼]을 던져 버리고 도망했다는 고사이다.

○己未/有晝講。 希春《盤庚》《遲任》等二段。 因人惟求舊, 而言曰: "此盤庚主於世家舊族, 胥動浮言而開諭, 故引遲任之言, 以爲人惟求舊。 其實帝王之求賢, 豈必專以舊家爲哉? 成湯立賢無方, 《孟子》云: ‘國君進賢, 卑踰尊, 疎踰戚。’ 蓋求賢之路, 宜廣而不宜狹也。" 又說玆予大享于先王爾祖, 其從與享之曰: "勳業德望之臣, 配享宗廟尙矣。 我朝久遠之臣, 難以遽言, 只如中廟配享, 用朴元宗等三元勳及鄭光弼, 仁廟洪彦弼金安國, 明廟沈連源李彦迪, 皆有勳勞德望者也。 鄭光弼, 當時士林以爲有寬厚夷曠之度, 而小事不爭辨, 士論或譏其曚曨, 而無辨。 然至於己卯, 南袞沈貞洪景舟等搆成士禍, 潛入神武門, 讒說震驚中廟, 至欲踐血士林於其夜, 光弼以領相, 被召參議, 涕泣極諫, 至以頭叩御榻而出血, 賴中廟性本慈仁, 雖投杼於三至之讒, 惻然感動, 卽寢其鋒。 蓋光弼臨大節, 而澟然者也。 洪彦弼, 位高而小心謹愼; 沈連源, 以后戚居首相, 乃以謙謹自飭, 愛護士林, 嘗以乙巳士林之禍傷痛, 亦善人也。 金安國事, 臣希春頃已陳達; 李彦迪, 道德學問, 自上已知之矣。 此等名臣, 上亦不可不知。" 講畢, 希春進曰: "李海嘉所論傳口訣爲當, 請改正。" 上曰: "不改亦可。" 希春又言於上曰: "鄕約舊規, 則固當待時而行之。 其中一事, 簡便無弊, 而有補於化民成俗, 故謹啓達。 臣謹按鄕約之儀, 同類相接, 有五等。 一曰尊者, 長於已二十歲者是也; 二曰長者, 長於已十歲者是也; 三曰敵者, 與已年相上下, 不至十歲者是也; 四曰少者, 下於已十歲者是也; 五曰幼者, 下於已二十歲者是也。 尊者與幼者相對, 長者與少者相對, 鄕約之會, 幼者少者, 於尊者長者, 皆再拜。 蓋以長幼之序爲重, 又云: ‘凡會者, 皆以齒, 若有異爵者, 雖鄕人, 亦不以齒。’ 此又以朝廷之爵爲重, 以長長貴貴, 竝行不悖之義也。 國俗, 於公廳禮, 行再拜禮, 私禮只揖。 私處, 當竝用兩義。 常時士人, 於尊長, 行單拜禮。 單拜雖非華禮, 亦有致敬之意, 與相抗而揖, 不同。 自中廟朝前, 同類士人, 私處相見, 非但拜於尊者, 於長者處亦多拜。 長幼有序, 恭順成俗, 自三二十年來, 人心不古, 士習日趨於簡慢, 鄕黨閭里之間, 非特見兄長, 而不拜, 雖遇父行尊者, 相與抗揖者往往有之。 蓋徒見朝(宦)〔官〕 私禮之揖, 而未知公禮再拜之恭; 徒見道路地上之不可拜, 而不知堂室之上, 不可不拜, 因循浸漬, 漸成驕倨之風。 朱子《論語》恭近於禮曰: ‘見尊長而拜, 禮也。’ 又作《童蒙須知》, 訓小子曰: ‘道路遇長者, 疾趨而揖。’ 今若申明此禮, 凡同類士人, 於尊者, 非陋地, 則必拜於長者, 或拜或揖, 各隨其宜。 同爲朝官者, 於齒爵俱高之尊者, 私處必拜, 於長者只揖; 或少者有官, 長者無官, 則相敬而揖, 通行長幼官爵之義; 卑幼路遇尊者, 下馬。 此亦敎民以禮, 事體非輕, 乞命該曹, 議諸大臣, 詳定施行, 以革苟簡傲慢之習, 以成恭遜和順之風, 不勝幸甚。" 上曰: "此說是矣。 可令該曹議行。" 臣希春卽起謝。 李海壽力陳李珥該博, 又能通曉是務。 希春亦曰: "李珥識時務之人也。" 說畢而退, 未時末矣。


  • 【태백산사고본】 5책 8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21책 294면
  • 【분류】
    왕실-경연(經筵) / 왕실-종사(宗社) /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어문학-어학(語學)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